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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40)화 (140/1,004)

140화 내가 널 먹여 살릴 거니까

“뭘 이리 꾸물거리나? 어서 시작하자고.”

월령안은 신난 얼굴로 육장봉을 돌아보더니 끌어당겼다.

“어서, 어서 돈을 꺼내. 내가 다 쓸어버릴 거니까.”

월령안은 육장봉보다 머리 하나 작았다. 의자에 앉아 있으니 더욱 키가 작아 보였다. 원래는 육장봉의 팔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정작 만져진 것은 그의 복부였다.

옷을 사이에 두고도 복부의 열기와 단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월령안은 다급히 손을 거두었다. 어색함을 감추려고 일부러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냐? 얼른 돈을 꺼내라.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겠느냐?”

월령안이 그를 만진 순간, 육장봉은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줄곧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체 접촉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보통 때였으면 실수로라도 누군가와 닿은 것이 기분 나빠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월령안이 한 번 더 만져줬으면 하는 충동까지 생겼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눈을 동그랗게 떠서 ‘무섭게’ 겁을 주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의 눈 안에 몰려들던 폭풍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네, 도련님.”

육장봉은 잠시 멍해졌던 정신을 차렸다. 돈을 담은 자루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그는 사람 절반만 한 큰 자루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전혀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한 손으로 훌쩍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손목을 살짝 움직이니 자루에서 은전이 쫘르륵 흘러나왔다.

육장봉이 앞으로 나가서 돈을 쏟는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월령안의 등과 육장봉의 뜨거운 가슴팍이 가까이 붙어 있었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월령안의 몸에서 은은한 향을 맡은 육장봉도 돈을 쏟는 동작이 느려졌다. 그녀와 이렇게 가깝게 있는 건 처음 같았다.

월령안은 아주 아담했다. 그가 뒤에서 두 팔을 벌리면 그녀를 품에 쏙 안을 수도 있었다.

체취도 싫지 않았다.

귀 끝을 파르르 떠는 모습도 아주 귀여웠다.

육장봉은 시선을 내리깔고 월령안의 평온한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역시 암위를 다시 훈련해야겠어!’

좌르르…….

육장봉의 움직임에 따라 월령안이 대충 자루에 쑤셔 넣었던 은자가 전부 그녀의 앞에 쌓였다. 마치 은으로 만든 작은 산 같았다.

“한 덩이에 오십 냥인데, 이게 다 얼마래? 이렇게 무더기로 있으면 적어도 몇천 냥은 되겠지?”

“이렇게 많은 은자라니! 살면서 이렇게 많은 돈을 보는 건 처음이야.”

“아쉽네그려. 꼬마 도련님이 도박장 물주 말고 우리와 노름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판을 둘러싸고 있던 노름꾼들은 육장봉이 쏟은 돈을 본 순간, 굶주린 늑대처럼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켰다.

육장봉은 그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돈을 다 쏟자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 등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느낌도 사라졌다. 월령안의 굳어진 몸도 점차 느슨해졌다.

월령안은 몰래 심호흡을 두 번 했다. 눈을 감아 시선 속의 씁쓸함을 지웠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아직도 육장봉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육장봉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해졌다.

‘난 역시 못났구나.’

도박장의 집사와 물주가 월령안 앞에 수북하게 쌓인 은자들을 보았다. 매우 흡족하다는 듯이 말했다.

“도련님, 첫판에는 얼마를 거실 겁니까?”

월령안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육장봉을 애써 무시했다. 은자 하나를 걸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일단 오십 냥 걸지.”

그녀는 노름을 되도록 피해왔지만, 아주 좋아했다. 돈을 따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흥미를 잃었다.

‘집에 가고 싶어!’

자신을 방안에 가두어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예, 도련님, 그럼 시작하지요.”

물주는 오십 냥이 적다고 언짢아하지 않았다. 당장 주사위를 흔들었다.

쫘르륵…….

