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39)화 (139/1,004)

139화 저와 한 판 해 보시렵니까?

육장봉과 월령안은 길상 도박장 밖으로 왔다.

월령안은 남장을 했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피부는 백옥처럼 희었다. 두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렸다.

온몸에서는 흥분한 기색이 가득했다. 두리번거리며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영락없이 식견이 좁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같았다.

육장봉도 변장했다. 화려한 옷을 벗고 거친 회색 옷을 입었다. 손에는 커다란 자루를 들고 월령안의 뒤를 따랐다. 마치 도련님을 따라 나온 호위무사 같았다. 기세가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옆에 있는 도련님으로 분장한 월령안이 더욱 연약해 보였다.

“대장군, 제가 쭉 이기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마지막에 거하게 한 판 이기는 게 좋을까요?”

도박장에 들어서기 전, 월령안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뒤따라오던 육장봉에게 물었다.

“무슨 차이가 있소?”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췄다.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감청색 남자 옷을 입은 월령안에게는 귀티가 줄줄 흘렀다. 소년 특유의 풍류스러움을 풍기고 있어, 여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높게 묶어서 오밀조밀 정교한 이목구비를 드러냈다.

월령안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원래 여성스러움을 물씬 풍기던 부드러운 얼굴이 지금은 조금 날카로움을 띠어 소년미를 풍겼다.

특히 두 눈은 별처럼 반짝거리다 우쭐거리는 듯 번뜩였다. 규중에 갇혀 사는 여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계속 이기면 도박장에서도 경계하겠죠. 그러면 얼마 따지 못할 거예요. 만약 처음에 조금 잃어 주면, 도박장에서 경계하지 않는 틈을 타 크게 한 판 딸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길상 도박장을 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겠죠.”

월령안은 두 눈을 반짝였다. 눈빛에 교활함이 묻어나왔다.

처음에는 지고, 나중에 크게 한 판 딸 계획임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육장봉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그럼 크게 한 판 따는 거로 하지.”

굳이 쭉 이길 필요가 없었다.

계속해서 돈을 딴다면 남들은 그녀의 도박 기술이 뛰어나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대로 마지막에 크게 딴다면 그녀가 운이 좋았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누군가 월령안의 정체를 밝혀낸다 해도, 그녀에게 따지고 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뭐해요? 어서 가요.”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리더니, 길상 도박장으로 걸어갔다.

월령안의 차림새는 유난히 귀티가 났다. 그녀가 걸친 감청색 장포는 옷감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온몸에는 옥과 금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딱 보아도 응석받이로 자란 대갓집 도련님이었다.

도박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활했다. 월령안의 옷차림을 보자마자, 그녀를 산재동자(散財童子 – 돈을 뿌리는 동자라는 뜻. 불교의 선재동자의 원래 이름이나, 여기서는 마구 돈을 뿌리는 호구의 의미로 쓰임)로 여겼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도박장 집사가 바짝 붙어 섰다.

“도련님의 존함은…….”

“나는 월씨다!”

월령안은 촥, 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으로 부채를 펼쳐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

“어쩜 이렇게 냄새가 지독한가. 뒤로 물러서라!”

“월 공자……. 노름을 하러 오셨습니까?”

집사가 입을 열자, 누런 이가 드러나며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하지만 평소에 그에게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월령안의 말을 듣자, 그의 눈에 흉악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곧 알랑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내가 도박장에 노름하러 왔지, 아가씨나 찾으러 왔겠나?”

월령안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거들먹거렸다.

“방은 따로 없나? 깨끗한 곳 말이야. 난…… 저들과 함께 노름하고 싶지는 않군.”

월령안은 그렇게 말하며 미친 듯이 노름하고 있는 노름꾼들을 예쁜 눈으로 훑어보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였지만, 곧 불편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월 공자, 도박장에 처음 오셨습니까? 도박장은 기루가 아닌데, 어찌 방이 따로 있겠습니까?”

집사는 겉으로 아부를 했지만, 속으로는 월령안을 비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녀를 슬그머니 떠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월령안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소년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못 알아듣는 척했다. 짐짓 거만하게 말했다.

“난 저자들과 함께 놀고 싶지 않아. 냄새가 너무 지독하잖아.”

“별실은 정말 없습니다. 아니면 이러면 어떨까요? 소인이 지금 바로 월 공자께 상을 하나 비워 드리지요. 혼자 노시면 어떻습니까?”

집사는 떠보듯이 물었다.

월령안은 싫은 티를 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허락했다.

“할 수 없지. 빨리 움직여라.”

집사의 눈에는 월령안을 살이 포동포동 오른 어린 양처럼 보였다. 절대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당장 상을 하나 비우고 월령안과 육장봉을 그리로 안내했다.

고상하고 귀티가 나는 월령안이 도박장처럼 더럽고 시끄러운 곳에 등장하자, 도박장의 노름꾼들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웅성거리며 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느 집 도련님이래? 돈을 털리러 오셨구먼.”

“딱 보니 만만한 새끼 양이구먼. 우리도 오늘은 돈 좀 크게 만져 볼 수 있겠는걸.”

월령안을 바라보는 노름꾼들의 시선은 먹이를 본 맹수의 그것 같았다. 허기진 사람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삼겹살을 본 것처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월령안의 뒤에 서 있던 육장봉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티가 나지 않도록 앞으로 나가 월령안의 옆에 서더니, 악의 어린 시선들을 막았다.

“이건 어떻게 하는 것이냐?”

