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53)화 (153/1,004)

153화 뒤바뀐 생명의 은인

육비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전혀 찔리는 구석도 없는 듯 서둘러 변명했다.

“형님, 이 일은 함연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함연이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요. 이 때문에 함연이에게까지 화를 내면 안 됩니다. 걘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됐다. 알겠다.”

‘이 정도까지 멍청하면 구제 불능이로군.’

육장봉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더 하지 않고 물었다.

“말해 봐라. 왜 찾아왔느냐?”

“형님, 저기 저…….”

육비우는 육장봉의 말속에 깃든 거리감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알아채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눈에 간절함을 담고 육장봉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말하지 않을 거면 나가라.”

육장봉이 양손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위압감이 가득했다.

“말할게요. 지금 말할게요…….”

육비우는 깜짝 놀라 흠칫 떨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조차 없을까 싶어 술술 털어놓았다.

“형님, 어머니가 잘못을 뉘우치셨습니다. 이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어머니를 장원으로 보내기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육비우는 여기까지 말하자, 육장봉이 화를 낼까 두려웠다. 바로 손을 들고 맹세했다.

“형님, 맹세합니다. 어머니가 다시는 절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장원에서 절대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육비우,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 거냐!”

육장봉은 육비우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여전히 화가 나다 못해 실소가 나왔다.

자식 된 도리로 효도하는 것은 마땅했다. 하지만 이렇게 원칙도 없고, 남의 생사도 무시하는 효도는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육장봉이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큰 소리로 꾸짖자, 육비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순간, 육비우는 뒤로 물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셈 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과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이 떠올랐다. 또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형님, 제가…… 저도 잘못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어머니입니다! 저, 저는 어머니가 다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이 홀로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육비우, 넌…… 내가 왜 이 일을 해결하려고 나섰는지 아느냐?”

육비우 때문에 육장봉의 마지막 남은 인내심이 사라졌다.

육비우가 입을 열어 대답하기 전, 육장봉이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육씨라는 것, 네가 내게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한 것, 그리고 네 어머니가 육씨 가문의 사부인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아무 대가도 없이 너희의 뒤처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육비우, 네 머리로 똑바로 생각해 봐라. 너와 네 어머니가 그럴 낯짝이나 있느냐?”

“형님, 저도 어머니가 잘못한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님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훌륭하거나 뛰어나지 못하다고 한들, 그래도 형님에겐 넷째 숙모가 아닙니까. 도대체 어머니가 어쩌다 형님한테 밉보인 겁니까? 왜 이렇게 어머니만 못 잡아먹어 안달이세요? 꼭 어머니를 육씨 가문에서 쫓아내야 하나요?”

육비우는 눈시울까지 붉혔다. 어머니가 예전에 자신을 부둥켜안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또다시 억울함을 토로했다.

“형님, 둘째 숙모와 셋째 숙모는 존경하시잖아요. 그 숙모님들은 친정 오라버니들까지 챙겨 주시면서, 왜 우리 어머니한테만 이토록 각박하게 구시는 거냐고요?”

육비우는 말할수록 억울했다. 목소리도 더욱 높아졌다.

“제 어머니가 아무리 나빠도 분명 제 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아들인 정실이고, 육씨 가문의 사부인입니다. 우리 육씨 가문의 생명의 은인이라고요. 그때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우리 아버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육씨 가문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죠!”

육비우는 말하면서 억울함을 당한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허!”

육장봉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조소 섞인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뒤로 몸을 기대면서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육비우, 내가 언제부터 남들 앞에서만 네 어머니를 넷째 숙모라고 불렀는지 아느냐?”

육비우가 자기 어머니가 넷째 숙부를 구한 일을 들먹이니, 오늘은 반드시 사실대로 말할 셈이었다. 어떤 이들은 하도 거짓말을 해서 마지막에는 자신조차 진실로 믿으니 말이다.

“혀, 형님……. 무슨 말이에요?”

육비우는 이를 덜덜 떨었다. 불현듯 좋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네 그 멍청한 머리로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해 보거라. 네 어머니 같은 사람이 만인갱(萬人坑 – 수많은 시체를 묻은 구덩이)에서 내 넷째 숙부를 업고 나올 수 있었을까?

어째서 넷째 숙부가 몇 해 지나지 않아 변경을 떠나 멀리 변방으로 갔겠느냐? 줄곧 변방에 주둔하면서 왜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왜 너를 곁에 두고 직접 교육하지 않았지? 네 어머니가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가르치지도, 단속하지도 않고 왜 제멋대로 하게 놔두었을까?

신중하게 생각해 봐라. 넷째 숙부가 정말로 네 어머니를 위해서 그랬겠느냐?”

