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황제의 역린
육장봉은 조계안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조계안을 전혀 건드릴 수 없었다.
조계안의 곁에 사사(死士)가 부지기수인 것은 둘째치고, 손꼽히는 고수인 육장봉조차도 그를 다치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야율제와 잠한성입니다.”
이반반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이를 갈았다.
잠한성은 전임 무림맹주로, 청희 장공주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비 섞인 겨울바람에 산에는 눈도 쌓이지 않네(寒聲帶雨山難白 – 잠한성의 이름은 겨울 바람을 뜻하는 ‘한성寒聲’에서 따옴), 그 잠한성?”
육장봉이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이반반을 바라보았다.
“그자를 제외하고 또 누가 우리 전하를 저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반반은 눈이 벌게져서 말했다.
“과연 청희 장공주와 관련이 있었군.”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걸음으로 난각으로 갔다.
‘청희 장공주도 이젠 끝이군.’
용에게는 역린이 있다. 이를 건드리는 자는 죽는다.
조계안이 바로 황제의 역린이었다.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청희 장공주가 야율제와 무슨 관계이든, 나라를 팔아먹었든 상관없었다. 그녀를 위해 평생 혼인하지 않았던 잠한성이 야율제와 협력하여 조계안을 다치게 했다. 이것만으로도 황제는 청희 장공주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잠한성과 야율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육장봉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육장봉이 난각에 들어서자마자, 짙은 피 냄새가 확 풍겼다. 고개를 들자, 피곤함에 찌든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황제를 불렀다.
“폐하.”
“장봉아, 드디어 왔구나.”
황제는 육장봉을 보고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안이는 어떻습니까?”
육장봉은 앞으로 다가가 내실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둘러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의가 치료하는 중이니 방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더니, 깊은 시름에 잠겨 말했다.
“어의가 상처를 처치하고 있다. 일단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고 하는구나.”
긴장했던 육장봉의 표정이 잠시 풀렸다. 그는 바로 물었다.
“폐하, 계안이가 어쩌다 야율제와 잠한성의 협공을 받은 겁니까?”
변경은 그들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북요 남원대왕의 손에 다치다니.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계안이 곁에…… 배신자가 생겼더구나.”
황제가 이를 갈며 말했다. 눈에는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폭풍우가 담겨 있었다.
황제는 줄곧 온화했다. 성격이 좋다 못해 제왕의 위엄이 없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온화했던 눈에는 짙은 살의가 가득 서려, 제왕의 위압감을 연신 내뿜었다.
난각 안의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육장봉조차도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폐하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황제가 만약 한 성격 하지 않았다면 대신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그에게 북요로 출정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대신들이 지지가 없는 상황에서 변방에서 삼 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르게 할 수는 없었다.
“장로(長老)들입니까? 그들이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겁니까?”
조계안의 곁에 사람을 심을 수 있는 것은 그 늙은이들뿐이었다.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겠느냐? 이 몇 년 동안 그놈들이 범씨 가문의 손을 빌려 월씨 가문의 재산을 쓰지 않았느냐. 돈이면 돈, 사람이면 사람 모두 갖춰서, 황제인 짐보다 더 편하게 지냈다. 그놈들이 어찌 손을 놓을 수가 있겠느냐?”
황제의 목소리에는 뼈를 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뱉어내는 말마다 짙은 살의가 배어 있었다.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물 듯, 그놈들이 월령안에게 손을 대지는 않겠습니까?”
조계안의 암황 자리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육장봉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형세가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미처 몰랐다.
“손을 대지 못할 거다. 범씨 가문은 요 십 년 동안 월씨 가문의 재산 절반을 팔아서 지금의 국면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으니까. 남은 재산 중에도 팔 수 있는 게 별반 없다. 그 늙은이들은 월령안이 그놈들을 위해 돈을 벌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어.”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황제도 조계안이 제멋대로 수작을 부려 육장봉이 월령안과 이혼하게 한 것을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황제는 월씨 가문 사람들이 장사를 잘하기는 하나, 단지 장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잘 듣고, 쓰기 편한 것을 제외하면 남들과 별다른 점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월씨 가문 사람들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재간이 있고, 황실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은 널려 있었다. 월씨 가문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게 뭐가 있는지, 그들을 새롭게 평가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범씨 가문이 청주의 재산을 장악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지난 십 년 동안 범씨 가문은 월씨 가문의 자산을 팔아서 가까스로 유지해왔다.
월씨 가문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리고 월령안은 그중에서도 보물단지였다.
월령안이라면 타협해 줄 만한 가치도, 어느 정도 양보해 줄 만한 가치도 있었다.
황제와 육장봉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의는 조계안의 상처를 처치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일단락 지은 순간, 때마침 어의가 약상자를 들고나왔다.
“폐하, 조왕 전하께서 깨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왕 전하께서는…….”
“계안이가 깨어났다고?”
어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황제는 빠른 걸음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바로 조계안의 곁에 앉아 이것저것 물었다.
“계안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느냐? 상처는 안 아프고? 시장하지는 않으냐? 이 황형이…….”
“황형, 저 안 죽었습니다.”
조계안은 낮은 평상에 기대앉아 있었다.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얬다. 두 눈은 빛을 잃었으며 입술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언짢아서 코웃음을 쳤지만, 무력하기만 했다.
“무슨 허튼소리냐!”
황제는 조계안이 귀찮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는 잔소리하지 않았다.
“알았다. 황형이 그만하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됐느냐?”
“쿨럭…….”
