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49)화 (149/1,004)

149화 령안이는 너무 순해

주모가 길상 도박장에 십만 냥의 빚을 진 사실을 소 승상이 알았다면, 당장 돈을 들여 차용증부터 사들였을 것이다. 그다음 그 차용증으로 주모를 협박했을 것이다. 주모를 통해 육씨 가문 사부인, 육비우가 소씨 가문을 위해 일하게 했으리라.

사부인과 육비우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육장봉을 단 한 번만이라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면, 소 승상은 본전을 찾는 셈이었다.

하필이면 이 어리석은 아들놈은 자기 이름으로 차용증을 써서 주모의 차용증과 바꿨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 차용증을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쓰려고 했다.

육씨 가문의 넷째 집안은 변경에서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였다. 고작 그만한 일 하나 가지고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이 커지면 육씨 가문의 체면을 깎는 일이었다. 육장봉이 아무리 냉정하다고 해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육장봉, 이 대마왕을 불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저는 또 호부가 소씨 가문의 것인 줄 알았지요.”

육장봉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몸을 일으켰다.

“날이 저물기까지 이각이 남았습니다. 소 승상께서 현금을 마련하거든, 잊지 말고 장군부까지 가져다주십시오. 제가 인내심이 크지 않은 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육장봉은 옷자락을 툭툭 털고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육장봉!”

소 승상은 다급한 나머지 몸을 일으켜 육장봉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자마자 허리뼈의 상처에 무리가 갔다. 그는 아파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군마에게 걸어갔다.

소 승상은 통증으로 땀투성이가 되었지만, 가까스로 참고 그를 불렀다.

“육 대장군, 우리 말로 해결하세!”

“저는 승상과 할 말이 없습니다.”

육장봉은 말을 타고 떠나기 직전에 다시 한번 강조했다.

“시간이 지나면 더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육장봉은 채찍질하여 떠나갔다.

다그닥 다그닥…….

친위대원들도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뒤쫓아갔다.

순식간에 소씨 저택 대문 앞이 휑해졌다. 소 승상과 하인 몇 명만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 왠지 적막해 보였다.

맞은편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육 대장군과 소 승상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육 대장군이 소씨 저택 문 앞에서 일각 동안 한가하게 앉아 있다가, 소 승상과 몇 마디도 하지 않고 가 버리는 광경만을 똑똑히 보았다. 하나같이 호기심이 동했다.

“육 대장군은 뭐 하러 오신 걸까? 왜 들어가지도 않고 가 버렸대?”

“내가 아까 얼핏 차용증이라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무슨 차용증일까? 소 승상이 육 대장군에게 빚을 진 건가? 아니면 육 대장군이 소 승상에게 빚을 졌나?”

“혹시 전선에 있을 때, 급료를 주지 않은 건 아닐까? 이 년 전에 문인들이 조정에 돈이 없다며 노래를 불렀잖아?”

“대장군은 개선해서 돌아왔잖아. 대장군이 급료를 받으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없어?”

구경꾼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누구 하나 정확히 내막을 아는 사람이 없어 헛다리만 짚었다.

조정의 일품 대신과 관련된 일이었다. 보통 백성들로서는 함부로 허튼소리를 할 수 없었고, 많이 말하지도 못했다. 구경꾼들은 소씨 가문 하인들이 나와서 쫓아내기 전에 뿔뿔이 흩어졌다.

* * *

이 무렵, 변경성(汴京城) 안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 관심 있는 화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춘일연 도박판에 가 봤어? 오늘 또 새 판이 열렸다더라. 월씨 가문의 그분이 올해에는 어느 기예에서 속임수를 쓰는가를 맞추는 거래. 다른 대갓집 규수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도 없고, 그 아가씨들 소식도 알아낼 수 없잖아. 하지만 월씨 가문 그분의 소식은 쉽게 알아낼 수 있어. 너희도 한번 해 보면 어때? 그냥 동전 두어 푼이라도 걸어봐. 혹시라도 제대로 찍으면 큰돈을 벌게 될걸.”

“정말이야? 그런 판도 있어? 그거 재미있겠네. 전에 열었던 그 판은 알아보기도 귀찮더라. 위에 모두 무슨 낭자라고만 적혀 있고, 이름마저 제대로 적혀 있지 않으니 아무 소식도 알아낼 수가 없었잖아. 그러면 어떻게 돈을 걸라는 거야?”

“그러니까 월씨 가문의 그분이 좋은 거야. 그분 소식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가 있잖아. 손해를 보지 않을 거야.”

“그래, 그래. 맞아. 우리도 가 보자……. 화신 내기가 이제서야 좀 재미있어지네.”

옹기종기 모여 선 사람들은 요새 인기가 치솟는 도박판에 관해 떠드느라, 육 대장군이 소씨 저택을 찾아왔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판을 연 곳으로 달려갔다.

* * *

월령안은 장군부에서 떠난 다음 월씨 저택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가 장군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것은 오기가 생겨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모험을 할 수도 없었다.

월령안은 마부에게 미인방으로 가자고 했다. 미인방에 도착한 그녀는 장 상궁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 장 상궁은 은양당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미인방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당시 월령안은 장 상궁에게 인심을 사기 위해 미인방을 깔끔하고 정확하게 인수인계했다. 그 덕분에 장 상궁은 며칠 만에 곧 능숙하게 경영할 수 있었다.

장 상궁은 미인방을 순조롭게 경영했다. 입궁하여 태후에게 보고했을 때는 칭찬까지 받았다. 그녀는 내심 월령안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었다.

월령안이 장군왕 세자에게 미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장 상궁은 두말하지 않았다. 바로 월령안과 몸매가 비슷한 궁녀를 불렀다. 그리고 월령안이 입은 남자 옷과 바꿔 입게 하였다.

