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청희 장공주
염라대왕이 삼경(三更 – 오후 11시~다음날 오전 1시)에 불러도 약왕은 오경(五更 – 오전 3시~오전 5시)까지 잡아 둔다.
사람에게 숨만 붙어 있으면 살려낼 수 있는 게 손불사였다.
손불사의 의술은 천하에 보기 드물 정도로 뛰어났다. 그와 친하게 지낸다면 명줄 하나가 더 붙어 있는 셈이었다. 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월령안의 이 거래는 겉으로는 손해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손불사가 필요할 때가 오면, 남아도 한참 남는 거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대장군, 저희는…… 정말로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육이가 머리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여 저희에게 그만한 돈이 있다고 해도 손불사는 저희 돈을 받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매해 십만 냥을 내는 건 저희에게는 큰 부담입니다.”
‘장군, 잊으셨습니까? 장군 수하에는 먹여 살려야 할 병사가 한 무더기라고요. 그리고 이제는 기꺼이 큰돈과 군량을 보내 병사들을 먹여 살려 주던 월 낭자도 없지 않습니까.’
조정에서 내려오는 군량은 수하의 병사들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처럼 좋은 걸 배불리 먹고, 부족함 없이 훈련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조정의 군량은 받아 내기도 힘들었다.
병부와 호부는 문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문관들은 무관들을 억누르려고 군량을 아주 빠듯하게 계산했다. 그마저도 이 핑계 저 핑계 하면서 밀리기 일쑤였다.
무관들이 수하의 병사들을 전장에 내보내서 승리를 쟁취하려면 개인의 돈을 보태야 했다.
“월령안의 수중에 아직 어떤 가게가 남았느냐?”
육장봉은 월령안에 비하면, 자신도 가난뱅이 수횡천보다 크게 나을 것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월 낭자가 갖고 있던 가게는 전부 처분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게 몇 개는 이틀 전에 추밀원에서 인수했습니다.”
설령 그들이 월령안의 가게를 인수한다 해도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육이는 잠시 생각하다 이 사실을 결국 대장군에게 말하지 않았다.
가게를 차리는 것과 지금 그들이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장사였다.
그들이 지금 하는 몸 쓰는 일은 밑천 없이 하는 장사였다. 게다가 그들이 잘하는 영역이기도 했다. 육이는 자기들이 가게를 운영한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밑지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거로 생각했다.
“조계안의 수완이 좋아졌군.”
육장봉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는 곧 깨달았다. 조계안은 가게 인수 건을 빌미로 월령안이 자신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더 추궁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심씨 가문의 가게는 몰수한 다음 공개 경매하는 게 맞느냐?”
육장봉은 육이를 흘겨보고는 물었다.
“대장군, 심씨 가문 사건은 아직 재판 전입니다.”
‘대장군, 지금 심씨 가문의 가게에 눈독을 들이기엔 너무 이른 게 아닐까요?’
“순천부윤에게 말해 둬라. 심씨 가문의 가게는 내가 쓸 데 있으니 남겨두라고 해.”
돈 때문에 월령안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은 단 한 번으로 충분했다.
“대장군, 저희에게는 가게를 운영할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육이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저는 이런 걸 모른단 말입니다. 대장군께서 설마 나더러 심씨 가문 가게를 운영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심씨 가문의 송사가 끝나는 대로 그 가게를 전부 심민의 명의로 해 놓거라.”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마라. 이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훈이었다. 그는 그 규칙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심민이라면 가능합니다. 단지…… 심민이 하려 할까요? 소인이 듣기로, 심민은 월 낭자가 불러들인 인재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월 낭자에게서 사람을 빼앗는 꼴이 아닙니까?”
어찌 되었든 간에 월 낭자는 장군을 포함한 그들을 후히 대해 주었다. 그들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장군께 소박맞은 뒤에도, 장군과 선만 그었을 뿐이다. 딱히 장군에게 원한을 품거나, 보복하지도 않았다.
육 부인으로서든, 육씨 가문에서 쫓겨난 전 부인으로서든, 월 낭자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로서는 월 낭자의 사람을 빼앗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육이의 말을 들은 육장봉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바로 웃으며 말했다.
“심민은 야심 있는 사람이다. 나를 따르는 게 월령안을 따르는 것보다 전도유망하다는 걸 알고 있을 터. 어느 게 최선인지 잘 알 거다.”
육장봉은 대단히 기대되었다. 월령안의 화난 모습은 분명 생동감이 넘치고, 솔직할 것이다.
* * *
평화 회담이 열리기 전, 야율제는 회담 인원들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새 갑자기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마치 물이 끓는 가마솥에 뜨거운 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았다. 잠잠해 보이기만 했던 변경은 안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변경 전체의 암부(暗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율제의 은신처를 재빨리 찾아내고, 야율제의 행적을 실마리로 북요가 변경에 심어 놓았던 첩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조계안은 야율제를 추적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겨우 야율제가 성 밖에 은신해 있음을 조사해 냈다. 조계안이 한숨을 돌리고 찾아가려 할 때였다. 황제가 육장봉의 소식을 전했다.
“야율제가 군대의 고수를 상대로 손을 썼다는구나!”
황제는 출궁하려는 조계안을 불러 세우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계안은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월령안에게 병문안을 하러 가려던 참이었다. 황궁 문을 나서기도 전에 황제에게 도로 불려오는 바람에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황제의 말을 듣자, 조계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화가 나서 말했다.
