156화 가난이 죄라더니
조계안이 말했다.
“육장봉, 괜히 신경 쓸 것 없어. 월령안은 너를 믿지 않거든.”
월령안은 그를 믿지 않듯, 육장봉도 믿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육장봉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월령안에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줘야 했다.”
‘월령안이 나를 믿지 않게 된 게 누구 탓인데?’
“왜 월령안이 알아야 하지?”
조계안은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있는데 말이야.”
“네가?”
육장봉은 조계안을 아래위로 쫙 훑어보았다. 비꼬듯이 말했다.
“조왕 전하, 몸조리나 잘하십시오.”
육장봉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조계안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육장봉, 인정해. 지금 나를 질투하잖아.”
등 뒤에서 조계안의 득의양양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질투라고?’
조계안이 머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육장봉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 * *
육장봉은 조계안이 무사함을 확인하자,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가 급하게 황궁으로 불러들인 걸 보면, 단지 조계안이나 보라는 뜻은 아닐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서방(御書房)에 도착하자 예를 올리기도 전에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봉아, 네가 잠한성, 야율제와 대항하면 승률이 몇 할이나 되느냐?”
“폐하께서는 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육장봉도 예를 올리지 않고 되물었다.
“이 일을 겉으로 드러내면, 짐은 황제로서 대국을 고려해야 한다. 종묘사직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타협하고 물러서야만 해. 하지만 이번 건만은 절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 타협은 더더욱 할 수 없어!”
‘감히 내 아우를 건드렸으니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게 누구든지 상관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육장봉은 황제의 뜻을 알아차렸다. 마음속으로도 계획을 세웠다.
그의 어머니는 과거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에게도 보복할 필요가 없다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의 손아귀에 걸려들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육장봉은 당연히 이 원한에다가 지난날의 원한까지 합쳐 모조리 갚아 줄 셈이었다.
* * *
월령안이 평소에 사용하는 약은 모두 약왕 손불사의 손에서 나온 약이었다. 그녀는 줄곧 통이 컸다. 팔의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더라도 가장 좋은 약을 사용했다.
약을 바르고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일어났을 때 팔이 더는 아프지 않았다.
물론, 손을 들기는 아직 버거웠다. 밥도 여전히 왼손으로 먹어야 했다. 평소보다 시간을 배로 더 들여서야 아침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요 며칠간 어르신은 좀 괜찮은가?”
월령안은 며칠간 몸에 상처가 있어서, 노인을 찾아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다소 걱정이 되었다.
노인은 몸이 좋지 않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늘 한동안 앓고는 했다. 게다가 이 며칠 동안 날씨도 개었다 흐렸다 변덕스러웠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께서 어제 일어나셨을 때는 조금 불편해하셨는데, 약을 드시고는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집사가 말을 마치고 한마디 덧붙였다.
“어르신께서는 아가씨께 알리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연세도 드신 분이 어린애처럼 구시는구나. 몸이 편찮아도 말도 안 하시고.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월령안은 입으로는 툴툴댔다. 그러나 몸은 이미 문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문턱을 넘자마자, 앞뜰의 하인이 배첩을 들고 앞으로 다가오더니 월령안에게 예를 올렸다.
“아가씨, 장군부의 배첩입니다.”
“장군부라고?”
월령안은 발걸음을 멈췄다. 배첩을 받아 펴 보고는 웃었다.
“언제부터 육 대장군이 방문하실 적에 배첩부터 보내셨대? 참 희한한 일이네.”
비록 한 시진 전에 배첩을 보냈지만, 월령안은 여전히 우습기만 했다.
이유 없이 비위를 맞춘다면, 분명 간통 아니면 도둑질을 저지른 거라고 했다.
육 대장군이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걸 보니,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부탁하려는 상대는 그녀가 아니었다.
배첩은 그녀에게 보냈으나, 육장봉이 만나려는 이는 그녀의 오라버니 수횡천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월령안은 노인의 뜰로 가지 않고 대신 수횡천을 찾아갔다.
소육자는 문파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다 주고 싶다며 수횡천과 의논하고 있었다. 이제 막 이야기를 시작한 참에 월령안이 찾아왔다.
“소육자, 식구들의 선물을 살 건가요? 무엇을 사려고요? 굳이 거리까지 나갈 필요가 없어요. 내가 집으로 보내 달라고 할 테니까, 거기서 골라 보세요.”
월령안이 배첩을 들고 걸어 들어왔다.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었다. 소육자와 수횡천은 화청에 앉아 있었다. 소육자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월 누님!”
소육자는 월령안을 보자, 서둘러 맞이했다.
“누님, 어떻게 오셨나요? 몸에 상처는 다 나았나요? 아니, 다친 게 다 낫지도 않았네요. 용건이 있으면 저희를 부르시지. 왜 직접 오셨어요?”
소육자는 열정적이면서 대범했다. 눈빛 또한 깨끗하고 밝았다. 소육자의 살가움에는 아부하려는 기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월령안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작은 부상이에요. 걷는 데도 지장이 없고요. 참, 오라버니.”
월령안이 앞으로 다가서며 수횡천을 불렀다.
“령안아, 웬일이냐?”
수횡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령안이 든 배첩을 보고는 물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배첩을 수횡천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육 대장군이 사시(巳時 – 오전 9시~11시)에 올 거예요. 아마 오라버니를 만나려 하는 것 같아요.”