주사위 통 안에서 주사위가 서로 부딪혔다. 맑은소리가 다양한 박자를 만들었다. 매우 듣기 좋은 소리였다.

잠시 후, 물주는 손을 멈췄다. 통을 뒤집어서 탁자에 엎어 놓았다.

“도련님 차례입니다.”

“그래.”

월령안의 오른손은 아직도 통증이 심했다. 어설프게 주사위를 통에 넣고 두어 번 힘껏 흔들었다. 주사위와 통이 부딪히며, 전혀 규칙적이지 않은 소리가 났다.

월령안은 예쁜 얼굴을 구기며 주사위를 힘겹게 흔들었다.

도박장의 사람들 눈에는 월령안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냥 팔이 아플 뿐이었다.

달그락…….

월령안도 한참 흔든 뒤, 통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동작이 지나치게 어설픈 탓에 하마터면 안에 든 주사위가 튕겨 나갈 뻔했다.

“하하하…….”

월령안의 이 행동은 구경꾼들의 비웃음을 자아냈다.

그녀는 이를 보고 몰래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곧 월령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은 눈물로 글썽거렸다. 아주 분한 것처럼 보였다.

도박장의 집사와 물주가 이 광경을 보았다. 월령안이 화가 나서 노름을 그만둘까 봐 웃고 있는 구경꾼들에게 서둘러 호통을 쳤다.

“당장 입 다물지 못해! 웃기는 뭘 웃어! 도련님께서는 처음 주사위 놀이를 하시잖나. 서툰 게 당연하지. 많이 해 보시면 금방 익숙해지실 거 아닌가. 댁들은 하나같이 도련님보다 못하면서 비웃긴 뭘 비웃어.”

“맞아, 여러 번 해 보면 늘 거야!”

월령안은 격려를 받은 듯 작은 머리를 쳐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뒤에 선 채, 의기양양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순간,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지금 월령안의 모습은 예전에 그의 어머니가 키우던 고양이 같았다.

거만하고, 영리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아껴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예상대로, 월령안 첫판에서 지고 말았다.

돈을 잃은 월령안은 일부러 얼굴을 굳히고 뾰로통하게 말했다.

“내가 주사위 놀이에 서툴러서 진 거야. 익숙해지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

“도련님 말씀이 맞아요. 두어 번 더 해 보세요. 반드시 이길 거예요.”

도박장의 집사와 물주는 월령안을 재신(財神) 모시듯 기꺼이 달랬다.

하지만 그들은 손을 쓸 때 전혀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잇달아 열 번을 하는 동안 월령안은 계속 돈을 잃기만 했다. 그러자 그녀는 갈수록 돈을 많이 걸었다.

열 판이 끝나자, 월령안 앞에 있던 작은 은 무더기는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왜 계속 지는 거지? 난 이제 익숙해졌단 말이야. 질 수가 없는데…….”

월령안은 계속해서 통을 흔들어 보았다. 동작이 그전과 다르지 않았다.

도박장의 집사와 물주는 몰래 눈빛을 주고받았다.

집사는 물주의 뜻을 알아채고 월령안 곁에 붙어 섰다.

“도련님, 이제는 익숙해지셨으니, 이번 판에는 분명 이기실 것 같아요. 크게 한 번 걸어 보시겠습니까?”

“정말이냐?”

마침 돈을 걸려던 월령안은 집사의 말을 듣자, 눈을 확 빛냈다.

“그럼요. 도련님, 저를 믿으시고 크게 거세요. 꼭 이기실 거예요.”

집사는 생각해 주는 척 연신 월령안을 설득했다.

다른 노름꾼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술수였다. 하지만 월령안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없이 멍청하고 순진한’ 도련님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월령안은 생각도 하지 않고, 절반이나 되는 은자를 걸었다.

첫판을 제외하면, 그녀는 판마다 은자를 세 개씩만 걸었을 뿐, 더 거는 법이 없었다.

