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내 사람은 영원히 나의 것이다
십 년 전, 조계안은 육장봉과 함께 북요로 가서 현음 고모를 만난 적이 있었다. 현음 고모는 그다지 잘 지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에는 생기가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현음 고모는 북요에서 삶의 가치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와 육장봉에게 대범해야 굴어야 한다며, 남자들에게 의지하는 것밖에 모르는 여인과는 실랑이하지 말라고 일렀다. 이는 그들의 격을 낮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와 육장봉은 여태껏 청희 장공주에게 보복할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 본인이 죽음을 자초하다가, 그들의 손에 걸려든 거라면 그때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청희 장공주의 신분은 특수했다. 조계안은 그녀까지 조사했지만,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라 더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기왕 말이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황형, 더 알아볼까요?”
이번 일 때문에 청희 장공주를 조사한다. 그러면 사적으로 복수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더 알아봐야지. 하지만…… 너무 눈에 띄게 하지는 마라. 영녕후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황조부의 유지가 있는 한, 나라를 팔아먹지만 않았다면 내버려 두어라.”
황제는 청희 장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그 정도일 뿐이고, 반드시 죽여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조용히 본분을 지킨다면, 여생을 돌봐 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일개 장공주가 이 세상을 뒤집지는 못할 게 아닌가?’
“황형, 지금은 예전과 다릅니다. 지금 장봉이는 군대에서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반면 영녕후는 저물어 가는 해처럼 군중의 세력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무림맹주는 잠한성(岑寒聲) 그 늙다리가 아닙니다. 무림 고수들을 모아서 장공주를 보호하지도 못할 겁니다.
또 황숙도 장공주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실종된 지가 십 년입니다. 지금 암황은 바로 저입니다. 저는 청희 장공주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조계안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손에 든 배를 먹지도 않고 이리저리 굴리며 놀고 있었다.
“황형, 예전에 청희 장공주를 보호하던 세력들은 이제 다들 등을 돌렸습니다. 장공주를 보호하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기댈 수 있는 세력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장공주가 야율제와 왕래가 있었다면, 장공주를 잡아들이는 건 물론, 영녕후부를 몰살해도 문제없습니다.
황형, 우리는 손을 쓸 수 있습니다. 더는 거리낄 게 없습니다.”
“일단 알아보거라. 그저 평범한 왕래면 더 나설 필요 없다. 대단한 파란은 일으킬 수 없는 공주일 뿐이다. 짐이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다.”
황제는 청희 장공주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원수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의 아량은 그렇게 좁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항상 국가 대사에 머물러 있었다. 청희 장공주와 그 남자들의 은원과 갈등을 웃음거리로 여겼을 뿐, 관심이 없었다.
황제뿐만 아니라 현음 고모도 청희 장공주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가 종묘사직에 크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황제는 황조부의 유지를 봐서라도 그녀의 부귀영화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황형, 잊지 마십시오. 장공주는 친왕의 지위와 맞먹고, 자신만의 봉지와 병사가 있습니다. 황형께서 넓은 아량으로 봐준다고, 그쪽도 꼭 그럴 거란 보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럴 거였다면 야율제와 왕래를 했을 리도 없겠지요.”
조계안은 손에 들고 있던 배를 탁자 위에 던지고 일어났다.
“황형, 이 일은 제가 적절히 처리하겠습니다. 장공주에게 누명을 씌우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장공주가 정말 뭔가를 하려 한다면, 제가 그 발톱을 뽑아 버려도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황제는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야율제가 군중에서 수작을 부린 게 청희 장공주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조계안의 행동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죄를 정말로 입증할 수 있다면, 짐도 용서하지 않겠다.”
황제에게 종묘사직은 최후의 선이었다. 감히 그 선을 넘는 자는 벨 수밖에 없었다.
설령 청희 장공주가 황조부의 딸이 아닌, 자기 딸이라 해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조계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형, 월씨 저택에 사람 둘을 보내려고 합니다.”
“월령안 옆에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네.”
조계안이 짧게 대답했다.
“대놓고 보내는 것이냐?”
황제가 또 물었다.
월령안은 아주 신중한 사람이었다. 곁에 두고 부리는 사람은 전부 어릴 적부터 훈련을 받은 오래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곁에 첩자를 심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첩자를 심는 데 성공했다 해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이나 알아내는 정도일 것이다.
“물론입니다.”
조계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면 밖으로 보이는 눈에는 우쭐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월령안이 거절하지는 않더냐?”
월령안은 순순히 승낙할 사람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나, 실제로는 강직한 외유내강형이었다.
철광산 일을 꼭꼭 숨기고 빈틈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굳센지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도 그에게는 억지로 굽히고 들어간 것이었다.
“그럴 리가요!”
조계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에는 사나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래, 알았다. 월령안은 감히 거절할 수 없겠지. 됐느냐? 얼른 가라. 네가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첩자를 찾아내기를 장봉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더는 지체하지 마라.”
황제는 조계안이 또 화를 낼까 두려워 얼른 달래주었다.
“네.”