“두 나라의 비무를 통해 저희에게 한 수 배우겠다고 제안한 건 그쪽 아닙니까. 이제 와서 그 말을 어기다니. 야율제도 참 못났군요. 이러니 전쟁에서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지요.”
“북요인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거다. 이 몇 년 동안, 양국 간 전쟁에서 우리가 더 많이 졌었지. 그래서 이번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북요인은 사납고 거칠며, 지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 그 성격상 이번 회담을 빌미로 우리와 한 번 겨루려는 것도 정상이다. 패전국 입장에서는 져도 부끄러울 게 없으니까.
하지만 비무에서 이기면 회담 시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지.”
황제는 조계안이 북요의 속셈을 알아챘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계안이 이 일을 중시했으면 하는 마음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계안아, 한 달 뒤의 비무에서 지면 절대 안 된다. 알고 있느냐?”
조계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형, 야율제가 비열한 흉계까지 꾸며 우리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니, 국위 선양만을 위해서 이기려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제가 일전에 알아낸 정보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증거가 확실하지 않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정보냐?”
황제는 조계안이 이유 없이 일을 벌이지 않음을 잘 알았다. 그가 이렇게 말한 걸 보지, 이 정보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야율제가 청희 장공주의 별장에 나타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조계안은 무표정하게 말을 꺼냈다.
“청희 고모님?”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조계안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가면 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청희 장공주를 ‘고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예의를 알고 지키는 황제뿐일 것이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청희 장공주는 하늘이 선택한 행운아라고 했다.
청희 장공주는 황조부(皇祖父) 총비(寵妃)의 소생이었다. 당시 그 총비는 후궁의 우두머리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황조모(皇祖母)마저도 충돌을 피하려고 양보해야 할 정도였다.
그 총비가 딸 하나만을 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황자라도 낳았더라면, 황위가 그들의 부황한테까지 왔을지도 의문이었다.
당시 청희 장공주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공주는 물론이고 황자들조차 그녀를 멀찌감치 피해 다녔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아리따운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왔다. 성격도 아주 좋았다. 연약하고 순진하여 황자들과도 잘 어울렸다 한다.
하지만 조계안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외모가 아리땁고 마음씨가 고우며 순진하기만 한 여인이 무슨 수로 뭇 남성들의 혼을 빼놓을 수 있었겠는가.
황조부마저도 조상의 유훈을 어기면서까지 그녀에게 봉지(封地)를 주고 사병(私兵)을 두게 했다. 심지어 영녕후부에 시집보내 평생의 안락함을 보장해 주었다.
지금까지 봉지에 사병까지 갖춘 공주는 청희 장공주가 유일했으며, 그 지위가 친왕(親王)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황조부는 임종 전에 유지(遺旨)까지 내렸다. 그들 부황에게 훗날 청희 장공주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봉지와 사병을 몰수하지 않도록 했다. 나아가 장공주의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게 승낙하라고 강요했다.
부황이 승낙하지 않으면 황위 계승조차 할 수 없을 판이었다. 이로 보건대 황조부가 청희 장공주를 얼마나 총애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황조부를 제외하고도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혼을 빼앗겼다. 그 남자들도 하나같이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야율제의 아버지는 선대 남원대왕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가 아니면 장가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를 위해 북요 황제의 명령도 어기고, 양국 간에 체결하지 얼마 안 된 평화 협정마저 파기했다.
육장봉의 아버지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그녀 때문에 성지를 거역했다. 황궁 문밖에서 사흘 밤낮을 무릎을 꿇어 가면서 그들의 친고모 현음 공주와의 결혼을 거부했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세자 몇 명과 강호 두 문파의 후계자들이 그녀에게 푹 빠졌다. 천하를 가져다 바칠 심정으로 그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만 흘리면 아무것도 할 필요 없었다. 무수한 사람이 그녀를 속상하게 한 사람을 대신 손봐 주겠다고 나섰다.
중궁(中宮)의 적출 공주이자, 그들의 친고모인 현음 장공주가 그 첫 번째 희생자였다.
현음 장공주는 육장봉의 아버지에게 결혼을 거절당했다. 그리고 청희 장공주의 추종자들이 합심한 끝에, 머나먼 북요에 있던 환갑 넘은 황숙(皇叔)에게 화친을 위해 시집가야만 했다.
그나마 황조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망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 일족은 청희 장공주에게 시달리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청희 장공주도 영리한 사람이었다. 황조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병권을 잡고 있는 영녕후부로 재빨리 시집가서 영녕후부의 세자비가 되었다.
그 뒤로 청희 장공주는 아주 잠잠해졌다.
청희 장공주는 전 반생에 운을 다 쓴 모양이었다. 그녀는 영녕후부로 시집간 지 이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도 세자비였다. 게다가 자식 하나도 두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본분을 지키고, 영녕후부와 추종자들이 보호해 준 덕에 지금도 잘살고 있었다. 부황은 죽을 때까지도 보복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조계안은 황제를 힐끔 바라보았다.
오늘 그가 청희 장공주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황제는 황실에 이런 공주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름이 아니라, 청희 장공주가 이십여 년 동안 너무 조용히 지냈다. 덕분에 그녀의 존재조차도 잊혔다.
게다가 그때는 그들도 태어나기 전이었다. 윗대의 잘잘못을 따질 자격도 없었다. 현음 장공주도 화친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강요하지 않았더라도 북요로 화친을 맺으러 갔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화친을 선택한 이상, 결혼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고 했다.
현음 장공주는 자기는 어디에서든, 어떠한 어려운 환경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잘 살아나갈 자신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