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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28)화 (128/1,004)

128화 가난이 상상력을 제한한다

“설옥고는 나도 안다. 외상을 치료하는 영약으로 가격이 어마어마하고, 아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들었어. 약왕곡(藥王谷)에서 일 년에 밖에 내다 파는 설옥고는 열 병도 안 된다고 하더라. 육장봉이 자력으로 설옥고를 구하려면 정말 힘들 거다.”

게다가 한 병에 든 양도 아주 적었다. 상처가 크면 한 번에 한 병을 다 써야 했다.

그래서 설옥고가 좋기는 해도, 강호에서 그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수횡천은 써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심각한 상처라도 설옥고를 써 본 적이 없었다. 살 돈이 없으니까.

“그래요. 설옥고는 사기 힘들어요.”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그레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약왕곡에는 규칙이 있어요. 약왕곡의 약은 조정의 사람에게는 팔지 않거든요. 육장봉이 설옥고를 원한다면, 제게 머리를 숙이고 제 손에서 가져갈 수밖에 없어요.”

손불사는 조정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만약 손불사가 별의별 약들을 만들 수 있도록 많은 약재와 돈을 그녀가 대주지 않았다면, 손불사도 툴툴거리며 설옥고를 그녀에게 파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도 손불사가 주는 설옥고는 한 해에 고작 여덟 병뿐이었다.

근 삼 년간, 전장의 상황에 따라 설옥고를 한두 달에 한두 병씩 육장봉에게 보냈다.

육장봉에게 설옥고가 떨어지지 않도록, 웃돈을 주고 남들에게서 설옥고를 추가로 사들이기까지 했다.

씀씀이가 큰 그녀답게 가격도 후하게 쳐주었다. 강호의 몇몇 판매상은 아예 전문적으로 약왕곡에서 약을 사다가 그녀에게 되팔아 이문을 챙기기도 했다.

“육 장군이 너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됐다.”

수횡천은 월령안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를 부른 이유를 물었다.

“나한테 볼일이 있는 거지?”

“네.”

월령안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육장봉은 경기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어요. 그래서 아까 말해 두었거든요. 내일 저녁 제가 손쓸 일이 좀 있다고요. 인명 사고까지는 내지 않을 테니까, 슬쩍 눈 좀 감아 달라고 했어요.”

“육장봉이 동의했어?”

수횡천이 물었다.

“동의하기 싫으면, 육장봉이 부탁한다고 먼저 입을 열어야 하거든요. 제가 퇴로를 마련해 주었으니, 당연히 그 길을 따라 물러난 거죠.”

그녀는 육장봉이 입을 열어 도움을 청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육장봉이 자신을 괴롭히는 쪽이 더 무서웠다.

바로 광원사의 일만 해도 그랬다. 육장봉이 그녀를 괴롭히고, 기를 꺾어 놓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게 아니라면, 꼭 그날 광원사에 가야 하고, 반드시 그를 기다려야만 서탑에 가서 어머니에게 제사 지낼 수 있다고 할 리가 없었다.

‘소 승상이 손쓰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하!’

소 승상은 바보가 아니다. 육장봉이 광원사에 얼굴을 비쳤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할 리가 없다.

육장봉은 평범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가 수중에 병권을 거머쥐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다.

수횡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에 손을 쓰려고?”

“심씨 가문은 제가 손을 쓸 필요가 없어요. 그쪽은 조만간 화를 자초할 거예요. 제 목표는 소씨 가문이에요.”

월령안은 수횡천에게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날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수횡천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보복하지 않으면,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밤마다 악몽을 꿀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려고?”

수횡천은 월령안을 말리지 않았다.

육장봉에게 이 계획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월령안이 적당한 선을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모든 원한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보를 해 주면, 상대방은 이를 나약하고 무능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경우가 더 많다. 그러면 상대방을 감히 어쩌지 못한다고 여겨, 더욱 극성스레 괴롭힐 것이다.

