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저지른 짓 그대로 되돌려 받겠군
화신이라는 칭호는 귀족 여인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좋은 가문에 시집갈 수 있을지, 더 높은 가문에 시집갈 수 있을지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에게는 춘일연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나쁜 점이 더 많았다.
그 어떤 대갓집에서도 상인 집안 출신의 여인을 며느리로 맞길 원치 않았다. 특히 밖에서 장사하는 여인을 정실로 맞이할 리가 없었다.
삼 년 전, 그녀가 육장봉과 혼인하기 전 유경장이 술 냄새를 풍기며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월령안, 둘의 조건이 너무 차이가 나서 서로 좋은 배필이 되지 못할 거요. 그 사람한테 시집가면 행복하지 못할 것이오. 나도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잖소. 육장봉처럼 대갓집 출신에, 지위도 높은 사람이 어찌 기꺼이 당신을 아내로 삼겠소? 야심이 있는 남자라면 절대로 상인 집안 출신의 여인을 정실로 맞이하지 않을 거요. 특히 당신처럼 밖에서 장사하는 여인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월령안, 육장봉은 변방에 있어서 혼인하는 사람이 당신인 줄도 모른다오. 만약 그자가 알았다면 분명 거절했을 거요. 절대로 당신을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았겠지.
월령안, 난 당신과 혼인하고 싶소. 하지만 난 과거도 보고 싶고, 관리도 되고 싶소. 그러니 내 아내는 절대로 장사꾼이어서는 안 되오. 난 아내의 조력 따위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내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오. 내 말 이해하오?”
유경장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거요? 하다못해 농가에서 태어났더라도, 난 당신과 혼인했을 것이오. 당신과 혼인하면, 난 평생 출셋길이 막히겠지. 과거에 합격해서 벼슬을 하더라도 소용없소. 장사꾼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이유로 정적들의 공격을 받고 위로 올라가지 못할 테니까. 당신은 모를 거요.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소. 내가 평생 당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중에 내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걸 구실로 당신을 미워하게 될까 두렵소. 연모가 증오로 바뀌면 얼마나 가증스럽겠소? 난 가증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소. 당신도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오.”
그날, 유경장은 술에 진탕 취해 있었다. 그러나 월령안은 그가 맑은 정신에 하는 이야기임을 알고 있었다. 그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술이 깬 뒤 유경장은 무려 삼 년이나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우연히 밖에서 마주쳐도, 늘 그녀를 멀리 피했다.
사실 유경장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그를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그래서 그날 그가 했던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 소용돌이도 남기지 못했다.
유경장이 했던 말은 그녀도 전부 잘 아는 것들이었다. 육장봉에게 시집간다면 행복하기도, 금실이 좋기도 힘들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서로 사랑하며 백년해로하기란 아주 어려우리라.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평생을 살며 한 번쯤은 자기 꿈을 좇아 고집을 부릴 필요도, 뜨겁게 마음을 다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벽에 부딪혀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더라도, 심신이 너덜너덜해지더라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최소한 후회는 남기지 않을 수 있으니까.
월령안은 항상 자신의 위치를 잘 파악했다. 또 자신이 뭘 하는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삼 년 전, 기꺼이 변경 귀족 여인들의 성미를 건드리며 꼼수를 부려 화신의 칭호를 따낸 것만 해도 그랬다. 사실 그녀의 목적은 화신 칭호가 아니라 돈이었다.
당시 급히 목돈을 쓸 데가 있었다. 노름판보다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없다.
화신을 걸고 하는 노름판은 그녀가 삼 년 전에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귀족 여인들을 이겨서 화신의 칭호를 따냈다. 또 구 할에 가까운 도박 자금을 혼자 꿀꺽했다. 무려 이십만 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그 이십만 냥으로 약왕 손불사를 불러다 노인의 생명을 연장했다.
그 일을 평생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재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재가할 수 있다 해도 화신의 칭호 따위는 쓸 데가 없었다.
유경장처럼 진사(進士 – 회시 합격자, 과거 시험의 최종 합격자)가 되지 못한 거인(舉人 – 향시 합격자)도 앞으로의 출셋길을 위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화신의 칭호를 따내서 어디에 쓰겠는가.
그저 남의 콧대나 눌러주자고?
그녀는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녀가 뭐라고 하든, 월령안은 흔들리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하녀는 반나절을 설득했다. 그러나 월령안이 생각을 바꿀 기미가 보이지 않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월령안이 식사를 소화하고,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중을 들었다.
그래도 하녀는 아쉬웠는지, 월령안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한번 물었다.
“아가씨, 정말…… 정말로 화신 칭호를 따낼 생각이 없으세요?”
‘우리가 이기면, 사람들이 노름판에서 파산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을 따낼 수 있을 텐데.’
“없어.”
월령안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녀의 어깨가 순간 축 처졌다.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해서 말했다.
“돈을 벌 기회가 코앞에 있는데, 돈을 벌지 못하다니요. 이런 기분은 참 괴롭네요.”