도박장의 집사와 물주도 열 판을 내리 이겼다. 원래대로라면 이걸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월령안 앞에는 은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몸에는 비싼 장신구들을 걸치고 있었다. 저절로 욕심이 생겼다. 또 그녀가 많이 잃고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크게 한번 걸라고 부추겼다.

월령안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도박장의 집사가 구슬리자, 그녀는 순순히 크게 걸었다.

양측이 주사위를 흔들었다. 각자의 주사위 통 안에는 주사위가 여섯 개씩 있었다. 나올 수 있는 최대 점수는 삼십육 점이었다.

양측은 주사위를 흔들고 난 뒤, 탁자 위에 놓았다. 도박장의 물주가 먼저 통을 열었다.

“도련님, 제 점수는 팔 점이네요. 도련님도 여시죠…….”

“하하하하! 팔 점밖에 안 된다고? 내가 이겼어!”

월령안은 상대방의 통 안의 점수를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나서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흥분해서 자신의 통을 열었다.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삼 점짜리가 세 개, 육 점짜리가 하나, 이 점짜리가 하나, 사 점짜리 하나. 전부 해서 이십일 점이야.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

월령안은 신나서 큰소리를 질렀다. 손을 뻗어 건 돈을 되찾아오려고 했다.

“어서, 어서 돈을 가져와!”

“도련님, 대단하시네요.”

월령안이 흥분해서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자, 도박장의 집사와 물주도 같이 기뻐했다.

‘이렇게 신이 나고, 돈을 딸 거라는 기대감도 있어야 계속 노름을 하지 않겠어?’

도박장의 사람이 당장 월령안에게 은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녀 앞에 쌓인 은자 산이 또 높아졌다.

“자, 상이야.”

월령안은 손이 가는 대로 은자를 하나 집어 집사에게 던져주었다.

집사의 눈이 번뜩였다. 입으로 끊임없이 아부를 떨었다.

월령안은 우쭐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또 육장봉에게 한바탕 자랑했다.

“보았느냐? 내가 이겼어.”

그녀는 다른 뜻이 없었다. 멍청하고 순진한 도련님을 연기하는 중이니, 돈을 땄으면 자기 편에게 자랑하는 것이 당연했다.

의기양양한 월령안의 모습에 육장봉은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참 대단하십니다.”

의기양양하고, 당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월령안이었다.

조계안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진정한 월령안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월령안은 그의 앞에서 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단정하고, 침착하고, 대범했다. 눈앞에서 하늘이 무너져도 의연할 것 같은 그 모습이, 사실은 그녀가 상업계에서 늘 쓰고 있는 가면이었다.

월령안은 그를 상업계에서 만난 적처럼 대했다. 그의 앞에서는 항상 소심하고 조심스러웠다. 진짜 성격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 겁먹은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신중하게 처리하곤 했다.

“내가 또 많이 딸 거야. 기다려, 내가 많이 따서 널 먹여 살릴 거니까.”

월령안의 으스대며 한마디 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 도박판을 마주했다. 흥이 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육장봉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자자, 우리 계속하자. 그 뭐야, 네 생각에는…… 내가 이번에 이길 것 같나?”

월령안은 돈을 따자 신이 나서 두 눈을 반짝거렸다. 환한 얼굴로 집사에게 물었다.

“도련님의 능력이 아주 뛰어나시니 당연히 이기지요.”

집사는 당연히 월령안을 부추겼다.

“그렇다면 크게 걸어야겠어!”

월령안이 눈을 빛냈다. 몇 개나 되는 은자를 판돈 놓는 곳으로 밀었다.

달그락…….

이번에는 도박장의 물주가 이십 점, 월령안은 십구 점이 나왔다. 고작 일 점 차이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월령안은 입을 비죽거리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일 점 차이입니다. 다음 판에는 꼭 이기실 거예요.”

집사는 쉬지 않고 월령안을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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