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협상은 없습니다
월령안은 두 눈이 빨개졌다. 한쪽에 늘어뜨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육장봉은 그 모습을 보았지만, 마음에 두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월령안, 난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소. 들어갈 거요, 말 거요?”
‘월령안이라고?’
육이는 눈앞의 감청색 장포를 입고 비범한 기개와 우아함을 자랑하는 월령안을 다시 보았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잣집 도련님 아니면 귀족 자제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분이 월 낭자였다고?’
어디를 보아도 누구에게 상냥하고 친근하게 웃는 얼굴로 대하던 월 낭자 같지가 않았다. 어디로 보나 성격이 나쁜 도련님으로만 보였다.
이때의 월령안에게서는 평소의 부드럽고 친근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눈매는 차가웠다. 섬세한 조막만 한 얼굴에는 냉기만 흘러넘쳤다.
월령안은 읍을 하며 말했다.
“그럼 저한테 인내심을 낭비하지 마세요. 대장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월령안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가버렸다.
“명월산장!”
육장봉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요!”
월령안은 몸을 돌리더니 오른손의 상처도 무릅쓰고 돈주머니를 꺼냈다. 그 속에서 가장 위에 있는 은표 뭉치를 꺼내 땅바닥에 내던졌다.
“대장군 말씀이 맞아요. 주모의 일은 저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제가 뒤처리를 책임져야겠지요. 주모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거로 하죠. 이제 우리는 서로 빚진 게 없어요.”
육장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금 날 도발하는 건가?”
그는 그녀를 생각해서 장군부에 들어가 잠시 피신하라 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오기를 부리는 거지?’
“아니요. 단지 제 의사를 밝혔을 뿐이에요. 저는 대장군이 아니라서요. 도저히 전 남편의 집을 스스럼없이 드나들 수가 없군요.”
월령안은 화를 내지 않고 평온했다.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 차가운 말투에는 아무 기복이 없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육장봉을 보고 있었지만, 눈망울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울지도, 원망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육장봉의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독함과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지금 대단히 불쾌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육장봉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몇 초간 바라보았다. 육장봉이 무슨 짓을 하든지 말든지, 그녀는 몸을 돌려 마차에 올라타며 분부했다.
“집으로 가자.”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육장봉이 더 강요하는 건 무리였다.
“네, 아가씨.”
마부는 깜짝 놀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황급히 마차에 앉아 채찍질하며 말을 몰았다.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지만, 문밖의 시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육이는 육장봉을 흘끔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장군…….”
“남의 호의도 모르는군. 신경 쓸 필요 없다!”
육장봉의 얼굴은 먹처럼 어두워졌다. 옷소매를 휙 떨치더니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저 은표는 어찌합니까?”
육이는 그 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다시 기분이 언짢은 티를 내는 육 대장군을 힐끔 보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멀쩡히 있다가 왜 또 다투시는 거야? 장군도 참. 분명 월 낭자를 위해 한 일인데, 말을 좀 곱게 하실 순 없었던 걸까? 그리고 월 낭자도 그렇지. 그렇게 영리한 분이 왜 장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걸까? 우리 장군이 언제 이렇게까지 체면을 구긴 적이 있던가?’
“어휴!”
육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이 땅 위의 은표를 줍기 시작했다. 은표의 액수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땅 위에 널린 은표 뭉치 가운데 가장 큰 액수가 오천 냥이었다. 가장 작은 것도 일천 냥은 됐다.
‘이 두께로 봐서는 적어도 십여만 냥은 되겠군. 그렇게 망설임 없이 던지더니, 너무 호방한 거 아냐.’
“언젠가는 나도 이렇게 호기를 부릴 수 있었으면 참 좋겠구나.”
육이는 땅 위의 은표를 주워서 세어 보았다. 십만 냥이 넘는 걸 알고는 깜짝 놀라 도로 던질 뻔했다.
‘돈이 있으니 역시 제멋대로 할 수 있구먼. 월 낭자처럼 살아봤으면 좋겠다!’
육이가 감탄을 미처 끝내지도 못했을 때였다. 육장봉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주웠으니 네가 책임지고 월령안이 받게 해라. 그리고 명월산장도 마찬가지다.”
육장봉은 장군부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자신이 소씨 저택으로 가려던 참이었다는 게 생각나 도로 문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장군, 소인이…….”
육이는 은표를 손에 들고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곁을 성큼성큼 지나쳐 시위의 손에서 말고삐를 건네받았다. 바로 말 등에 뛰어오르더니, 육이를 비롯한 친위대원들이 따라오기도 전에 채찍질해서 달려갔다.
“다들 어서 말에 타. 장군을 쫓아가야 한다.”
육이는 육장봉이 말을 채찍질하여 떠나는 것을 보고, 다른 친위대 일원들과 함께 가볍게 뛰어 쫓아갔다.
* * *
육장봉은 친위대를 거느리고 소씨 저택으로 떠들썩하게 찾아갔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지도 않았다. 육이에게 의자를 하나 가져오라 해서 소씨 저택 밖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오만방자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소씨 저택 대문을 가리키며, 육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문을 두드려라. 소 승상에게 일각(一刻 – 약 15분) 내로 나와서 나를 만나라고 해.”
