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남자들은 위선적이기 그지 없다니까!
이는 월령안이 오매불망 바랐던 거리이자, 친근함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
“아, 내 손……!”
월령안은 가까스로 바로 앉더니, 오른팔을 움직여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부딪혀서 다친 거요?”
육장봉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손 좀 놓으세요.”
월령안의 왼손은 아직 육장봉이 꽉 쥐고 있었다. 온몸은 육장봉의 품에 반쯤 기대어져 있었다. 그녀는 벗어나려 애를 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소?”
육장봉은 아직 그녀의 손을 잡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녀의 손은 자신의 손과 전혀 달랐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섬세했다. 상등품 옥처럼 촉감이 매우 좋았다. 게다가 그의 손안에 쏙 들어왔다.
육장봉은 그녀의 손을 놓으면서도 살짝 미련이 남았다. 하지만 이 생각이 뇌리에 스치는 순간, 바로 무시했다.
‘내가 미련이 남을 게 뭐가 있나?’
월령안은 아픈 나머지 숨을 들이켰다. 눈이 빨갛게 되었다.
“마차가 흔들리는군요.”
육장봉은 손아귀 힘이 너무 셌다. 잠깐 잡힌 새 손이 벌겋게 되었다. 마치 등나무 줄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보였다.
육장봉은 그녀 손등 위의 붉은 흔적을 보자, 눈을 내리깔고 자기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힘을 조절하지 못했구나. 그렇게 세게 쥐었나?’
월령안은 그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다. 몸을 바로 하며, 육장봉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다친 팔을 조심스럽게 받쳐 안았다. 또 다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많이 심각한가?”
육장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
월령안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마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가씨, 대장군. 방금 어린애가 갑자기 길 한가운데에 뛰어들었습니다. 아이를 피하느라 그만 마차를 급히 세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냥 가세.”
월령안의 아파서 일그러진 조막만 한 얼굴을 바라보자, 육장봉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월령안의 마부는 못 쓰겠군.’
“네, 알겠습니다. 소인이 서두르겠습니다.”
마부는 육장봉이 나무라지 않자, 기쁘기 그지없었다. 육장봉이 보든 못 보든, 허리를 최대한 굽혀 감사했다. 온 얼굴은 감격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마차가 다시 움직이자마자, 육장봉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내일, 내가 사람 둘을 보내겠소.”
“네? 사람을 보낸다고요? 무슨 사람을요?”
월령안은 오른팔의 통증도 잊어버렸다. 온몸이 굳어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나한테 사람을 보내겠다고? 다들 매일 내가 뭐 하는지 감시하고 싶은 건가?’
“마부와 호위를 보내겠소.”
월령안이 기쁜 내색을 하지 않자, 육장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싫은 거요?”
“아니요……. 그럼,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혔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조계안은 하녀 두 명을 붙여 집에서도 그녀를 감시하려 했다. 또 육장봉은 마부와 호위병을 붙여 외출하는 동안 그녀를 감시하려 했다.
이 두 사람은 그녀를 감시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거절할 수가 없었으니까. 이렇게 그녀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사람을 보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역시 남자들은 위선적이기 그지없다니까!’
월령안은 육장봉이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 안은 적막에 잠겼다.
월령안은 자신의 팔을 조심스럽게 안고, 육장봉과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차에 기대 눈을 감고 휴식했다.
마차 안이다 보니 아무리 떨어져 앉아 봤자, 여전히 육장봉의 팔이 닿는 곳이었다.
육장봉은 얼핏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 마차 한구석에 새 책이 놓인 것을 보자,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책표지에는 《산간집(山間集)》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여인들은 역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 월령안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펼쳐 보니, 속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월씨 령안에게
내 지기가 평생 평안하고
큰 꿈을 잃지 않기를.
유경장」
이 몇 글자를 보는 순간, 육장봉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육장봉은 유경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변경에서 이름난 대 문장가였다. 기루 사인(詞人) 유경장. 사 년 전 아름다운 문장으로 변경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뒤로는 끊임없이 명작을 내놓아, 변경 관리나 귀족, 문인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의 사(詞 – 중국 고전 운문의 한 종류)는 함축적이고 화려했다. 글자마다 여인의 심리를 여실히 반영하여 변경 여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사와 똑같이 소문난 것은 그의 풍류 행각과 다정함이었다.
유경장은 기루의 단골손님이었다. 가는 곳마다 정을 남겼다. 일 년 중 대부분 시간은 기루에서 지냈다. 홍안지기(紅顔知己 – 남자가 마음을 터놓는 여자 친구)가 기루에 차고 넘쳤다.
그의 사는 발표되기 바쁘게 그를 연모하는 수많은 기루 여인들이 노래로 불렸다. 기루 여인들도 그의 사를 얻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유경장이 어느 기루 여인을 위해 사를 쓰면, 그 여인은 금세 몸값이 배로 뛰었다. 심지어 어느 화괴 낭자는 유경장 덕분에 스스로 기루에서 나와 더는 기예를 팔지 않았다.
육장봉은 문인들과 거의 접촉이 없었다. 하지만 유경장에 대한 소문은 적지 않게 들었다.
다만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유경장과 월령안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풍류가와 장군 부인이 어떻게 친분을 쌓을 수 있지?’
육장봉이 월령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월령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육장봉은 눈길을 거두고 손에 든 《산간집》을 훑기 시작했다.
육장봉처럼 시나 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유경장의 사는 참 잘 썼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에 관해 쓴 부분은 입에 착착 감기는 동시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짧디짧은 몇 마디가 공감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동질감마저 느끼게 했다.
