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27)화 (127/1,004)

127화 육장봉의 부탁

이각(二刻 – 약 30분)이 지난 뒤, 육씨 저택의 집사가 육장봉보다 한발 앞서 월씨 저택에 도착했다. 준비한 예물을 가져오며, 배첩(拜帖 – 남을 방문할 때 쓰는 명함)도 같이 올렸다.

“우리 장군께서 월 낭자가 다치셨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약 일각(一刻 – 약 15분) 뒤에 직접 문병하러 오실 겁니다.”

“육 대장군께서요?”

월씨 가문의 집사는 손에 든 배첩을 보면서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육 대장군이 먼저 배첩을 보낸 뒤에 방문하다니?’

고작 일각 전에 보내기는 했지만, 월씨 가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의아한 일이었다.

‘육 대장군이 언제부터 이렇게 예의를 지키셨다고?’

육 대장군은 월씨 저택을 방문할 때면, 항상 제집 안방 드나들 듯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갔다. 배첩은커녕 통보조차도 기다려 주는 법이 없었다. 아가씨가 불편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찾아왔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아니면 육 대장군이 도움을 청할 일이라도 있나?’

예물을 보낼 때는 반드시 바라는 게 있는 법.

월령안은 집사가 가져온 배첩과 예단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웬일이래!”

육 대장군이 예의를 다 지키다니. 정말로 급한 일이 있어 도움을 청하러 온 모양이었다.

“날 좀 일으켜다오.”

월령안은 배첩을 옆에 있던 하녀에게 넘겨주었다. 손을 살짝 들자, 눈같이 흰 손목이 조금 드러났다. 손목 바깥쪽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가씨, 이제야 열이 내렸습니다. 의원이 잘 쉬어야 한다고 했어요.”

하녀는 허리를 굽혀 월령안의 팔을 부축했다. 그리고 상냥하게 권유했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육 대장군이 배첩을 보냈는데 내가 만나지 않을 수나 있겠느냐?”

월씨 저택으로 돌아온 날, 지나치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열이 올랐다. 그러나 이제는 열이 다 내렸다. 몸에도 어지간히 기력이 생겨 육장봉을 만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월령안은 하녀가 탁자에 올려놓은 배첩과 예단을 훑어보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육장봉이라 해도 오늘은 나를 괴롭히지 못하려나 보네!’

월령안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생기 있어 보이도록 연지도 좀 바르게 했다.

이런 때는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는 병색이 전혀 없었다. 발그레한 얼굴빛에, 두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자신의 모습을 본 월령안은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열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온몸에 힘이 없고 나른했다. 무리하지 않고, 하인에게 연교(軟橋 – 가벼운 가마)를 가져오라고 해서 화청까지 갔다.

월령안은 화청에 들어섰다. 비어 있는 상석을 훑어보더니, 왼쪽 아래쪽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지 오래지 않아 육장봉이 또 아무 통보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예의를 지키는 건 잠깐이군.’

“육 대장군.”

월령안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예전처럼 양손을 겹쳐 읍을 하는 대신, 무릎을 살짝 굽히고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육장봉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눈에 띄게 불편해 보이는 월령안의 오른팔을 훑어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예를 거두시오.”

“감사합니다. 대장군, 앉으세요.”

월령안은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물러나더니 왼손을 들어 올렸다.

육장봉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던 순간, 짙은 약 냄새에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월령안이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수횡천이 어찌 이리 무능한가?’

육장봉이 상석에 앉자, 하인이 재빨리 차를 올렸다. 육장봉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에야 월령안은 육장봉의 왼편 아랫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월령안은 차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육장봉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장군께서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많이 다쳤소?”

육장봉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월령안에게 눈길을 돌렸다.

“좀 다쳤을 뿐입니다. 며칠 치료하면 나을 겁니다. 대장군께 걱정을 끼쳤습니다.”

월령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태도였지만, 사실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육장봉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광원사 일은 내가 소홀했소. 다음번에 내가 다시 데리고 가지.”

월령안이 다쳤으니, 광원사의 일은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가 혜능 대사에게 손을 써 서탑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제사 지낸 일은 모르는 척할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대장군.”

육장봉이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월령안은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도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 두었다. 육장봉이 꼬투리를 잡지 못할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정말로 이 일을 그대로 넘어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육장봉은 이치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한발 물러났다.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육장봉이 요구하는 말들을 하루빨리 준비해 두어야 했다. 남에게 속박당한 느낌은 정말 불쾌했다.

“이 일을 지시한 게 누구인지, 실마리는 있소?”

육장봉이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어 월령안에게 약을 부탁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동등한 값어치를 가진 것과 교환하는 것이라면 할 수 있었다.

“대장군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단서를 조금 찾아냈습니다.”