소여방이 감히 육씨 가문에 손을 댔다. 그러면 육장봉의 보복을 감당할 각오는 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밉보인 사람은 목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육이가 앞으로 나가서 소씨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소씨 저택 하인에게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장군이 일각 내에 소 승상을 만나지 못하면, 소 대공자가 도박장에서 거액의 돈을 빚졌다는 사실이 날이 저물기 전에 온 변경에 소문이 날 거다.”
육이는 엄포를 놓는 게 아니었다. 육 대장군이 친위대를 거느리고 소씨 저택에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왔다. 그가 소씨 저택 밖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이미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벌써 소씨 저택 맞은편 길에는 많은 사람이 서서 숙덕거리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육 대장군이 소씨 저택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궁금해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밖에 저 구경꾼만으로도 소 대공자가 도박장에서 빚을 졌다는 소문을 날이 저물기 전에 온 변경에 퍼트릴 수 있었다.
소씨 가문 하인은 육이의 말을 믿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헛소리…….”
“잘 봐라. 이게 무엇으로 보이냐?”
육이는 소여방이 직접 쓴 차용증을 꺼내 들었다.
소씨 가문의 문지기는 글을 아는 자였다. 위에 적힌 글을 본 그는 깜짝 놀라 흠칫 떨었다. 바로 쾅, 하고 대문을 닫더니, 안뜰로 냅다 뛰어갔다.
‘육 대장군 호위병의 말이 사실이었어. 우리 큰 도련님이 도박을 하다니!’
아슬아슬하게 일각이 지나기 전, 소 승상은 하인들이 들쳐 멘 연교(軟橋)를 타고 나왔다.
“육 대장군이 왕림하셨는데 이 몸이 마중이 늦었구먼.”
소 승상은 연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안색이 거무스름하다 못해 시커멨다.
그는 입술을 끌어당겨서 품위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입꼬리를 한참이나 실룩거려도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육이.”
육장봉도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바로 육이에게 눈짓을 했다.
“네, 대장군.”
육이는 포권을 해서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짝 나가 소 승상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바로 소여방이 직접 쓴 차용증을 꺼냈다.
“소 승상께서는 날이 저물기 전까지 십만 냥을 현금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 육씨 가문에서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육 장군, 위세가 점점 더 대단해지시는군.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차용증을 들고서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집으로 찾아오다니. 우리 소씨 가문을 너무 얕잡아보는 게 아닌가?”
소 승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육장봉을 쏘아보며 말했다.
육장봉이 일각이라는 시간을 준 이유가 있었다. 소 승상더러 소여방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소 승상이 약속 시각에 맞춰 나온 것을 보면,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아는 것과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소 승상은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육장봉 앞에서 두려움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았다.
“흥!”
육장봉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조소 어린 눈으로 소 승상을 바라보았다.
육이가 다시 한번 말했다.
“차용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소 승상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소 승상은 육장봉이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고, 호위병에게 자신을 상대하게 하자 얼굴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가까스로 노기를 참으며 말했다.
“육 장군, 우리 저택에 방문했으니 장군은 내 손님이오. 그런데 계속 밖에 앉아 있으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떤가?”
“그럴 것까지 있겠습니까.”
육장봉이 입을 열기는 했다. 그러나 소 승상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소 승상은 하마터면 욕을 퍼부을 뻔했다.
“육장봉,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빚을 갚으십시오.”
육장봉이 냉랭하게 말했다.
소 승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육 대장군은 주모의 차용증 때문에 왔는가?”
그는 육장봉이 조건을 내놓으면, 다시 흥정해서 자신이 주도권을 쥐려 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리했다. 전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저는 현금만 원합니다. 협상은 없습니다.”
육장봉은 철옹성같이 완고했다. 소승상에게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소 승상은 화가 나 얼굴이 일그러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이라 목소리를 낮추어 으르렁댔다.
“육장봉, 자네 너무 하는 거 아닌가.”
“허!”
육장봉은 조소 어린 눈길로 소 승상을 힐끗 보았다.
‘내가 너무하면? 소 승상이 날 어쩔 수 있나?’
이미 완전히 척을 진 사이였다. 소 승상의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주모의 차용증을 돌려주겠네. 그리고 자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 일도 더는 따지지 않겠네.”
소 승상이 이를 악물고 또다시 한발 물러섰다.
“고작 그 정도입니까.”
육장봉은 눈꺼풀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소 승상은 끝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도대체 어찌하라는 건가?”
“빚을 갚으십시오!”
육씨 가문 넷째 집안도 어쨌거나 육씨였다. 예전에는 방계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여방이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을 짓밟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간에 소여방이 감히 육씨 가문 사람에게 손을 댄 이상,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이치는 월령안도 안다. 소여방이 모를 리가 없었다.
소여방은 단지 출신이 좋고, 하늘이 무너져도 자기 아비가 뒷받침해 주리라는 것을 믿고 날뛰었을 뿐이었다. 그는 오늘 소여방에게 그의 아비가 무슨 일이든 다 감당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줄 참이었다.
“현금은 없네.”
육장봉은 전혀 협상할 기색이 없었다. 소 승상은 육장봉의 뜻에 따라야만 했다.
“소 승상께서는 수완이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호부의 관리가 아직 일하고 있을 겁니다.”
육장봉이 차갑게 조소를 보냈다.
“육 장군, 농담하지 말게. 호부는 조정의 호부일세.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소 승상은 얼굴에는 미소를 띠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어리석은 아들놈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이 좋은 패를 이놈이 이렇게 망쳐 버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