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44)화 (144/1,004)

144화 날 벗겨 먹을 작정인가

“제 차례네요.”

월령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사위를 통 안에 넣고 일어섰다.

순간, 월령안의 기세가 돌변했다. 엄숙한 얼굴에, 번뜩이는 시선까지. 특히 주사위 통을 흔드는 동작이 예전처럼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기운이 넘쳤고, 공격성이 다분했다.

장군왕 세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놈이 이제까지 이런 실력을 숨겼단 말인가? 내가 진다고? 그럴 리 없어!’

주사위는 여섯 개이고, 각자 낼 수 있는 가장 적은 점수는 일 점이다. 그는 바로 일 점씩을 냈다. 이놈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 점씩을 낼 수 있을 뿐이다.

‘날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장군왕 세자는 다시 침착해졌다.

그러다 엉겁결에 육장봉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다급히 우호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미소를 다 짓기도 전에 육장봉은 얼굴을 돌려 버렸다.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음…….’

장군왕 세자의 얼굴에 걸린 미소도 얼굴에 어색하게 걸린 채 굳어 버렸다.

‘육 대장군인지 뭔지, 정말 너무 얄밉네!’

장군왕 세자는 억울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누구도 그를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고개를 들어 월령안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탁!

월령안은 흔들기를 끝내고 손에 든 주사위 통을 탁자 위에 엎어 놓았다. 힘을 많이 쓰지 않았는데도, 장군왕 세자는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세자, 열어 보세요!”

“일 점! 제일 작은 점수겠지!”

장군왕 세자는 아까 육 대장군에게 외면당해 민망해졌던 일이 떠올랐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주사위 통을 열었다.

여전히 주사위 여섯 개가 쌓여 있었다. 맨 위에 드러난 점수는 일점뿐이었다.

“자네 차례일세.”

걱정이 사라진 장군왕 세자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도 귀찮았다.

월령안은 입을 다물고 생긋 웃었다. 주사위 통을 열었다.

“세자, 제가 이겼네요.”

“허, 이게……!”

장군왕 세자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삽시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이게,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이냐?”

“제 주사위에는 점이 없습니다. 이게 가장 작은 수이겠지요.”

월령안의 주사위는 아까와 똑같이 포개져 있었다. 하지만 맨 위의 주사위가

다섯 번째 주사위 위에 찍힌 점수를 가리고 있었다. 게다가 맨 위에 올라간 주사위는 모서리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서리에는 점 하나 찍혀 있지 않았다.

“이게…… 이럴 리가 없어! 네놈이 지금 사기를 치는구나!”

장군왕 세자는 벌떡 일어났다. 두 손으로 탁자 가장자리를 짚고, 거의 엎드리다시피 했다. 그 자세로 월령안 앞에 놓인 주사위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도박장의 탁자는 크고 무거웠다. 이러한 큰 동작에도 탁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맨 위에 올라가 있는 주사위도 안정적으로 서 있었다.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죠? 제가 만들어 냈잖아요.”

월령안은 다시 자리에 앉아 장군왕 세자를 마주 보았다. 이제는 감추지 않고, 뻐근한 통증을 호소하는 오른팔을 가볍게 눌러 주었다.

그녀의 오른팔은 원래 다친 상태였다. 조금 전 과하게 팔을 움직인 탓에 통증이 심해졌다.

“악가 놈, 사기를 쳤구나!”

장군왕 세자는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그러자 예상한 대로 맨 위에 놓였던 주사위가 굴러 떨어졌다. 주사위는 탁자 위에서 여러 바퀴 돈 뒤, 장군왕 세자 앞에서 멈췄다.

월령안은 언짢은 티를 내며 장군왕 세자를 흘겨보았다.

“세자, 주사위도 주사위 통도 모두 그쪽에서 제공한 겁니다. 세자께서 미리 살펴보시기도 하셨잖아요. 제가 패배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하라고 했었죠. 승부가 갈리고 나서 이렇게 딴소리하시다니요. 너무 격 떨어지지 않나요?”

그녀는 사전에 확실히 이야기하고, 분명히 물어보았다.

“다시 한번 해 봐!”

장군왕 세자는 그의 앞에까지 굴러온 주사위를 주워 월령안에게 건네주었다.

“자네가 다시 주사위를 세운다면, 내 패배를 인정하지.”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월령안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지었다.

“지면 진 거고, 이기면 이긴 거예요. 세자, 단순히 운 때문에 제가 이겼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운 때문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로서는 이 악가 놈이 진짜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절 어쩌실 건데요? 노름판에서는 운도 실력의 일부예요. 제가 운이 좋아서 이겨도 이긴 거예요. 억지 부리지 마세요.”

월령안은 전혀 봐주지 않고 반격했다.

‘장군왕 세자는 지고 나니까 바보가 된 건가? 단순히 운으로 그 점수를 만들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런 운이 어디 있다고?’

“이놈이……! 난 승복 못 해! 난 인정 못 한다.”

장군왕 세자는 굳은 얼굴로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그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표정이었다.

“승복을 못 해요? 인정을 못 한다고요?”

월령안도 짜증이 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세자, 그럼 이 도박장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군왕 세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진 건 그들의 기술이 부족한 탓이다. 그놈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그럼 세자께서 진 것도 기술이 부족한 탓이네요. 무슨 자격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거죠?”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의 말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세자의 아버님이 장군왕이니까요?”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가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옆에 있는 육장봉을 가리키며 비꼬았다.

