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제게 명월산장을 빌려주세요
장군왕 세자는 두어 걸음을 물러서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이 폐지 속에 엽자금이 끼워져 있었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폐지인 줄 알고 돈을 조금만 배상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니…….’
아까 큰소리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었다. 하마터면 속바지까지 싹 털릴 뻔했다.
“안 되나요?”
월령안이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당연히…….”
장군왕 세자는 일언반구도 없지만, 존재감이 아주 강한 육장봉을 힐끔 보았다. ‘안 된다’라는 말을 억지로 도로 삼켰다. 분해서 씩씩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되지!”
“그럼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제가 이 한 판에 얼마나 땄는지 계산해 주시겠어요? 도박장의 규칙대로 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랍니다. 받아야 할 만큼만 주세요. 한 푼도 더 받지 않을 거니까요.”
물론 한 푼이라도 적어서도 안 됐다.
“사람을 불러…… 엽자금의 무게를 달아 보라 하겠다.”
장군왕 세자는 이를 갈며 말했다.
‘고작 은표 몇 장 정도로 생각했는데 십만 냥이라니! 거기에 엽자금까지 더해지면……. 아무래도 물어낼 수가 없겠구나!’
“세자, 한마디만 할게요. 날이 저물기 전에 현금으로 받아야겠어요. 날이 저물기까지 아직 한 시진이 남았네요. 서두르세요.”
월령안은 자신이 남의 일을 대신 처리해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육장봉의 목적도 잊지 않았다.
“판돈을 은표로 냈으니, 도박장의 규칙대로 딴 돈은 은표로 주겠네.”
현금은 불가능했다. 오늘 해 질 녘이 아니라, 내일 해 질 녘 전이라고 해도 그 많은 현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럼 종이 사이에 끼어 있는 엽자금은 어떻게 계산하시려고요?”
월령안은 이럴 줄 알고, 집에 숨겨 두었던 엽자금을 가져왔다.
종이에 껴 넣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금을 얇게 불릴 수 있는 야금 기술은 아무나 가진 게 아니었다.
적어도 장군왕 세자가 이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솜씨를 지닌 장인을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장인을 찾았다 하더라도, 날이 저물기 전까지 엽자금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리라.
장군왕 세자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엽자금이 끼워진 종이를 한쪽에 던져 버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손에 소여방이 직접 쓴 차용증이 있네.”
‘소 형, 미안하게 됐소.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니라, 상대방이 너무 강했네.’
은표는 배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많은 엽자금은 정말로 낼 수 없었다.
‘친구를 살리자고 내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액수가 너무 컸다. 배상할 능력이 있더라도 배상하고 싶지가 않았다.
“세자, 진작 이러셨으면 얼마나 좋아요.”
월령안은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몸을 일으켜 주름진 옷을 툭툭 털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옜다!”
장군왕 세자는 집사를 통해 주모의 일 때문에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소여방이 쓴 차용증을 가지고 왔었다.
만에 하나라는 생각에 가져왔는데, 결국 그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십만 냥짜리 차용증이라! 소 대공자가 역시 대단하군. 동전 한 푼 쓰지 않고 주모의 다리를 분지른 데다가 책임마저 지지 않아도 된다니요.”
월령안은 손에 들어온 차용증을 보았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주모의 차용증을 얻느라, 소여방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길상 도박장에 친필로 차용증을 써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 인감까지 찍어 주었다.
육장봉이 주모의 차용증을 찾아오려는 것만 아니었다면, 월령안은 이걸 잘 써먹었을 것이다. 이 소여방의 친필 차용증 하나만으로도 선비로서의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해 줄 수 있었다. 수천 거리에 있던 소여방의 첩실을 데려올 필요조차 없었다.
‘참 좋은 기회인데, 아깝네!’
“차용증을 주었으니, 이번 판은 비긴 셈 아닌가?”
장군왕 세자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여방과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절친한 벗이라고는 못해도, 함께 어울리는 사이였다. 그런데 소여방의 차용증을 육 대장군에게 주었다. 결국 친구를 팔아먹은 꼴이었다.
‘이 일이 소문 나면 누가 나와 어울리려 들겠어?’
소여방이 길상 도박장에 차용증을 써 준 것도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소여방의 신임을 저버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장군왕 세자는 자기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이 손이 문제야. 할 일 없이 왜 저 악가 놈하고 도박을 했을까?’
육 대장군이 함께 깽판을 놓으러 올 정도이니, 분명 남다른 손재주가 있는 사람일 터였다.
“은표, 옥패와 꺼내지 않은 엽자금은 제가 가져갈게요.”
월령안은 탁자 위에 놓인 은표와 엽자금이 끼어 있는 종이는 돈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흩어진 엽자금과 은자는 장군왕 세자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건 저희가 길상 도박장의 오늘 손실을 배상하는 셈 치죠.”
“자네가 결정해도 되나?”
탁자 위의 은자와 엽자금은 합하면 적어도 몇만 냥은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돈을 쓰듯 남에게 주었다.
‘이놈은 담도 어지간히 큰 게 아니군. 감히 주인 대신 일을 결정하다니.’
“물론 됩니다. 그렇죠, 대장군?”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도박장의 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내 돈을 쓰는데, 내가 결정 못 할 게 뭐가 있어?’
“그렇게 하게.”
육 대장군은 차갑게 대답했다. 장군왕 세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럼 육 대장군, 고맙소.”
장군왕 세자는 거절하지 않고 과감하게 받았다.
도박장을 운영해 돈을 번다고 해도 여기는 변경이었다. 그들도 함부로 나댈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규칙에 착실히 따라 운영해서 푼돈이나 버는 정도였다. 큰 호구를 만나지 않는 이상, 한 달 수입은 일, 이만 냥 정도였다.