월령안은 고아에다 어마어마한 재산까지 갖고 있었다. 남들이 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세도가들이 득실거리는 변경에서 발을 붙이려면, 단호해져야 할 때는 인정사정을 봐주지 말아야 했다.

“강호의 일은 강호에서 해결해야죠. 그놈들이 강호의 살수를 고용했잖아요? 그럼 저도 강호인을 고용해서 손을 쓰면 돼요. 어쨌든 돈은 남아도니까요.”

월령안은 돈을 벌고 쓰는 데만큼은 누구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심씨 가문에서 오천 냥을 들여 살수를 고용했다. 그러면 그녀는 일만 냥, 곱절의 가격을 내서 실력이 더 강한 살수를 고용할 수 있었다.

“흠흠…….”

수횡천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순간 질투심을 느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돈이 얼마나 많길래 돈이 남아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가장 부유했을 적에도 돈이 남아돈다는 호언장담은 하지 못했다.

“그럼…… 몇이나 고용하려고? 어떻게 할 셈인데?”

그들 같은 강호인은 변경에서 손을 쓸 수 없다는 조정의 규정이 있었다. 그가 손을 쓰면 조정에서는 반드시 조사해 낼 것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월령안의 이 주문을 받고 싶을 지경이었다. 월령안이 돈을 쓰기로 한 이상 절대 쩨쩨하게 굴지 않으리라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머릿수는 상관없어요. 결과만 볼 거예요. 소 승상이 마차에서 굴러떨어져서 반드시 오른손이 부러져야 해요.

그리고…… 아니다. 여인에게는 손을 대지 않겠어요. 대신 소여방에게 손을 쓰세요. 줄곧 풍류를 즐겼잖아요? 그럼 치정 사건을 만들어 주는 거로 하죠.”

그녀는 하찮은 원한이라도 꼭 갚아야 했다. 누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열 배로 갚아 주어야 했다.

“소씨 가문이 서북쪽에 상단을 두고 있어요. 겉으로는 가죽 장사를 하지만, 암암리에 양식을 암거래하고 있지요. 소씨 가문의 상단이 물건을 출하할 때마다 싹 털리게 해 주세요.”

소씨 가문의 가산이 얼마나 많든 간에, 거듭되는 손실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두고 볼 심산이었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아.”

수횡천은 월령안의 요구를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 승상 쪽은 내가 처리하마. 굳이 손까지 쓸 필요 없이, 우연히 사고가 나게 만들면 돼. 소여방 쪽은 소육자에게 맡길게. 그 돈은 일단 아껴 두자. 소씨 가문의 상단을 터는 건 위험할 거야. 천목신교 사람들을 고용할 수도 있지만, 돈이 많이 들거든.”

“안 돼요! 이 일에 오라버니와 소육자는 나서면 안 돼요. 소 승상이 둘의 흔적을 찾아내게 해서도 안 돼요. 소 승상이 그래 봬도 조정의 중신이에요. 오라버니와 소육자는 조정에서도 뻔히 아는, 정도를 걷는 대협이라고요. 둘이 손을 썼다가는 조정에서 강호에 트집을 잡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될 거예요. 이런 일은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파 사람들에게 시키면 돼요.”

월령안은 여기까지 말하고 피식 웃었다.

“오라버니, 저 때문에 돈을 절약할 필요는 없어요. 얼마 전에 가게를 모두 처분해서 몇십만 냥이나 있거든요. 저는 지금 이 돈을 쓸데가 없어요.”

수횡천은 한참이나 말문이 막혔다. 머리를 젓고는 고민스럽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많은 돈은 필요 없어. 일만 냥 정도면 천목신교 사람들을 두 번은 고용할 수 있을 거다.”

‘가난이 상상력을 제한하는구나! 가게 몇 개를 처분했다고 몇십만 냥이나 되는 돈이 생기다니! 월령안이 가지고 있는 가게는 도대체 얼마를 벌어들이는 거야?’