수횡천은 배첩을 펼쳐 보았다. 다 읽고 나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육장봉? 그자가 왜 나를 찾을까? 나는 그 사람하고 친분이 없는데.”
유일한 친분은 육장봉이 월령안을 소개해 준 것뿐이었다.
월령안의 처지를 알고 나자, 수횡천은 육장봉이 그더러 그녀를 찾아가라고 한 게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아무래도 강호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아니면 육 대장군이 굳이 오라버니를 찾지는 않을 거예요.”
수횡천은 그녀의 집에서 지낸 지도 며칠이나 됐다. 그러나 육장봉이 찾아왔을 때, 수횡천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요즘 강호에서 무슨 큰일이 있었느냐?”
수횡천이 소육자를 바라보았다.
소육자는 어안이벙벙하여 머리를 저었다.
“별일 없었는데요.”
작은 마찰이야 있겠지만, 진짜 큰일은 들은 게 없었다.
“아니면 내가 변경에 체류하고 있어서, 조정에서 불만스러워하는 건가?”
수횡천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눈에는 시름이 가득했다.
그는 조정에 등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무림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던 예전의 무림이 아니었다.
전임 무림맹주만 해도, 조정과 마찰이 생기는 바람에 황제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황제는 성지를 내려 많은 무림인을 학살했다. 그 뒤에도 각 문파를 극도로 탄압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조금 호전된 상황이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의 무림은 조정의 분노를 견디기 어려웠다.
“오라버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육 대장군이 정식으로 배첩을 보내왔잖아요. 십중팔구는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정말 오라버니에게 불만이 있으면, 육 대장군은 분명 곧바로 찾아와 변경에서 떠나라고 했겠죠.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리가 없어요.”
무림에 고수가 많기는 했다. 그렇다고 황실에서 그들의 체면을 세워 줄 정도는 아니었다.
“맞네요. 맞아요. 맹주님, 절대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지금 조정과 잘 지내기로 뜻을 세웠잖아요. 이 몇 년간 우리도 조정을 많이 도왔어요. 문하 제자들도 얼마나 단속했는데요. 백성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이제는 거의 없어요. 조정에서도 분명 우리에게 만족할 거예요.”
수횡천이 무거운 표정을 짓자, 소육자가 서둘러 목소리를 내어 마음을 풀어주었다.
“소육자의 말이 맞아요. 오라버니, 육 대장군이 한 시진 뒤에 올 거예요. 때가 되면 왜 왔는지 알겠죠.”
월령안도 수횡천이 괜히 마음을 쓸까 봐 곧 화제를 바꾸었다.
“참, 소육자. 방금 문중의 사형(師兄 – 한 스승의 제자로 자신의 선배)과 식구들에게 선물을 사다 준다고 했죠? 무엇을 사려고요? 내가 가져오라고 할게요.”
“아니, 아니, 아니에요. 월 누님, 아무거나 조금만 사면 돼요. 많이 살 것도 아닌데요, 뭘. 다음번에 제가 거리에 나가서 고르면 돼요.”
소육자는 연신 거절했다.
그가 호의를 거절하려는 게 아니었다. 바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고르면, 꼭 좋은 걸 고른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게다가 남의 주머니를 채워 주는 건데요. 내가 여기로 보내라고 하면, 이문을 더 붙이지도 않고, 물건도 진짜배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비싼 물건은 아닐 테니까. 돈이 모자랄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오라버니와 곧 협력할 생각이거든요. 소육자도 우리와 함께 일할 거잖아요. 만약 예산을 초과하면 내가 먼저 내줄게요. 나중에 소육자의 급료에서 제하면 되지 않겠어요.”
월령안은 소육자의 곤란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소육자에게 돈을 직접 쥐여 줄 수는 없었다.
굳이 남의 인성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돈으로 인심을 시험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통이 크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에게나 돈을 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친분이 두터워도 모든 책임을 떠맡아 줄 수는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쁜 근성을 가지고 있다. 너무 쉽게 얻으면, 아낄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당연한 줄 안다.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누님, 그게…… 그래도 되나요?”
소육자는 마음이 동했다.
그도 장사치들에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현지 상인들은 그와 같은 외지인을 등쳐 먹는 걸 제일 좋아했다. 외지인들은 손해를 봐도 다시 찾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되고말고요! 내가 평소에 쓰는 물건도 전부 그들이 보내온 거예요. 오후에 견본을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하세요. 만약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가는 게 불편하다 싶으면, 돈을 조금만 더 얹어 주면 돼요. 그러면 그들의 가장 가까운 가게에서 직접 소육자의 집에까지 물건을 배달시킬 수 있어요. 그러면 집에 가는 길도 불편하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이 친절하게 의견을 냈다.
소육자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
“그런 것까지 돼요?”
월령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가능하죠.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다 대신해 줄 거예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데, 고작 이런 것쯤이야.’
소육자는 코를 훌쩍거렸다.
“돈이 있으니 정말 좋네요!”
‘가난이 죄라더니, 이 좋은 걸 나는 모르고 살았구나!’
소육자는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월령안은 수횡천과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배첩만 넘겨주고는 떠났다. 무림맹주인 수횡천에게 굳이 자신의 의견이 필요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가 할 일은 배첩을 수횡천에게 전해 주고, 그가 사전에 대비하게 해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만약 정말로 수횡천에게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돈이든, 힘이든 얼마든지 보탤 것이다.
집사에게는 육 대장군을 절대 홀대하지 말고, 미리 잘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노인이 머무는 뜰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