조계안은 내부 장기를 다쳤다. 말을 할 때마다 가슴 안이 아팠다. 그러니 말투도 고울 리 없었다.
“전 괜찮습니다. 황형 할 일이나 하러 가시지요. 하룻밤 내내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저는 잠한성이 아니라 황형에게 죽을 것 같습니다.”
“맞지 못해 근질근질한 모양이구나? 지금 짐이 널 때리지 못할 줄 아느냐?”
황제는 화가 나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위로 치솟았다. 아우가 무사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조계안이 휘청휘청 들어섰을 때,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됐습니다, 황형. 제가 장봉이하고 따로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만 볼일 보러 가세요.”
조계안은 귀찮다는 듯 황제를 떠밀었다. 그러나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황제도 화내지 않았다. 그저 몇 마디 더 당부하고 나갔다.
“장봉아, 잘 지켜봐라. 다시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해라.”
황제도 이제는 가야 했다. 내일 일찍 조회도 해야 했고, 또 영녕후부로 찾아가서 청희 장공주의 꼬투리를 잡아야 했다.
모든 제왕이 그러했듯, 그도 제왕 특유의 병을 앓고 있었다. 바로 툭하면 남에게 화풀이하는 병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청희 장공주가 알든 모르든, 영녕후부가 억울하든 안 억울하든 상관없었다.
‘내 아우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연관된 자들은 다 살 생각을 버려야지!’
황제가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조계안과 육장봉이 따로 할 얘기가 있음을 알고, 둘이 편히 이야기하도록 궁인을 모조리 데리고 나갔다.
“말해 봐. 잠한성이 어쩌다 네게 손을 쓰게 됐나?”
황제가 가자마자, 육장봉은 망설임 없이 조계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역시 네 눈은 못 속이겠군.”
조계안은 푹신한 베개에 기댔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날카롭게 웃었다. 눈에는 살의가 떠올라 있었다.
“잠한성이 천목신교를 알게 됐어.”
얼굴의 험상궂은 상처는 입꼬리를 움직임에 따라 더욱 험악하고 음침하게 변했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은 황제와 판박이였다. 다만 오랫동안 가면을 쓴 탓에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희었다. 표정에는 음울함이 많고 명랑함이 적었다.
눈도 황제와 똑같았다. 하지만 같은 눈이라도 황제의 눈은 밝고 생기가 돌아, 바르고 늠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반면 조계안의 눈은 검은자위가 흰자위보다 크고, 요사스러운 기운을 띠고 있었다. 보고 있으려면 소름이 끼쳤다.
“그놈이 너를 알아봤나?”
육장봉은 의외라고 여기지 않았다.
잠한성도 더는 열혈 청춘이 아니었다. 여인을 위해 싸움박질할 나이는 훨씬 지났다. 아직도 청희 장공주를 깊이 사랑한다고 해도, 조정 사람에게 쉽사리 손을 대지는 않을 터였다.
아마도 조계안을 강호인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놈이 나를 천목신교의 교주로 알더군. 천목신교 교주라면 사파 인물이잖아.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입을 열었으니, 강호의 협객으로서 당연히 나를 죽여야겠지.”
조계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죽을 뻔한 사람이 자기가 아닌 듯했다.
육장봉이 물었다.
“야율제에게 이용당했겠군?”
잠한성은 조계안의 신분을 모른다지만, 야율제는 모를 수가 없었다.
“맞아.”
조계안은 반쯤 눈을 감고 피곤한 듯 말했다.
“청희 장공주와 야율제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내 곁에 둔 놈들은 안심할 수 없어. 네가 잘 주시해 봐.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도대체 뭘 알아냈길래, 야율제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널 공격했지?”
육장봉이 물었다.
“안 가르쳐 줘.”
조계안이 눈을 번쩍 떴다. 눈망울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육장봉은 머리를 저었다.
조계안의 변덕은 이미 겪을 만큼 겪었다.
“알겠다. 안심하고 요양이나 해라. 야율제의 일은 내가 처리하겠다.”
육장봉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스스로 조사해 낼 수 있었다.
“천천히 알아봐. 나는 급할 게 없거든.”
육장봉이 몸을 뺄 새가 없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게 해야 했다. 특히 월령안의 눈앞에 나타날 시간도 없어야 했다.
나가려던 육장봉은 조계안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조계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일부러 다친 게 아닌지 의심스럽군.”
“감동했나?”
조계안이 눈을 치떴다. 웃는 듯 마는 듯이 하는 표정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육장봉도 그 진위를 알고 싶지 않았다. 진심 반, 거짓 반으로 을러멨다.
“폐하께서 더욱 감동하시겠군.”
“당장 꺼져!”
조계안은 육장봉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곧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참, 그거 알아? 월령안이 새로 온 호위병에게 신붓감을 골라줬다지?”
그가 바삐 보내는 틈을 타 육장봉 이놈이 월령안 곁에 사람을 붙여 놓았다.
‘네가 먼저 시작했으니까, 널 바쁘게 굴리더라도 원망할 생각은 마.’
“네 사람과 짝지어 주었나?”
육장봉은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월씨 가문의 소식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녁 무렵에 사람을 보냈는데, 조계안이 이처럼 빨리 소식을 들었다. 이는 분명 정탐꾼이 보고한 것이 아니었다.
“참 공교롭지 않나?”
조계안의 말투는 경쾌했다. 기분이 대단히 좋아 보였다.
육장봉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공교롭군.”
공교롭다 못해 때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 여자는 진짜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