월령안은 신세계에 들어서기라도 한 듯 도박판에 앉았다. 호기심에 차서 탁자 위의 도박용 도구들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에게 쏠린 사방의 악의 어린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월 공자, 이것은 주사위입니다. 숫자가 크고, 작고를 두고 도박을 할 때 쓸 수 있습니다. 이따가 저희 쪽에서 주사위를 흔든 다음, 큰 게 나올지 작은 게 나올지 둘 중 하나에 돈을 거시면 됩니다.

아니면 도련님도 직접 주사위를 흔들어, 물주(도박에서 선을 잡은 사람, 또는 도박장 쪽의 노름판 진행자)와 겨루셔도 됩니다.

규칙만 잘 정해 놓고 양측이 모두 동의하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월령안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집사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 정말 좋았다.

이 도련님은 돈을 뿌리러 오신 살아 있는 보살님이었다.

“남이 흔드는 거나 보고 걸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노름하러 왔으면 당연히 내가 직접 해 봐야지.”

월령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주사위가 담긴 나무통을 어설프게 집어 들었다. 하지만 안에 든 주사위가 튕겨 나갔다.

이 광경을 본 도박장의 사람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 주사위는 이렇게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노름판의 물주가 시범이라도 보이듯, 주사위 통을 들고 탁자 위의 주사위를 빠른 속도로 넣었다. 그리고 주사위 흔드는 동작을 갖가지로 선보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연신 갈채를 보내왔다.

월령안도 신난 듯이 손뼉을 쳤다.

“대단하구나.”

‘길상 도박장의 주사위에는 역시 문제가 있어. 정말 김새는걸. 이걸 벌써 나한테 들키면 어떻게 해.’

“도련님, 저와 한 판 해 보시렵니까?”

물주가 상황을 보더니 구슬리듯 입을 열었다.

월령안은 눈을 반짝이며 시도해 볼 듯하다가 곧 흥미를 거두었다.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또 뭐 재미있는 것이 없나?”

“당연히 있죠! 도련님, 저희가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라 이 변경에서 우리 길상 도박장이 도박 도구도 가장 많고, 종류도 다양합니다. 주사위가 싫으시면 골패(骨牌 – 32장의 패를 맞춰 노는 놀이), 관포(關撲 – 경품을 걸고 금액을 맞추는 놀이), 엄전(掩錢 – 동전을 가지고 개수를 맞추는 놀이), 엽자패(叶子牌 – 종이 패로 하는 마작 비슷한 놀이) 같은 것도 있습니다. 도련님, 어떻게 노는지 아시나요?”

집사는 월령안이라는 살진 양이 도망칠까 봐, 도박장의 각종 노름법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다른 노름꾼들도 하던 노름을 멈추고 월령안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녀가 무엇을 할지 결정하면 따라서 끼어들 셈이었다.

그들은 모두 닳고 닳은 노름꾼이었다. 도박장과 겨루면 돈을 따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어린 도련님으로부터 조금 따는 것쯤은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집사가 도박장의 도구를 한 차례 설명했다. 월령안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물주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주사위를 흔드는 게 재미있어 보이더군. 나랑 주사위 놀이를 하면 어떤가?”

월령안은 무엇으로 노름을 하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월령안의 오른팔은 다친 상태였다. 제일 좋은 설옥고를 써서 절반 정도 낫기는 했다. 하지만 움직이면 여전히 아팠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주사위를 흔들었다. 일부러 연기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 만들어졌다. 눈썰미가 아무리 좋은 사람도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월령안의 말을 듣자, 길상 도박장의 집사와 물주는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도련님, 그럼 우리 주사위 놀이를 합시다. 제일 쉬운 방법은 누구의 주사위 점수가 더 크나 겨루는 겁니다요. 도련님이 일단 돈을 거시고, 도련님의 주사위 점수가 우리 것보다 크면 이기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만약 다른 노름을 하면 이 도련님의 돈을 전부 딴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주사위 놀이는 달랐다. 그들은 이 도련님의 돈을 탈탈 털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주사위는 원하는 대로 숫자를 내놓았다. 이 어린 도련님이 겨루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시작만 한다면 먼지까지 탈탈 털리지 않고는 도박장 문을 나갈 생각도 말아야 했다.

“좋지! 그럼 너희와 겨루지. 아 참, 너희 도박장이 진다면 제대로 돈을 낼 수는 있겠느냐? 난 돈을 아주 많이 가져왔다고. 너희가 그만큼 돈을 못 주면 어떡하지?”

월령안의 볼은 발그스름했다. 두 눈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노름할 생각에 한껏 부푼 모습이었다. 설령 지더라도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집사의 눈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길상 도박장은 변경에서 제일 큰 도박장입니다. 위쪽에 줄도 닿아 있습죠. 도련님께서 얼마를 따시든 다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꼬마 도련님은 정말 자기가 이길 거로 생각하나? 정말 순진하군. 마지막에 눈물이나 짜지 말라고.’

그들에게는 믿음직한 뒷배가 있었다. 황제의 친척, 인척이 오더라도 노름을 해서 지면 제 운수를 탓해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도박장의 물주와 주사위 흔들기로 겨루게 되었다. 둘러싸고 구경하던 노름꾼들은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없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보면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이렇게 멍청하고 돈 많은 부잣집 도련님이 왔으니, 도박장에서도 남에게 양보하기 싫을 것이다.

도박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교활했다. 입가까지 가져간 먹이를 순순히 꺼내 줄 리가 없었다.

노름꾼들은 비록 얻어먹을 떡고물은 없지만, 그래도 서둘러 떠나지 않고 판을 둘러쌌다. 이 순진한 도련님이 눈물 쏙 빠질 정도로 탕진하는 꼴을 구경하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