그런데 육 대장군은 한 번에 몇만 냥이나 물어 주었다. 과연 통이 컸다.
장군왕 세자는 마음속 불쾌감이 절반은 사라져 버렸다.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탁자 위의 돈을 챙기게 했다.
육장봉과 월령안이 떠나려고 하자, 장군왕 세자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장군, 두 분을 바래다 드리겠소.”
“필요 없소.”
육 대장군은 냉혹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떠가기 전에 잊지 않고 일깨워 주었다.
“내일 명월산장의 땅문서를 장군부에 보내시오.”
“대장군, 명월…….”
‘산장은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건데, 땅문서가 어디 있담? 아니지!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건데 내가 어찌 감히 선물한단 말이야!’
장군왕 세자는 육장봉에게 사정을 봐 달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길상 도박장을 나섰다.
길상 도박장을 나서자마자, 월령안은 밖을 지키고 있던 뒷골목 건달들을 보내 버렸다. 이들은 집사를 통해 절름발이 육에게 부탁해 불러온 사람들이었다.
도박장 사람들은 수단이 악랄할 뿐만 아니라 막돼먹은 놈들이었다. 이치대로 따져 본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보다 더 악랄하고 막돼먹은 인간들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일에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종일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는 시정잡배들이 안성맞춤이었다.
돈만 조금 쥐여 주면, 노름꾼들이 감히 도박장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 힘도 덜 들이고, 마음도 쓸 필요 없고, 인정도 빚질 필요가 없었다.
밖에 있던 뒷골목 건달들을 보내 버리고, 월령안과 육장봉은 차례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월령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돈주머니에서 은표와 종이 뭉치를 도로 꺼냈다. 그리고 은표를 세어 육장봉에게 건넸다.
“대장군, 이건 대장군의 은표예요.”
“필요 없소. 그건 당신이 딴 돈이오.”
육장봉은 은표를 받지 않고, 월령안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마차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또다시 대범하고 예의 바른 월씨 가문의 가주 월령안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사람의 경계심을 허물어버리는 적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장군, 농담하지 마세요. 대장군이 안 계셨으면, 저 혼자서는 동전 한 푼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월령안은 여전히 은표를 건네는 자세를 유지했다. 거두어들일 기미가 없었다.
돈 버는 것은 좋아했지만, 재물을 탐내지는 않았다. 특히 자기 것이 아닌 돈은 더더욱 탐하지 않았다.
다만 육장봉은 은표를 받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은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월령안도 화내지 않고 은표를 들고 말했다.
“대장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제게 명월산장을 빌려 주세요. 임대 기간은 십 년으로 하고, 이 은표 십만 냥은 제가 미리 드리는 임대료로 치세요.”
명월산장은 황실 별장이었다. 당연히 외부인에게 임대할 수 없었다. 장군왕 세자가 명월산장의 땅문서를 그녀에게 가져다준다고 해도, 그녀는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에게서 임대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는 사용권만을 차지한 게 된다. 평소 사용할 기회도 적은 곳이었다. 대외적으로 그녀에게 임대한 것이라고 말하면, 남들도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명월산장을 가지고 싶은 거요?”
“무슨 말씀을요. 제가 어찌 감히 명월산장을 욕심내겠어요. 몇 년 빌리고 싶을 뿐이에요.”
월령안 얼굴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그녀는 육장봉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범하게 그와 시선을 맞췄다.
“처음부터 명월산장을 노렸나?”
‘그래서 월령안이 나를 도와줄 생각이었나?’
“아니요.”
월령안은 단박에 머리를 저었다.
이럴 때는 그런 생각이 있었더라도, 반드시 없다고 해야 했다.
그녀가 점쟁이도 아니고, 주모의 차용증이 소여방의 손에 넘어갈 줄을 어떻게 예상이나 했을까. 더군다나 육장봉이 넷째 집안을 위해 나설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건 우연이었다. 그녀는 단지 기회를 틈타 이익을 좀 챙겼을 뿐이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육장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은표는 받지 않았다. 대신 차갑고 오만하게 말했다.
“명월산장은 당신이 딴 거요.”
‘내가 당신이 딴 물건에 눈독을 들일 정도로 좀생이는 아니니까.’
“제가 이길 수 있었던 건 모두 대장군께서 주신 원금 덕분이에요. 그래도 원금은 장군께 돌려드려야죠.”
월령안은 은표를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돈을 마다하는 사람은 처음으로 보았다.
“차용증.”
육장봉은 손을 내밀며, 돈이 아닌 차용증을 요구했다.
‘내가 남에게 준 물건은 도로 받을 수는 없지. 당신이 자기 재간으로 이긴 돈이니 당연히 당신 거야.’
“알겠어요.”
월령안은 어쩔 수 없이 은표를 챙겼다. 대신 차용증을 육장봉에게 건넸다.
육장봉의 손은 크고 검었다. 손가락이 길고, 손가락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
노인들이 얘기하는 돈이 밖으로 샌다는 손이었다.
월령안은 그 손을 잠깐 보았지만, 곧 눈길을 거두었다. 그리고 차용증을 육장봉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동작은 가벼우면서도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육장봉과 어떠한 신체적인 접촉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용증을 놓아두고 손을 거두어들이는 순간이었다.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그녀가 대비할 틈도 없이, 관성으로 앞쪽으로 몸이 쏠렸다.
“꺅……!”
월령안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조심하시오!”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을 자기 쪽으로 와락 잡아당겼다.
쿵!
월령안은 육장봉이 와락 잡아당기는 바람에, 온몸이 또다시 튕겼다. 그의 품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의 손은 육장봉의 커다란 손에 꽉 잡혀 있었다.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가까이 닿았다. 가볍게 숨만 쉬어도 코끝에 온통 상대방의 숨결이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