월령안은 여전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주인을 닮아 월씨 가문 하인들도 돈 버는 일에는 매우 흥미를 느꼈다. 돈을 벌 기회라면 아무리 작아도 놓치지 않았다. 어린 하녀가 노름판에 마음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월령안은 도박을 싫어했다.
도박으로 돈을 쉽게 벌 수는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람의 도리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되도록이면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어머니와 월씨 가문을 위해 덕을 쌓는 셈 쳤다.
* * *
육장봉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 달 뒤에 북요와의 비무가 예정되어 있는데 군대 안에서 그와 관련된 사고가 났기 때문이었다.
육씨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그래도 서재로 돌아가 그날의 공무를 끝마쳤다.
자신에게 엄격해야, 남에게도 엄격할 수 있다.
그는 부하들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자신에게는 더욱 엄격했다.
일상 사무를 전부 처리한 뒤에는 암위를 불러들였다. 암위가 변경의 동향을 보고하는 동안, 육장봉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들었다.
그의 부하들은 이제야 변경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알아낸 소식이 많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변경에는 소동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육장봉의 눈에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소란을 피우는 정도로만 보였다. 암위는 금방 보고를 마쳤다.
“대장군……”.
암위는 변경의 동향을 보고하고 나자, 잠시 머뭇거렸다.
“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육장봉은 눈을 떴다. 등불이 어두컴컴한 탓인지 날카로운 얼굴선이 부드럽게 보였다. 눈빛의 차가움도 많이 줄어든 듯했다.
암위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대장군, 월 낭자께서 수횡천을 통해 천목신교에 연락했습니다. 만 냥으로 소 승상과 그의 아들을 손봐줄 사람을 고용한답니다.”
“천목신교 사람을 사서 손을 본다고? 월령안이 수횡천을 참 아끼는군.”
육장봉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의자 손잡이에 올려 둔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 기분이 많이 나빠진 게 분명했다.
암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감히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다행스럽게도 육장봉은 자신의 화를 암위에게 풀지는 않았다. 대신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월령안이 무슨 요구를 했느냐?”
“장군, 월 낭자의 요구는 소 승상의 오른팔을 부러뜨리는 것과 소씨 가문 큰 도련님 소여방에게…….”
암위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계속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소여방에게 뭐?”
육장봉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월령안의 요구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당한 대로 고스란히 갚아 주는 사람이었다. 조금도 손해를 보는 법이 없었다.
‘소여방은 월령안에게 저지른 짓 그대로 되돌려 받겠군.’
육장봉이 생각한 것을 암위도 사전에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을 멈출 이유도, 또 일부러 육장봉에게 보고할 이유도 없었다.
육장봉의 질문에 암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월 낭자께서 소 공자에게…… 겁탈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실내의 온도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육장봉은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내밀고 있었다. 순간 눈에서 음산한 살기가 번뜩였다.
암위는 털썩, 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다급히 말했다.
“대장군, 월 낭자께서는 정말로 겁탈하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겁을 줘서 놀라게만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육장봉의 목소리는 여전히 음산했다. 눈에 어린 한기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코웃음을 치고 입을 열었다.
“소씨 가문 인간이라 그런지 역시 능력이 있군.”
육장봉은 느릿하면서도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천목신교의 사람들에게 알려라. 이번 임무는 내가 직접 움직이겠으니 끼어들지 말라고.”
“예, 대장군.”
암위는 감히 한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황급히 대답했다.
지금 대장군이 이 임무를 맡아 하늘을 무너트린다 해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군께서 화나셨다!’
암위는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못 했다. 마음속으로는 대장군이 물러가라는 말을 해 주기를 끊임없이 기도했다. 안타깝게도 육장봉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일 대조회(大朝會)가 있지?”
“네, 그렇습니다.”
암위는 무겁게 대답했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내저었다.
“됐다, 알았다. 물러가라.”
“예, 대장군.”
암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물러갔다.
밖으로 나선 암위는 풀 내음을 맡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살았네.’
암위는 떠나기 전에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육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형제여, 힘내게!”
육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암위는 이상한 말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곧 육이는 암위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대장군 기분이 언짢으시구나!’
아니, 기분이 언짢은 정도가 아니라 크게 화가 나 있었다. 살기가 하늘을 찔렀다. 눈빛이 매우 흉악해서 어린아이가 눈을 마주치면 단번에 울음을 터뜨릴 거 같았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일은 따로 있었다.
장군은 서재에서 나와 연무장으로 갔다. 그리고 연무장 안의 훈련용 말뚝을 깡그리 베어 버렸다.
말뚝을 베어 버린 뒤, 장군은 장검을 내팽개치고 말했다.
“날이 밝기 전에 여기를 원래대로 복구해 놓아라, 알겠느냐?”
그는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떠나갔다. 육이는 사정을 해 보려고 했으나, 기회조차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에?”
육이는 고개를 들었다. 어슴푸레 밝기 시작한 하늘을 쳐다보자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