조계안은 온몸에서 뿜어내던 난폭한 기운을 거두었다. 볼멘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은 꽤 의기소침해 보였다.
하지만 황제는 더 달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계안이 의기소침한 게 사납게 구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 번 사나워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 * *
야율제의 손길이 너무 많은 곳에 뻗쳐 있었다. 조계안은 그가 월령안에게까지 손을 쓸까 두려웠다. 억지로 시간을 내서 하녀 둘과 그들의 노비 문서까지 챙겨서 월씨 저택으로 갔다.
월령안은 잠시 누워 쉬려는 찰나에 조계안이 병문안을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다친 팔을 감싸고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화청에 들어서자, 조계안은 나무함을 건네주었다.
“월령안, 내가 주는 사람이다. 앞으로 집 밖을 나설 때는 꼭 데리고 다녀라. 알겠느냐?”
월령안이 당연히 받을 거라 생각했는지 나무함은 가볍게 그녀 앞으로 던져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탁!
나무함이 월령안의 발치로 떨어졌다.
순간 조계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 눈은 먹물에 물든 듯, 폭풍우를 품은 듯했다. 그 음침함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감히 받지 않겠다는 뜻이냐?”
“대인, 제가 받을 손이 없어서요.”
월령안은 힘없는 표정을 하고 다친 오른팔을 가리켰다.
조계안의 눈망울에 일던 폭풍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히 교만했다.
“못났군!”
월령안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나무함을 주웠다. 그리고 조계안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나무함을 열었다. 노비 문서를 꺼내 한 번 보고는 도로 넣었다.
“조 대인, 이 두 사람은…… 이제 제 소유인가요?”
“노비 문서를 네게 주지 않았느냐?”
조계안은 부잣집 도련님처럼 건방진 자세로 과일 하나를 집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이제는 제 사람들이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죠?”
월령안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으냐?”
조계안이 한 손을 탁자 위에 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음울한 눈이 월령안을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
월령안은 그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만약 때려죽인다면요?”
“내 사람을 감히 죽이겠다는 거냐?”
조계안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아주 느릿하게 말했다.
팍!
조계안은 말을 마치자, 손에 힘을 줘서 들고 있던 과일을 산산조각을 냈다. 그의 손가락 틈새로 과즙이 흘러나왔다.
“조 대인이 제게 주셨으니, 제 사람인 줄로 알았지요.”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아직도 대인의 사람이네요.”
‘이렇게 대놓고 내 곁에 첩자를 심다니. 조계안은 내가 감히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고 작정했군?’
그녀는 거절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녀들을 죽일 수는 있었다.
조계안은 한 손을 탁자 위에 올린 채 윗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를 위협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월령안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챈 조계안은 다시 몸을 앞으로 더 기울였다. 윗몸이 거의 탁자 위에 엎드리다시피 하여 더는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그제야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내 사람은 영원히 나의 것이다. 월령안, 알겠느냐?”
월령안의 말과 마찬가지로, 조계안의 이 말에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그의 눈빛은 공격성을 전혀 감추지 않고 있었다.
월령안은 마음속의 불만을 겨우 억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대인, 걱정하지 마세요. 대인께서 실망하시지 않도록 이 둘을 잘 쓰겠습니다.”
“허.”
조계안이 피식 비웃더니, 다시 몸을 뒤로 젖혔다.
그가 월령안의 말 속에 숨겨진 거절의 의미를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네가 거부한들 어쩌겠어?’
삼 년 전, 월령안은 그를 위해 일하기를 거절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그는 원하는 것이라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기어이 손에 넣고야 말았다. 월령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친 데는 어떠냐?”
조계안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과즙투성이가 된 것을 알아차렸다. 손을 뒤집어 월령안 앞으로 내밀었다.
“손 닦을 정도의 기력은 있느냐?”
월령안은 앞의 말만 듣고 그가 드디어 병문안 온 사람답게 자신을 걱정해 준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다시 보기도 전에 그는 억지에 가까운 요구를 했다.
월령안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손 닦아줄 아가씨가 필요하면, 문밖을 나가 오른쪽으로 가면 있는 기루에 많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번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가 조계안이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간 적이 있었다. 또 나중에 육장봉까지 이 일을 따지러 찾아왔던 것을 떠올렸다. 결국,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켜버렸다.
조계안, 조 대인은 고집쟁이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그의 성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월령안은 그를 노려보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입꼬리를 한껏 올려 억지웃음을 지었다.
“송구합니다, 조 대인. 제가 손수건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요.”
“괜찮다. 나한테 있어.”
조계안은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월령안에게 건네주었다. 먹처럼 새카만 두 눈은 웃고 있었지만, 음산한 기운이 풍겼다.
월령안은 손수건을 받는 순간, 그의 시선에서 우쭐거림을 읽었다.
‘이 인간은 역시 나를 놀리고 있군.’
월령안은 눈을 내리깔며 조소를 감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조계안이 데려온 두 하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동그란 두 눈을 치켜뜨더니,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아랫사람 노릇을 어찌 하는 것이냐? 너희 주인님의 손이 더러워진 것이 보이지 않느냐? 어서 닦아드리지 못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