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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32)화 (132/1,004)

132화 그까짓 화신 칭호에 목을 맬 것 같아?

사람을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이로 만드는 일이라면, 월령안도 일가견이 있었다.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도 매일 향락에 취해 외부와 단절된다면, 오래지 않아 멍청이가 되고 말 것이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조(趙) 집사가 전부 알아서 처리해 놨어요.”

하녀는 월령안이 입가심하도록 차를 올렸다.

월령안은 차를 받아 한 모금 머금었다 뱉어냈다. 그리고 찻잔을 다시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하녀는 찻잔을 받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다음 따뜻한 수건으로 월령안의 손을 닦아주었다.

모든 것을 마친 하녀는 월령안을 부축하여 일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오후에 주무실 때 유 공자께서 문병을 다녀가셨어요. 아가씨께서 주무신다니, 집사에게 아가씨의 병세만 묻고 돌아가셨어요.”

“유경장? 그 사람이 내가 다친 것을 어떻게 안 거지? 내가 다친 걸 온 변경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건가?”

월령안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성 밖에 매복한 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다친 일을 육장봉이나 조계안이 아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유경장은 어쩌다 알게 되었을까.

그녀는 분명 소문을 낸 적이 없었다.

“순천부윤이 지금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어서 온 변경이 아주 떠들썩하답니다. 그 덕분에 알게 된 사람들도 많고요. 유 공자 말씀으로는, 아가씨께서 춘일연에 참석하기 싫어서 이번 일을 꾸미신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대요. 아가씨가 춘일연에서 망신당할까 두려워서요.”

하녀는 월령안이 앞뜰을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도록 부축했다.

이 산책은 월령안의 습관이었다. 식사 후에는 먹은 게 얹히지 않도록 틈이 나면 산책하고는 했다.

때는 야심한 밤이었다. 달은 휘영청 밝았고, 별은 반짝였으며, 밤바람은 쾌적했다. 화랑에도 등불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산책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춘일연이라고?”

월령안은 잠시 멍해졌다. 깜짝 놀라서 옆에 있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춘일연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

“어…….”

하녀는 어리둥절했다.

“아가씨, 등요 공주 마마의 초대장을 받으시고, 춘일연에 참석하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월령안은 무심결에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해마다 춘일연에 참석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녀 하나 참여하든 말든 뭐가 대수인가.

“사람들이 그러는데, 올해 춘일연에서는 아가씨가 꼼수를 부리지 못해서 망신당하실 거래요. 화신의 칭호를 따내기는커녕 꽃 한 송이도 못 받을 거라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아가씨가 올해 꽃을 몇 송이나 받는지를 두고 내기도 했대요.”

어린 하녀는 작은 목소리로 유경장이 가지고 온 소식을 하나하나 말해 주었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다름이 아니라, 춘일연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그들은 이제야 이런 소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처 대비할 새가 없었다.

하녀의 말을 듣자, 월령안은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기할 것이 뭐가 있다고? 내가 그까짓 화신 칭호에 목을 맬 것 같아? 그리고 삼 년 전에 내가 무슨 꼼수를 부렸다고? 나는 분명 그들이 정한 규칙대로 해서 정정당당하게 화신이 된 거라고!

한가한 계집애들이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그런 쓸데없는 것밖에 없지. 그럴 여유가 있으면 치마 두어 벌 더 사고 장신구 두어 개 더 사서 몸단장이나 하라 그래. 그렇게 하면 다른 아가씨들을 자극해서 옷이나 장신구도 더 사게 하고 좀 좋아?”

“아가씨, 우리한테 이제는 옷과 장신구를 파는 가게가 없어요. 아무리 많이 사더라도 우리와는 상관없잖아요.”

어린 하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도 참, 한시도 돈 버는 일을 잊지 않으시는구나.’

하녀는 이 말이 새어나가면, 그 귀족 여인들이 아가씨를 돈독이 오른 여자라고 흉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삼 년 전, 아가씨더러 돈 냄새나 풍기고, 금, 바둑, 서예, 그림, 다도, 꽃꽂이, 춤, 승마, 활쏘기 등을 하나도 모르면서 춘일연에 의지해 신분 상승을 꿈꾼다고 비웃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가씨가 화신 칭호를 따냈을 때, 그녀들은 아가씨를 험하게 흉본 만큼 얼굴도 화끈거렸을 것이다.

월령안이 화신 칭호를 따낸 방법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돈지랄’을 했을 뿐이다.

금 연주는 궁정 출신의 대가와 합주했다. 사용한 거문고는 명금(名琴)이라 불리는 녹기(綠綺)였다. 비록 월령안이 한 것이라고는 맨 마지막에 금의 현을 잠깐 건드린 것뿐이었지만.

그러나 춘일연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합주를 허락했다. 친우들끼리 서로 도와주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춘일연에서는 합주할 때 당사자가 얼마나 연주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로 도와줄 수 있는지를 규정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현을 한 번 건드렸을 뿐이지만, 그것도 금 재주를 선보인 셈이었다.

바둑이라면 영감님이 있었다. 사전에 귀족 여인들이 바둑을 둘 때 쓰는 수를 잘 익혀 두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바둑을 두는 방식을 노려 미리 판을 짜 두었다. 월령안은 그저 잘 외워 뒀다가 똑같이 두면 그만이었다. 이러면 지기도 쉽지 않았다.

서예, 그림, 다도, 꽃꽂이, 춤 등도 마찬가지였다. 큰돈을 들여 나라의 고수들과 협력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솜씨를 아주 살짝 더하는 식이었다. 그다음 낙인을 찍으면 영락없이 월령안의 솜씨로 둔갑했다.

승마와 활쏘기는 더 쉬웠다.