그녀가 가진 인력으로는 이렇게 빨리 범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저택에는 무림맹주가 머무르고 있었다. 무림맹주가 있는 한, 강호의 일이라면 조사해 내지 못할 것이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오?”

월령안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반드시 복수할 게 뻔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챘다. 육장봉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것도 적지 않은 도움이 필요했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바로 요구했다.

“육 장군께서 편의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할까요?”

“말해 보시오.”

육장봉은 뒤로 기대앉았다. 조금 느긋해진 분위기가 드러났다.

월령안은 역시 영리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았다. 그러니 황제가 그녀에게 철광산이 있고, 전선에 보낸 병기에도 문제가 있음을 짐작하면서도, 여전히 모른 척 반쯤 눈을 감아 주는 것이리라.

심지어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월령안을 가두어 심문하지 않았다. 대신 변죽만 울리면서 월령안을 계속 쓰고 있었다.

이로 보건대 황제는 월령안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월령안 같은 사람은 수하로 쓸 수 있다면 확실히 유용할 것이다. 단, 그녀가 기꺼이 원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월령안이 그를 위해 기꺼이 모든 일을 했던 것처럼.

설령 월령안이 없었다 해도, 그도 나름대로 사전에 준비해 두었다. 조정에서 군자금을 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기가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월령안처럼 잘 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그렇게 편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난 삼 년 동안 월령안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잘 해냈다. 그래서 그는 뒷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내일 저녁……. 제가 누굴 좀 혼내 주려고 합니다. 대장군께서 편의를 봐주셔서, 아무것도 못 본 척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인명 사고는 내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소 승상은 심씨 가문의 배후에 숨어서, 강호인을 고용해 손을 쓰면 아무 걱정 없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강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 바로 이 월령안이 오라버니로 삼은 사람이란 말씀이야. 무림맹주의 보호를 받는 내가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육장봉은 월령안을 흘끔 보았다. 속으로는 웃었지만, 머리를 끄덕여 동의했다.

“너무 지나치게는 하지 마시오.”

역시, 그녀는 손해를 보고는 못 살았다. 그러니 조계안이든, 소 승상이든 월령안에게서는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

물론, 육장봉도 마찬가지였다.

육장봉이 동의하자, 월령안도 눈치 있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대장군께서는 제 문병 말고도, 다른 용건이 있으신지요?”

육장봉 이 인간은 늘 보통 거만한 게 아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주제에 고고한 학처럼 고귀한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게 했다.

저 인간이 출신이 좋고, 본인도 능력이 있으니 망정이다. 그녀와 같은 출신이었으면 진작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만해. 보기만 해도 열 받는다니까.’

“내 유능한 부하가 큰 외상을 입었소.”

거래를 마치자, 육장봉은 온 목적을 순순히 말했다.

“그렇다면 대장군을 더는 붙잡지 않겠습니다.”

월령안은 몸을 일으키고, 아까처럼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대장군께서 짬을 내어 저를 보러 와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답례를 드리고자 하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월령안은 말이 끝나자마자 하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하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하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물러갔다.

육장봉은 그녀가 답례로 주는 것이 설옥고임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유감스러운 감정이 눈을 스쳐 지나갔다.

‘월령안은 참 훌륭하군. 일 처리도 내 마음에 들고. 아깝구나.’

* * *

육장봉이 떠난 뒤, 월령안은 침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바로 하인을 시켜 수횡천을 불러왔다.

수횡천은 하인에게 육장봉이 방금 왔다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화청에 들어서자마자 상냥하게 물었다.

“육장봉이 괴롭히지는 않았지?”

“아니에요.”

월령안은 머리를 저었다.

“육장봉이 제게 부탁할 게 있었더라고요. 광원사의 일은 넘어가기로 했어요. 더는 추궁하지 않을 거예요.”

육장봉이 추궁하고 싶더라도 그녀의 잘못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 주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네게 부탁을 했다고?”

수횡천은 월령안의 아랫자리에 앉는 한편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그 사람이 네게 부탁할 때도 있어?”

‘육장봉은 줄곧 안하무인에,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던가. 웬일로 월령안에게 부탁까지 했지? 월령안의 돈 말고, 육장봉이 부탁할 게 또 뭐가 있지?’

육장봉이 돈이 모자라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수횡천보다는 돈이 많았다.

“설옥고요.”

월령안이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지난 삼 년간 육장봉을 위해서 했던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혹시라도 육장봉이 눈먼 칼에 맞을까, 전장에서 다칠까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온갖 수를 다 써가며 거금을 들여 약왕 손불사를 회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불사를 회유하지 못했더라면 그가 만든 설옥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처럼 육장봉이 그녀에게 머리를 숙일 일도 없었다.

육장봉이 어두운 얼굴로 그녀가 제시한 조건을 승낙할 때, 얼마나 통쾌했는지!

‘육장봉 당신도 오늘 같은 날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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