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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47)화 (147/1,004)

147화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을 거야

육장봉이 묻길래 대답을 해 주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가 만나는 사람까지 간섭하려 든단 말인가.

“그렇지.”

육장봉은 대답하더니, 품속에서 화절자(火折子 – 옛날 불을 붙일 때 쓰는 원통형 도구)를 꺼냈다. 입으로 불어 불씨를 살리더니, 손에 든 책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에는 월령안의 눈앞에서 책 조각을 흔들며, 악의에 가득 차 물었다.

“책을 건질 마음은 없소?”

월령안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아무리 멍청해도, 아무 때나 살 수 있는 책 때문에 불 속에 손을 집어넣을까.

‘다치면 누가 책임질 건데?’

육장봉이 손에 든 《산간집》이 불에 타 재가 된 것을 보았다. 월령안은 피식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책 한 권이었다. 육 대장군이 태우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태워도 됐다. 그녀가 보고 싶으면 유경장에게 한 권 더 부탁하면 그만이다. 아니면 직접 사서 보면 되었다.

‘어차피 유경장이 내게 써 준 말은 이미 다 봤거든. 남지는 않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라고?’

육장봉은 월령안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유경장이 선물한 책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이로 보건대, 유경장이 혼자 좋아하고 일방적으로 월령안을 지기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육장봉은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매우 흡족해하다가 곧 미간을 찌푸렸다.

‘월령안과 유경장이 친한 친구라는데, 왜 암위가 아무것도 조사해 내지 못했지? 암위가 변경에 돌아온 지가 언제인데. 이놈들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역시 군기가 빠졌군. 이제는 이놈들을 잡을 때도 됐어.”

육장봉은 손이 닿는 대로 천 한 조각을 뜯어내어 탁자 위의 잿더미를 쌌다. 차창을 열고 밖에 버려 버렸다.

월령안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육 대장군에게 방금 찢어낸 천 조각은 한 필에 몇백 냥씩 하는 소금(蘇錦)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돈주머니 속에 십만 냥 은표가 있던 것을 떠올렸다. 저 광경은 안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육 대장군이 저런 식이면 조만간에 집안 재산 다 말아먹겠군. 하긴, 저 사람은 집안 재산 말아먹어도 잘 살 거야. 내 알 바 아니지…….’

휙!

잿더미가 바람에 흩날리며 장군왕 세자 수하들의 얼굴을 뒤덮었다.

장군왕 세자의 수하들은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온통 까맣게 된 손을 보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 이건 마차에서 내던진 거잖아? 우리가 들켰나? 육 대장군이 경고한 건가? 이건 더 뒤쫓아 왔다가는 우리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이지?”

“마차가 장군부 방향으로 갔어. 그만 쫓아가세. 어서 세자께 보고하자고. 그렇지 않으면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거야.”

재를 얼굴에 뒤집어쓴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추측을 듣자 놀랐다. 더는 미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 * *

장군왕 세자는 길상 도박장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자, 서둘러 일어나 물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악가 그놈이 어느 집 자식인지는 알아냈느냐? 어디로 갔지?”

“세자, 그 악가 놈은 육 대장군과 함께 장군부로 돌아갔습니다. 장군부의 사람이 맞습니다.”

장군왕 세자 수하들은 미행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 몇은 끝까지 이렇게 잡아떼기로 미리 입을 모았다.

어차피 세자가 다시 가서 확인할 수도 없었다. 설령 확인한다고 해도, 그들 몇이 그날 장군부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장군부의 사람이라고?”

장군왕 세자는 아연하게 말했다.

“난 육 대장군 옆에 그렇게 미모가 뛰어난 소년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그놈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육장봉이 곁에 두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무장들이었다. 이번에 그가 변경에 오면서 데리고 온 이들도 모두 무장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유일한 문관 막료인 주우림(周佑霖)은 아직 변방에 남아 있었다.

주우림도 다년간 변방에서 지내다 보니 바람을 맞고 햇볕에 쬐었을 것이다. 아무리 준수한 얼굴이라 할지라도 그 소년처럼 백옥같이 흰 피부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 소년은 외모뿐만 아니라 기품 또한 빼어났다. 척 보기에도 평범한 가문의 자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뛰어난 소년이 변경에 나타났는데, 자신이 전혀 모를 수는 없었다.

수하들은 일제히 머리를 저었다.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네놈들은…….”

장군왕 세자는 잠깐 멈칫했다. 들었던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됐다. 조사할 필요 없다. 육 대장군은 건드릴 만한 상대가 아니야.”

육 대장군은 군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신임도 두텁게 받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어찌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는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사적으로 주모의 차용증을 소여방에게 넘겨준 것만으로도 이미 육 대장군의 노여움을 샀다. 그렇지 않았다면 육 대장군이 직접 길상 도박장까지 와서 그를 혼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장군왕 세자는 급기야 병든 닭처럼 머리를 축 늘어뜨리더니 무기력하게 말했다.

“부왕께서 이 일을 모르셔야 할 텐데. 아니면 매를 면치 못할 거다.”

* * *

이 무렵 장군왕 세자는 몰랐지만, 육장봉이 길상 도박장에서 떠나자마자 육이가 육 대장군의 배첩을 들고 장군왕부로 찾아갔다. 그리고 장군왕에게 세자와 소여방이 결탁하여 주모를 함정에 빠트린 사실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전해주었다.