육장봉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이 되어 육비우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육비우는 몸을 휘청거렸다. 멍하니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형님, 지금 허튼소리 하는 거죠? 일부러 겁주는 거죠?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구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왜 어머니를 맞아들였겠어요? 아버지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어머니를 총애할 수 있었겠냐고요! 아버지는 떠나기 전에 저에게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셨어요.”

“총애한 건지, 상관하지 않은 건지. 너도 눈이 있으면 보였을 텐데?”

육장봉이 조소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아닐 거예요……. 다 거짓말일 거야. 형님이 저를 속이는 거예요. 형님은 어머니가 육씨 가문에 먹칠할까, 육씨 가문에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운 거잖아요. 제가 우리 어머니를 내보내게 해서, 어머니와 육씨 가문의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거잖아요. 형님은 일부러, 일부러 저를 속이는 거라고요.”

육비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더는 깊게 생각하기가 싫었다.

자신이 여태껏 사실로 알고 있던 금실 좋은 부모님,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멀리 전장에까지 갔었다는 이야기가 모두 가짜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변방에 있을 적 한 여인을 만났었다. 그 여인은 넷째 숙부의 영패를 가지고 있었지. 십팔 년 전 넷째 숙부가 전장에서 잃어버린 영패, 육씨 가문 며느리만이 가질 수 있는 영패 말이다.”

육장봉은 육비우가 그의 말을 믿기 시작한 것을 알아챘다. 육비우 다만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었다.

육비우는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 어머니와 똑같았다.

이 점은 그도 알고, 넷째 숙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넷째 숙부는 죽을 때까지도 그때의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넷째 숙부는 육장봉이 말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넷째 숙부는 임종 전, 할 수 있는 한 사부인과 육비우를 돌봐 달라고만 부탁했다. 이미 한 여인을 저버린 상황에서 또 다른 여인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육장봉은 넷째 숙부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여겼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넷째 숙부가 좋다니 덮어 두기로 했다.

“그럼 우리 어머니는요? 제 어머니는요? 우리…… 우리 어머니가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육비우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 손으로 책상 언저리를 붙들고, 벌게진 눈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넷째 숙부는 말씀해 주지 않았다. 나도 그분의 뜻을 존중해 그때 일을 더 조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네 어머니가 그때 생명의 은인이라는 명분만 가로채고, 다른 짓은 더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다.”

사실 그와 넷째 숙부 사이도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다.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육십이 때문이었다.

십 년 전, 그가 북요에 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육십이를 그에게 맡겼다. 그와는 이부형제(異父兄弟 –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니 돌봐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육십이의 몸에서 육씨 가문 사람에게만 있는 모반(母斑)을 발견했다.

육십이는 육씨 가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육십이의 나이로 미루어 보아, 육십이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는 십팔 년 전이었다.

십팔 년 전이라면 그의 아버지는 변경에 있었다. 그때 육씨 가문에서 변경 밖에 있던 사람은 넷째 숙부였다.

바로 그해, 넷째 숙부는 변방에서 임신한 여인을 데리고 왔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자기 자식을 임신했다고 했다.

그 여인이 바로 지금의 사부인이었다.

육비우는 큰 충격을 받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온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형님, 거짓말한 거죠? 형님이 저를 속이는 거 맞죠? 아버지께서 어머니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요. 제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하마터면 북요 군사의 칼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사기꾼일 수가 있어요? 그때 아버지를 구해 준 분은 우리 어머니입니다. 그렇죠?”

“사흘을 주마. 네 어머니에게 절연장을 들고 육씨 가문에서 나가라고 해라. 네가 개인적으로 어머니를 계속 먹여 살리고 싶다면, 거기까지는 간섭하지 않겠다.”

육장봉은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기를 싫어했다. 넷째 숙부가 그 여인을 사부인으로 삼더라도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고, 겁이 없어졌다. 그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분명 육씨 가문에 일말의 은혜도 베푼 적이 없었다. 남의 공로도 가로챘다. 그런데도 당연하다는 듯, 떳떳하다는 듯 은혜를 빌미로 육씨 가문을 협박하고 들볶았다. 온 육씨 가문이 그녀 때문에 희생하며 뒷수습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넷째 숙부를 봐서 너를 육씨 가문에서 내쫓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육씨 가문의 직계 자손들이 누릴 수 있는 자원을 누리지 못한다. 너의 군대에서의 직무도 지금부터 해제한다.”

육장봉은 육비우에게 아무 기회도 주지 않았다. 바로 군대에서 내쳐 버렸다.

이제 그와 소 승상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육비우가 기어코 소 승상의 사위가 되겠다면, 그의 군대에서 나가야만 했다.

외부와 내통하는 사람을 키울 수는 없었다. 설령 그의 친사촌 동생이라 해도 어림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