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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51)화 (151/1,004)

151화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하인은 소 승상에게 차를 따라 준 다음 한쪽으로 물러섰다.

소 승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럼 알 만한 사람을 부르거라.”

“소인이 지금 가서 부르겠습니다.”

하인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물러갔다.

그러고는 일각이 거의 다 되어가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 승상은 화가 나서 당장 찻잔을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차용증 건을 해결하기 위해 육장봉을 찾아왔음을 떠올리고, 억지로 참았다.

“여봐라!”

소 승상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더니,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승상.”

문밖에 서 있던 하인이 소 승상의 목소리를 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너희 장군은 언제면 시간이 난다더냐? 내 시간도 아주 귀하다.”

소 승상은 이를 갈며 말했다.

여태껏 누구도 감히 그를 이렇게 냉대하지는 못했다.

‘육장봉, 참 대단하구나!’

“승상,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이 지금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하인은 대답하고 물러갔다.

소 승상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하인이 돌아오지 않자,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육장봉이 일부러 자신을 냉대하고, 싫은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육장봉!”

소 승상은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욕을 했다.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들놈이 직접 쓴 차용증이 아직 육장봉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또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단, 분노는 참을 수 있었지만, 마신 찻물은 참기가 어려웠다.

화청에 앉아서 근 반 시진을 기다리느라, 차 석 잔을 연거푸 마셨다.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소피를 보러 가려는 순간,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소 승상은 불쾌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참아 보았지만, 참을수록 요의가 더욱 강해졌다. 하는 수 없이 하인을 불러 시중들게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 장군부의 하인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승상, 저희 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왔다고?”

소 승상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장군이 집에 없었는데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았느냐?”

‘육씨 가문 위아래가 합세해 나를 골탕 먹여?’

만약 육장봉이 저택에 있으면서 그를 일부러 기다리게 하고, 만나 주지 않았다면 이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육장봉이 군공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잘난 체하는 것을 보니, 역심을 품은 것 같다며 탄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육장봉이 저택에 없는데 그가 갑자기 들이닥친 거였다. 반 시진이 아니라 하루를 기다려도, 예고 없이 쳐들어온 쪽의 잘못이지 육장봉을 고발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승상, 저희 장군께서는 군사 방어를 책임지신 분입니다. 당연히 그분의 행적은 기밀 사항입니다.”

하인의 말투는 공손했고, 표정도 겸손했다. 그러나 말에는 은근히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이것들이…… 잘났구나! 내 기억해 두겠다.”

소 승상은 손가락을 부들거리며 하인을 삿대질했다. 문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소 승상은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거두었다. 한숨을 깊게 몇 번이고 내쉬어서야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소피는 일단 참아야 했다.

소 승상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자, 육장봉이 육일과 육이를 거느리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소 승상께서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육장봉은 소 승상에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는 상석에 앉았다. 소 승상이 화청에서 반 시진이나 그를 계속 기다린 데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육장봉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소 승상은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었다.

오기 전에 배첩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육장봉이 저택에 있으면서 고의로 기다리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소 승상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냈다. 말투는 상당히 과격했다.

“육 장군, 이 몸이 왜 왔는지 모르는가?”

그의 마음속 분노가 그렇게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육장봉은 소 승상을 흘끔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 승상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거짓 웃음도 유지하지 못 할 뻔했다. 그는 몰래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야 말했다.

“육 장군, 주모의 차용증은 내 손에 있네.”

“네.”

육장봉이 대답했다.

“우리 제대로 한번 얘기해 볼 수 없겠나?”

육장봉이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자, 소 승상은 더없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됐다. 이쪽에서 안달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뼈도 못 추리도록 당할 게 뻔했다.

“저는 무척 바쁩니다.”

육장봉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했다. 전혀 협조하려 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내 딸과 육씨 가문의 칠공자에게 혼사를 내려 주셨네. 우리 두 가문은 인척인 셈 아닌가. 육 대장군, 이 몸에게 그 정도의 체면도 못 봐주겠다는 건가?”

소 승상은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는 육비우를 욕했다. 그놈은 등신이 틀림없었다. 소씨 가문의 사위라는 자각이 조금도 없는 놈이었다.

한때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두 가문이 사돈이 되면, 육비우를 밀어 주자. 육씨 가문에서 육장봉의 위치를 대신하게 함과 동시에 황제 마음속에서 육장봉의 위치도 대체하게 할 셈이었다.

그런데 인제 보니 육비우는 구제 불능에다가 눈치도 전혀 없었다. 육씨 가문과 소씨 가문 사이에 알력이 생겼는데도, 나와서 중재할 기미가 없었다.

‘이런 등신 같은 놈!’

“소 승상께서는 댁의 따님과 육씨 가문에 혼약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기억하고 계셨군요.”

육장봉이 조소가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소씨 가문은 도저히 신임할 수가 없었다. 인척까지 함정에 빠트리는 집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삼 년 전에 육씨 가문에 시집온 이는 소함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육씨 가문을 돕기는커녕 곤경에 빠뜨리기나 했을 것이다.