승마 기술이 부족하면, 명마로 승부를 보면 되었다.

활쏘기에서 정확성이 떨어진다면, 천궁각(天宮閣)의 기관 장치를 이용해서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다.

얼마나 구구절절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던, 얼마나 ‘규정에 맞지 않았던’, 얼마나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던 상관이 없었다.

삼 년 전, 결국 화신 칭호를 따낸 사람은 월령안이 맞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불만을 토로해도 소용없었다. 떠들어댈수록 옹졸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의 그 행동은 결국 공분을 샀다.

월령안이 고수들의 도움을 대놓고 받은 일을 계기로, 춘일연에서는 다시 규칙을 정했다.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합주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아가씨 때문에 이듬해의 승마와 활쏘기 경연은 취소되었다. 빈틈을 노리고 이득을 보는 사람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화신 칭호를 받자마자 시집가 버리는 바람에 춘일연에 참여할 자격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녀들이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아가씨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기회가 왔다.

월령안은 육 장군에게 소박맞았다. 또 등요 공주가 친히 춘일연에 초대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올해의 춘일연에 참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의 춘일연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아가씨를 괴롭히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으리라.

심지어 노름판까지 준비했다고 하지 않던가. 밖에서는 소문이 더욱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월령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린 하녀는 월령안이 상황의 심각함을 모를까 두려웠다. 그래서 유경장의 말을 일일이 전했다.

“아가씨, 절대로 그냥 흘려듣지 마세요. 유 공자께서 또 이 말도 하셨어요. 황궁에서 나온 소식인데, 올해 춘일연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 조왕과 육 장군도 오신대요.

그 귀족 여인들은 아가씨가 삼 년 전에 꼼수를 부려서 이겼다며 이를 갈고 있대요. 아가씨가 조왕과 육 대장군 앞에서 망신살이 뻗치도록 음모를 꾸미는 중이래요. 절대로 방심하시면 안 돼요.”

“육장봉도 춘일연에 참석한다고?”

월령안의 걸음이 멈칫했다. 시선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쓸쓸한 기운이 스쳤다.

‘그렇지, 육장봉도 이제는 독신이지. 삼 년 동안 정실도, 첩실도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살펴볼 수는 있겠지.’

육 대장군이 어느 가문의 여식을 맞아들이든지 그 가문 사람들은 삼 년을 흔쾌히 기다릴 것이다.

‘삼 년은 역시 길지 않구나!’

아쉽지만, 삼 년밖에 요구할 수가 없었다. 그 이상은 너무 지나쳤다.

어린 하녀는 월령안 시선 속의 쓸쓸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유 공자께서 또 이런 말도 하셨어요. 처음에는 소문이 조심스럽게 퍼졌었대요. 근데 아가씨가 다쳤다는 소식이 돌고 나더니, 어디에서나 아가씨가 춘일연에 참여할지 말지 난리래요.

그 사람들은 아가씨가 육 대장군도 춘일연에 참석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분 앞에서 망신당할까 두려워서 습격당했다고 꾸민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대외적으로 손을 다쳤다고 한 것도, 이 핑계로 시합에서 빠지려고 한 거라고요. 또 아가씨는 손을 다치지 않았는데 거짓말하는 거래요.”

어린 하녀는 여기까지 말하자, 까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그 사람들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아가씨가 이렇게 큰 사고를 당한 건 사실이고, 순천부윤도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아가씨한테 흠집이나 내려 들다니! 그리고 내기를 한다는 것도 그래요. 처음에는 그저 노름을 좋아하는 몇 명만 참여했고, 판돈도 크지 않았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됐어요?”

오후에 유 공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어린 하녀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가씨, 아직 모르시죠……. 바로 오늘, 아가씨가 춘일연에서 꽃을 몇 송이나 받을까 하는 노름판이 갑자기 인기가 폭발했대요. 여윳돈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은 전부 달려가서 돈을 걸었다나 봐요. 전부 아가씨가 꽃을 한두 송이밖에 못 받는다는 것에 걸었대요. 여기 걸었으니 다들 절대 잃지 않을 거라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아가씨가 화신 칭호를 따낸다, 에는 한 냥을 걸어서 이기면 백 냥이나 받는데요. 그치만 배당률이 이렇게 높아도 거는 사람이 없대요.”

어린 하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그러나 월령안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가씨, 화도 안 나세요? 저와 집사는 유 공자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요. 유 공자가 저녁 무렵에 오신 게 아니었으면, 저희가 몇 년간 모은 돈으로 내기를 걸 뻔했다니까요. 저희는 아가씨가 반드시 화신 칭호를 따낸다는 데에 걸 거예요.”

“바보야, 화날 게 뭐가 있니. 단순히 금, 바둑, 서예, 그림으로 겨루면 난 상대가 되지 못해. 요령을 부려서 이겼으니, 상대방이 분한 것도 당연하지. 만약 그 여자들이 나와 돈 버는 시합을 하는데, 결국 아버지의 돈을 끌어다가 나를 이긴다고 해 봐. 그럼 넌 화가 나지 않겠니?”

월령안은 사고방식이 개방적이었고, 담담했다. 외부에서 그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춘일연은 귀족들의 놀음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이 규칙을 정했다. 춘일연은 처음부터 귀족 여인들이 이름을 날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춘일연에서 펼쳐지는 모든 종목은 그 귀족 여인들이 평소에 배우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연회였다.

귀족 여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는 재주는 전부 춘일연에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월령안은 춘일연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금이니, 바둑이니, 서예니, 그림이니 하는 데 쏟을 힘이 없었다.

삼 년 전, 급히 목돈이 필요하지만 않았더라면, 비웃음을 무릅쓰고, 남들에게 밉보일 위험을 감수하면서 화신 칭호를 두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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