“너는 이 옷을 입고 내 영패를 가지고 입궁하거라. 황궁에 가서 옷을 벗어서 태워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내일 다시 돌아오너라.”

“소인,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어린 궁녀는 대답하고서 월령안과 함께 옷을 바꿔 입으러 갔다.

어린 궁녀는 월령안의 옷을, 월령안은 궁녀의 옷을 입었다.

“조심해야 한다. 남들한테 꼬리를 잡히지 말고. 알겠느냐?”

장 상궁은 다시 한번 자세히 훑어보았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다음 장 상궁은 궁녀 복장으로 갈아입은 월령안을 데리고 은양당으로 갔다.

“잘됐네. 마침 장씨 어르신이나 다른 분도 자네를 못 본 지 꽤 돼서 줄곧 보고 싶다고 노래를 했지. 자네가 가면 저녁에 밥 한 그릇이라도 더 드실지 몰라.”

* * *

“꼬마 령안이가 왔구나!”

“또 야위었네. 령안아, 혹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게 아니냐.”

은양당 노인들은 모두 월령안을 반겼다. 평소 말수가 많지 않은 몇몇 노인도 월령안을 붙잡고서 가만히 물어보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어째서 이리 오래도록 오지 않았어?”

은양당 노인들은 월령안의 신분을 몰랐다. 다만 가정환경이 유복하고, 매일 가게의 심부름꾼을 시켜 음식을 가져다준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가끔 그들을 찾아오더라도 말이 많지는 않았다. 매번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이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어 주었다.

지난 몇 년간 은양당의 노인들은 월령안이 늘 찾아와서 앉아 있다가 가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렇게 또다시 만나자, 다들 참지 못하고 두어 마디씩 더 물었다.

월령안은 늘 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는 어두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내비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인내심이 좋았다. 그리고 얼굴에는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노인들과 얘기할 때는 목소리마저 달콤했다.

“장(張)씨 할아버지, 요즘 집에서 바쁘다 보니 나오지 못했어요.”

“유(劉)씨 할머니, 저는 곧 이사할 거예요. 변경을 떠나서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제가 변경에 돌아오면 꼭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러 올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고향에 가는 거예요. 집에는 아무 일 없어요. 저를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거든요.”

“제가 얼마 전에 오라버니 한 분을 모셨어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싸움도 아주 잘해요.”

월령안은 은양당에서 노인들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저녁 식사도 했다.

저녁 식사는 장 상궁이 특별히 요구해서 매우 풍성하게 차려졌다. 다들 송별을 위한 자리임을 알고 있었다.

이 한 끼를 먹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하지만 밥상에서는 이별을 들먹이는 사람이 없었다. 노인들은 월령안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하는 한편 요즘 일상에 대해 푸념했다.

음식도 맛있고, 옷도 부드럽고, 며칠에 한 번씩 목욕을 도와줄 사람도 온다고 했다. 유일한 불만은 너무 한가하다는 것이었다.

“날마다 앉아만 있으니 성한 사람도 병이 날 거 같다. 령안아, 그 장 집사 말로는 네가 그렇게 영리하다며. 네가 방법을 좀 생각해 봐. 우리도 일 좀 하게. 우리는 돈을 벌자는 게 아니라, 소일거리를 좀 하고 싶은 것뿐이야. 아니면 일도 안 하고 날마다 먹기만 하잖니. 우리도 마음이 편치 않아.”

“맞다, 령안아. 너 머리가 좋잖니. 좀 방법을 내 봐. 이렇게 날마다 누워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랑 뭐가 다르냐?”

“이건 어려운 문제예요. 장씨 할아버지. 제가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꼭 방법을 찾아볼게요.”

월령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떻게 보아도 너그럽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그리하여 장씨 할아버지 등 몇몇은 월령안이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장 상궁을 한쪽으로 조용히 끌고 갔다. 밖에서 월령안을 많이 돌봐 달라며 부탁했다.

“령안이는 너무 순해. 성격이 저래서야 남에게 당하기만 할 거야.”

“령안이는 성격이 너무 좋아. 나이도 어리고 낯가죽이 얇아서 거절도 잘 못 하잖아. 이러면 안 좋아. 저 애가 힘들 거란 말이야. 자네가 밖에서 령안이를 많이 돌봐 주게나. 쟤가 거절을 잘 못 하거든, 자네가 옆에서 좀 거들어 줘.”

장 상궁은 노인들의 간절한 부탁에 말문이 막혔다.

‘순해? 낯가죽이 얇아? 성격이 좋아? 남한테 당해? 이게 월령안을 얘기하는 게 맞나? 어쩌다 이런 오해가 생겼지?’

하지만 고개를 돌려 월령안을 본 순간, 장 상궁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진(秦)씨 할머니 곁에 앉아, 진씨 할머니가 숨겨 두었던 다 말라 굳어진 떡을 기분 좋게 먹고 있었다.

그녀가 밖에서야 어떻든지 간에, 은양당의 이 노인들 앞에서만큼은 늘 사랑스럽고,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제과점 사건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등요 공주를 골탕 먹였는지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장 상궁도 월령안을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아가씨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월령안은 은양당에서 늘 지금처럼 사랑스러운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장 상궁은 은양당에서의 월령안이 진정한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월령안이 은양당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월령안은 은양당을 긴장을 풀 수 있는 곳으로 여기고 있었다.

밖에서 월령안은 월씨 가문 가주였고, 대장군의 부인이었다. 어깨에는 변방 수십만 병사들의 생사를 떠메고 있었다.

하지만 은양당에서는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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