“어쩐지…….”
그때 육장봉의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귀를 기울였다.
탁!
그는 갑자기 책을 덮더니, 큰 목소리로 명령했다.
“목적지를 바꾸어라. 장군부로 가자.”
“아가씨……!”
마차 밖의 마부는 육장봉의 말을 들었다. 당장 목적지를 바꾸지 않고, 속도를 늦추더니 문을 사이 두고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월령안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바로 앉아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미행당했소.”
육장봉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군왕 세자인가요?”
월령안이 떠보듯 물었다.
육장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그자일 것이오.”
“그자가 대장군을 미행한다고요?”
‘장군왕 세자가 간이 부었나?’
“아니, 그자가 미행하는 건 당신이오.”
만만한 데 말뚝 박는 법. 장군왕 세자 같은 사람은 누구를 건드릴 수 있고, 없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육장봉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아니었다.
“그자가 저를 알아보았나요?”
‘내 변장이 그렇게 쉽게 드러났다고?’
“아니오.”
정말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면, 미행할 필요가 없었다. 육장봉이 성 밖으로 나간 다음, 직접 월령안의 집으로 찾아가면 되었다.
월령안은 일개 장사꾼이었다. 장군왕 세자에게 감히 맞설 수 있겠는가.
월령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깐 생각을 하더니 마부에게 분부했다.
“대장군 말씀대로 장군부로 가거라.”
그녀는 육장봉의 장군부에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장군부를 제외하면, 장군왕 세자가 겁먹고 물러나게 할 만한 곳이 없었다.
“네, 아가씨.”
마부는 월령안의 명령을 받은 다음에야 다음 길목에서 길을 바꾸어 장군부로 갔다.
마차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차 안의 분위기는 아까처럼 차분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손에 든 책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당신, 유경장과 친분이 꽤 두터운 모양이군?”
“유경장요?”
월령안은 어떻게 미행을 따돌릴까 궁리 중이었다. 그런데 육장봉을 말을 듣자 어리둥절했다.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야, 무엇을 묻는지를 깨달았다.
월령안을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삼 년 전 둘 사이는 지금보다 더 가까웠다. 그녀가 육씨 가문에 시집간 뒤, 더는 유경장을 만나지 못했었다. 며칠 전 유경장이 집에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때도 만나지는 못했다.
계산해 보니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한 지도 삼 년이나 되었다.
“어떻게 그 사람을 알게 되었소? 안 지는 얼마나 되었소? 최근에도 서로 만나오?”
육장봉은 아주 빠른 말투로 잇달아 질문을 던졌다.
월령안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대장군, 지금 죄인 심문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빨리 대답하시오.”
육장봉이 대답을 강요했다.
월령안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대장군, 제가 법을 어겼나요? 아니면 유경장이 법을 어겼나요? 왜 저를 심문하는 거죠?”
‘육장봉, 이건 무슨 뜻이지?’
“밖에서 유경장의 명성이 어떤지 몰라서 그러오? 가까이 지내는 것도 모자라, 글을 주고받아? 이게 소문이라도 나면 당신 명성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 봤소?”
육장봉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월령안의 눈앞에 확 던졌다.
“월령안, 유경장은 재능으로나, 염문으로나 똑같이 이름을 날리고 있소. 그런 사람과 가까이해서 당신한테 아무런 좋은 점도 없을 거요.”
월령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와 가까이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명성을 더럽힐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신분은 서로를 가까이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이지적이었다. 스스로를 곤경에 빠트릴 만큼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하지 않았다. 유경장도 마찬가지였다.
육장봉이 물었다.
“그럼 이 책은? 뭐라고 설명할 거요?”
‘가깝지 않은 사이라면서, 그럼 유경장이 ‘나의 지기’라는 말을 쓸까?’
“그 사람이 제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제게 심심풀이나 하라고 가져다준 거예요. 그 위에 적힌 글을 말씀하시나 본데, 유경장도 제 협력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지기라고 적는다고 해서 뭐가 이상한가요?”
옛날, 그녀는 땡전 한 푼 없는 유경장을 도와주었다. 유경장도 이름을 날린 다음에는 그녀를 적지 않게 도왔다.
영영을 비롯한 몇몇은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몸을 팔지 않고 노래만 부르는 것으로 기루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유경장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도 유경장이 이름을 떨칠 수 있도록 적지 않은 돈과 힘을 들였었다.
유경장이 일찍이 시와 사가(詞歌)로 인기를 끌었던 것도 그녀의 덕이었다. 그녀가 돈을 들여 기루의 기녀들에게 노래로 불러 달라고 한 덕이었다.
유경장은 재능이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 또한 잘생겼다. 다만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월령안은 그에게 일단 기회가 생기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잘 나갈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녀는 유경장에게 기회를 주었다. 유경장 또한 그녀의 기대에 부응했다. 유경장에게 투자했던 돈은 몇 년 뒤에 배로 회수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유경장은 좋은 벗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문이 아주 많이 남는 장사이기도 했다.
“당신은 참 아무 돈이나 다 벌려고 하는군.”
육장봉은 콧방귀를 뀌었다. 탁자 위의 책을 다시 들더니 경고했다.
“유경장이 풍류스럽고 여기저기 정을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하오. 당신은 그자와 멀리하는 것이 좋소. 그리고 이 책은 내가 몰수할 거요.”
“대장군, 제가 누구와 만나는지는 제 사생활이에요.”
월령안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눈에는 온통 냉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