그의 집안에서 몇 대를 걸쳐 내려온 가게며 밭을 전부 팔아도 고작 몇만 냥밖에 안 됐다.

사람들이 월령안을 복덩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그녀의 실물과 같은 크기의 순금 동상을 빚을 수 있을 것이다.

* * *

육장봉은 설옥고를 가지고 군영으로 돌아왔다. 육이는 나기가 다친 자초지종을 조사해 냈다.

“대장군, 아침 훈련 때 나기가 사용한 병기가 사람 손을 탔습니다. 나기의 심복인 정욱(丁旭)이 손을 댔습니다.”

육이는 육장봉의 옆에 서서 조사해 낸 내용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정욱의 말로는 나기에게 보복하려고 했답니다. 정욱의 형은 나기와 친구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무술 실력도 나기보다 뛰어났다고 합니다. 둘이 적을 유인하는 임무에 나갔다가, 형은 전사하고 나기만 돌아왔습니다. 나기는 그때 임무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나기는 그 공로를 바탕으로 고속 승진해서, 지금의 위치까지 아주 빨리 올라왔다고 합니다. 정욱은 나기가 자기 형의 공로를 숨기고 가로채, 형의 시체를 밟고 기어올랐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정욱은 장군께서 나기를 중용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나기의 병기를 관리하는 것을 이용해 병기에 손을 댔다고 합니다.”

“흥, 변명치고는 완벽하군.”

육장봉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양(楊) 군의는 뭐라고 하더냐? 나기의 상처가 언제쯤 나을 수 있다 하더냐?”

“양 군의 말로는 급소를 다쳤다고 합니다. 완치되더라도 다시는 전장에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한 달 뒤 북요인들과의 비무에는 아예 나갈 수 없었다.

“다시 조사해라! 나기가 정말로 정욱 형의 공로를 가로챈 게 사실이라면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육장봉의 눈에서 한기가 번뜩였다.

“정욱의 배후에 북요인이 있는지도 다시 조사해라.”

나기가 다친 사건은 정욱이 말처럼 단순한 보복이 아니었다.

정욱은 나기의 심복이었다. 나기에게 보복하려면 기회가 많았을 터,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야율제가 나타난 사건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네, 장군.”

육이는 명령을 받고 물러가려 했다. 이때 육장봉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설옥고를 사 오도록 해라.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월령안을 찾아가 약을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그녀가 먼저 약을 건네기는 했다. 그러나 속이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남한테 끌려다니는 게 싫었다.

남한테 머리를 숙여 부탁하는 게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특히 월령안한테 머리를 숙이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일은 한 번 겪는 것으로 충분했다.

“장군, 약왕곡의 약은 조정의 사람에게는 팔지 않습니다. 저희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습니다.”

육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변방에 보내온 설옥고가 월령안의 솜씨임을 알고, 설옥고를 구하려고 수소문해 봤다. 그 결과,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살 수 있는데, 너는 왜 못 산다는 말이냐?”

월령안이 손불사에게서 약을 살 때는 그의 부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녀 역시 조정에 속한 사람 아닌가.

‘월령안은 손불사가 타협하게 했다. 내 부하라고 못할 이유가 있나?’

육이가 우거지상을 하고 말했다.

“소인이 조사해 봤습니다. 월 낭자는 약왕 손불사가 타협하도록, 매해 약재 구입비 십만 냥과 진귀한 약재 세 뿌리도 제공한다고 합니다. 그 대신 손불사가 만들어 낸 약을 제일 먼저 구매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월령안은 삼 년간 사십만 냥에 가까운 돈을 들여 우선권만을 얻었다. 손불사가 직접 만든 약을 사려면 여전히 시가대로 돈을 내야 했다.

이 엄청난 씀씀이에, 육이도 그녀의 호방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은 차가운 눈초리로 육이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그만한 돈이 없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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