그의 조모는 확실히 황제보다 훨씬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소 승상은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그의 말뜻을 곧 알아차렸다. 얼굴에는 난감함이 스쳐 지났다. 그러나 순간이었을 뿐, 곧 태평함을 회복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육 장군, 자네도 칠공자와 내 딸이 약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잖나. 칠공자가 아무 조치도 취하질 않으니, 여방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네. 제 여동생을 대신해 나서서 주모를 혼내 준 걸세. 다른 뜻은 없었네.”

“하!”

육장봉이 가볍게 비웃었다.

소 승상의 머리가 제법 빨리 돌아갔다. 이건 반박할 수조차 없는 정말 좋은 핑계였다.

“육 장군, 애들 일이 아닌가. 우리 그냥 애들끼리 해결하게 하는 건 어떤가? 우리 어른들은 참견하지 마세나. 집안끼리 얼굴을 붉히게 되면 서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소 승상은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육비우는 곧 소씨 가문의 사위가 된다. 육장봉이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을 위해 나선다 해도 적당히 해야 했다. 만약 소씨 가문과 척지게 된다면, 육비우가 육장봉을 원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형제간의 정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그래도 한 베개를 베고 자는 사람이 더 가까운 법이다. 베갯머리 송사는 형제도 원수로 만들 수 있으니까.

육비우와 소함연의 혼사는 황제가 직접 내려 준 것이었다. 육장봉이 아무리 소씨 가문과 사돈이 되기 싫다고 해도, 두 가문이 인척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육비우가 소함연을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육장봉이 황제에게 부탁해 성지를 거두어들인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애당초 육비우가 전 형수인 월령안에게 못되게 군 것도 소함연을 대신해서 화풀이해 준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남들은 몰라도 소 승상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육장봉더러 현실을 직시하라고 경고하는 중이었다.

이러다 나중에 소씨 가문과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이 한집안이 되면, 육장봉은 양쪽에서 원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다 사촌 사이도 틀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흥!”

육장봉은 소 승상의 뜻을 알아차렸다. 알아차렸기에 더욱 비웃음이 나왔다.

‘소 승상은 육비우가 만족하든지 말든지 내가 신경 쓸 거로 생각하나? 내가 육비우와의 얼마 되지도 않는 형제간의 우애에 신경 쓸 것 같나?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군.’

육장봉은 소 승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인이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명전(明前 - 청명절 전에 채집하여 만든 차) 용정차가 아니로군. 하인들이 웬일이지? 내가 매일 마시던 차도 착각을 할 수가 있나?’

육장봉은 찻잔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찻잔, 찻잔 뚜껑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찻물이 탁자 위를 흥건하게 적셨다.

“장군!”

육장봉의 등 뒤에 서 있던 육일과 육이가 깜짝 놀라 흠칫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소 승상도 깜짝 놀라 하마터면 실례할 뻔했다.

소 승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육장봉이 찻잔을 던지자, 요의가 더욱 강해졌다.

소 승상은 흠칫하고서 얼굴을 굳혔다.

“차를 바꿔 오너라.”

육장봉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장군.”

육이는 이 모습을 보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장군은 소 승상의 기를 꺾으려는 거였군. 누군가에게 불만스러워하시는 건 아니겠지.’

육이는 탁자 위를 깔끔하게 치운 다음, 찻잔을 들고 물러갔다.

소 승상도 육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육장봉이 갑자기 성질을 부리자, 그가 불쾌해 자신에게 눈치를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속으로는 육장봉을 얕잡아 보게 되었다.

‘육장봉도 고작 이 정도였군.’

소 승상도 말없이 육장봉만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소 승상이 기다리지 못할 게 없었다. 육장봉이 안팎으로 원망을 사지 않으려면, 한발 물러서야만 했다.

소 승상도, 육장봉도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육이가 직접 차를 들고 올 때까지 화청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장군, 차를 가져왔습니다.”

육장봉은 찻잔을 받았다. 이번에는 먼저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은 다음, 뚜껑을 닫아 한쪽에 놓아두었다.

육이는 얼굴빛이 변했다.

“장군, 차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다.”

명전차가 아니라 우전차(雨前茶 – 곡우 전에 채집하여 만든 차)였다. 맛이 조금 떨어질 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차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그의 입맛은 월령안 때문에 까다로워졌다. 우전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과연, 검소하다가 사치스러워지기는 쉽다. 하지만 사치스럽다가 검소해지려니 어려웠다.

‘월령안의 이 수법은…… 위험하군.’

“하!”

소 승상은 육장봉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거드름을 피운다고 여겨 마음속으로 더욱 득의양양했다.

‘애송이 주제에, 감히 나와 겨루겠다고?

내가 남하고 아귀다툼을 할 때, 네놈은 어디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었느냐.’

소 승상은 여유롭게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이 굴복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소 승상에게는 충분한 인내심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소피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거의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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