“세자, 제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셨어요? 뒷배로 치면, 우리는 비슷비슷해요. 서로 꿀릴 게 없죠. 하지만 기술로 치면, 세자는 저보다 못하지요. 그런데 세자께서는 무슨 자격으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나요? 또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한 번 더 해 보라고 하세요? 시키면, 제가 무조건 한 번 더 해야 하나요?”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아까도 제가 이겼더니 저에게 사기를 쳤다고 돈을 안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몇십만 냥이 걸린 일이지만, 세자께서 없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니까 아무것도 모르시겠거니 생각해서 저도 더 따지지 않았어요.

지금은 제가 바로 세자 앞에서 이겼는데, 또 그럴 리가 없다는 둥, 인정하지 못한다는 둥 이런 소리만 해대시는군요. 세자,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어쩌실 셈이죠? 오늘 어디 끝까지 해 봅시다.”

“너…… 다시 한번 해 봐!”

장군왕 세자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체면을 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나 육장봉을 슬그머니 훑어보니 또 겁이 났다.

만약 정말로 싸우게 된다면, 도박장의 사람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육 대장군을 못 이길 것이다.

“누가 한 번 더 할 줄 알아요? 제가 세자의 아버지에요, 아니면 세자의 스승인가요? 저는 세자를 돌봐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해 보라고 했죠? 좋아요, 못 할 것도 없죠! 대신 제가 마음이 동할 만한 것을 거시죠. 아니면, 어림도 없으니까.”

월령안은 뻐근한 오른팔을 움직여 보았다. 아파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상처가 덧나니 너무 아팠다.

“뭘 겨룰 텐가?”

장군왕 세자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이 악가 놈이 육 대장군이 평생 뒷배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번 일만 끝나면, 육 대장군도 더는 악가 놈을 쓰지 않겠지. 그때 가서 이 녀석이 얼마나 날뛰는지 두고 보자고!’

탕!

옆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말 한마디 없던 육장봉이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장군왕 세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까 저 친구의 팔을 걸라지 않았소? 이번에는 세자의 목숨을 거시오. 어떻소?”

“대, 대…….”

장군왕 세자의 다리가 풀렸다. 하마터면 탁자에 엎어질 뻔했다.

“한 판 더 할 겁니까?”

낮고 느릿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확 높아졌다.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듯한 그 목소리에, 춥지 않은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대장군, 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저는…….”

월령안 앞에서는 기세등등하던 장군왕 세자가, 육 대장군 앞에서는 갑자기 순해졌다. 말을 할 때조차 벌벌 떨고 있었다.

“졌으면, 인정해야지. 여기 사람들은 세자의 아버지가 아니니까, 응석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을 거요. 알겠소?”

육장봉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냉혹했다.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온몸에서 풍기는 기세에 억눌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알, 알겠습니다.”

장군왕 세자는 지나치게 겁을 먹은 나머지 멍해졌다. 육장봉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가서…… 내가 건 본전을 점검해 보고, 도박장 규칙에 따라 돈을 내놓으시오. 동전 한 푼도 모자라서는 안 되오. 명월산장의 땅문서도 내일 장군부로 보내시오.”

육 대장군은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만 내렸다.

장군왕 세자도 육 대장군에게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서 점검하겠소!”

육장봉의 살기등등한 시선에, 장군왕 세자는 감히 하인을 부를 생각도 못 했다. 탁자를 부여잡으며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판돈 구역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월령안이 대충 던져 놓은 은표 뭉치를 풀고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표 뭉치를 펼쳐 든 순간, 장군왕 세자는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이 두 사람이 날 벗겨 먹을 작정인가!’

장군왕 세자는 뭉치로 된 은표를 펼쳤다. 그 가운데 끼워진 종이를 뽑아냈다. 화가 난 나머지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그는 육 대장군에게는 감히 화를 못 냈다. 손에 든 빈 종이를 월령안의 앞에 냅다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두꺼운 은표 뭉치는 겉으로 보이는 은표 말고, 다른 것은 모조리 폐지였다. 얼핏 보면 은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펼치는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육 대장군이라는 흉신(凶神)이 버티고 있었다. 이 한 뭉치에 은표가 몇 장 안 들어 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바로 돈을 배상하고 일을 끝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저 악가 놈과 쓸데없이 말을 섞을 필요도 없었다. 도박장의 소패왕이라는 체면도 홀딱 말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가 어떻게 놀렸다고요?”

월령안은 다리를 꼬았다. 왼손을 의자 손잡이에 얹고 아래턱을 괴었다.

“길상 도박장에서는 판돈은 은표만 되고, 금은 안 되는 건가요?”

“금이라고?”

장군왕 세자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녀 눈앞의 폐지를 가리키며 벌컥 호통을 쳤다.

“이게 금이라고? 눈이 삐었느냐?”

“세자께서 정말 눈이 삐었나 보네요”

월령안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앞의 종이를 주워들더니 손바닥에 두어 번 비볐다. 종이에 보풀이 일자,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사락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종잇장 사이에 껴 있던 엽자금(葉子金 - 얇게 불려서 잎 모양으로 만든 금)이 굴러떨어졌다. 금빛이 반짝반짝하는 조각이 적어도 열 개는 되어 보였다.

“세자, 제가 판돈으로 건 이 종이 뭉치에서 은표 십만 냥을 제외하고, 나머지 종잇장마다 모두 엽자금을 끼워 넣었습니다. 믿지 못하시겠으면 찢어 보셔도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