육장봉은 뻔뻔하게도 전체 사건에서 월령안의 존재는 쏙 뺐다. 대신 모든 일을 소여방에게 뒤집어씌웠다.

모든 사실을 전한 뒤, 육이는 친절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전하, 저희 장군께서는 다른 뜻에서 이러시는 게 아닙니다. 다만 세자께서 아직 어리시다 보니, 남에게 이용당하고도 아무것도 모르실까 봐 알려 드리는 겁니다. 주모 사건만 해도, 저희 장군이시니까 공정하게 처리하시고 원한 관계를 확실히 하셨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 소씨 가문에만 죄를 묻지는 않을 겁니다.”

“못난 내 아들놈이 육 장군에게 폐를 끼쳤구먼. 육 장군에게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주게. 오늘 이 일은 내 꼭 육 장군의 성의를 생각해서 잘 처리하겠네.”

굳은 표정의 장군왕은 엄숙하게 그지없었다.

육이는 당당하게 예를 행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희도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육이는 작별을 고하고 나섰다. 아직 장군왕부를 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장군왕이 노발대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후레자식은 어디를 간 게야? 당장 그놈을 묶어 오너라! 오늘 내가 그놈의 다리를 분질러 놓지 않으면 성을 갈겠다……!”

“전하, 전하……. 고정하세요. 홍후는 아직 어린 애가 아닙니까. 육 장군의 수하도 얘기하지 않던가요. 우리 홍후가 소씨 가문에게 속은 거라고요. 전하, 일단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는 홍후를 때리시면 안 됩니다!”

장군왕부를 나서는 육이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잘못한 애한테는 매가 약이지.’

맞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면, 몇 번 더 매를 들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것이다.

장군왕 세자는 이번에 매타작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장군왕이 매를 들지 않으면, 그들이 직접 손을 쓰면 그만이었다.

* * *

육이는 장군왕부를 나서자마자 말을 타고 장군부로 재빨리 달려갔다. 빨리 움직인 덕분에 장군왕부에 한 번 들르기는 했어도, 육장봉, 월령안과 동시에 장군부에 도착했다.

말과 마차가 동시에 멈추어 섰다. 육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육장봉이 보지 못하더라도 포권을 하고 허리를 숙여 말했다.

“대장군, 일 처리를 끝냈습니다.”

“음, 말을 준비해라. 내가 소씨 저택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육장봉은 마차에서 내려 손에 든 차용증을 육이에게 넘겨주었다.

“네, 대장군.”

육이는 차용증을 받아 한 번 힐끗 보고는 조심스럽게 챙겨 넣었다.

육장봉은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자, 두어 걸음 만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안 내렸소?”

“대장군, 저는 내리지 않겠어요.”

월령안은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장군왕 세자의 부하들도 더는 미행하지 않을 겁니다.”

“내리시오.”

육장봉이 다시 한번 말했다.

“대장군, 저는…….”

육장봉은 무거운 어조로 언짢은 듯 말했다.

“내가 세 번 말하지 않게 하시오.”

“네, 대장군.”

월령안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를 손님으로서 초대하시는 건가요?”

“당신이 무슨 손님이란 말이오?”

이 장군부에는 월령안이 그보다 더 오래 살았다. 아마 그보다 더 익숙할 것이다. 이 저택의 하인도 모두 월령안이 들였다.

월령안이 들어가면 그보다 더 편안히 지낼지도 몰랐다.

“맞아요. 제가 무슨 손님씩이나 되겠어요.”

월령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눈에는 온통 씁쓸함뿐이었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읍을 하고 말했다.

“대장군, 다른 일이 없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육 대장군의 손님 노릇을 한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어디로 가려는 거요? 먼저 들어가시오.”

장군왕 세자는 그가 옆에 있는 줄 알면서도 사람들을 미행하게 했다. 월령안에게 흥미를 보이는 게 분명했다.

이변이 없다면,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의 신분을 조사할 게 뻔했다. 지금 잠시 장군부에 들어가 있는 게 월령안에게는 최선이었다.

월령안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장군부’라고 쓰인 현판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대장군, 이 장군부에 저는 들어가지도 못하거니와 들어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그녀도 체면이라는 게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장군부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내 평생 이 저택에는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을 거야…….’

월령안은 마차 옆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녀의 강경한 태도를 보아하니, 절대 협조도, 타협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양보는 더욱 어림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들어갈 수 없었다. 마음의 응어리를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지 않았다. 마음이 여전히 아팠다.

월령안은 왼손을 등 뒤로 감추고, 전력을 다해 꽉 움켜쥐었다. 그제야 평정심을 유지하며,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과거가 신경 쓰이는 것도, 마음이 아픈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남들에게, 특히 육장봉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육장봉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정말이오?”

‘여인의 마음은 갈대와 같구나. 아까까지는 분명히 장군부에 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는데.’

“정말이에요.”

월령안은 육장봉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녀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 장군부를 방문하는 손님처럼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삼 년 동안 살았던 저택과 눈앞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대문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군부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곳에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괴로워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저 한바탕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이곳은 그녀가 삼 년 동안 살았던 곳이었다. 그녀의 모든 희망, 기대, 꿈이 담긴 곳이었다.

하지만 꿈은 깨졌다.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희망도 결국 허망한 바람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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