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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26)화 (126/1,004)

126화 설옥고는 길가에 널린 배추가 아닙니다

사부인은 어떡해서든 육장봉의 손에서 돈을 얻어내야만 했다. 사부인의 동생이 목숨을 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육씨 가문에서 그 돈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육장봉뿐이었다. 육장봉이 거절하면 누가 주겠는가.

“사부인!”

겁에 질린 시위는 연신 뒷걸음질 쳤다. 더는 다가서지 못했다.

“육장봉! 이 독한 놈!”

사부인은 장군부 문가에 서서 점점 멀어져 가는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큰 결심이나 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

“육장봉! 남들한테 웃어른을 핍박해 죽였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십만 냥을 내놔라. 아니면 육씨 저택 앞에서 머리를 박고 죽어 버릴 테니까!”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사부인은 한쪽 계단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사부인, 안 됩니다!”

시위는 깜짝 놀랐다. 사부인이 이렇게 독하게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서둘러 말렸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쿵!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사부인의 머리는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땅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육장봉!”

사부인은 잠깐 휘청거리다 까무러치고 말았다.

시위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 황급히 다가가 사부인이 숨이 붙어 있는지부터 살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육장봉은 말을 타고 이미 멀어졌다. 사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시 멈칫했다. 육이가 당장 앞으로 다가서며 보고했다.

“대장군, 사부인께서…… 계단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죽었느냐?”

육장봉이 냉정하게 물었다.

“힘껏 박지 않아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육이는 대답하면서도 다행이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부인도 정말 막무가내로군. 진짜 죽기라도 하면 장군에게 오명을 씌우는 꼴이 아닌가. 그럼 나중에 장군과 비우 도련님이 서로 어떻게 얼굴을 보고 살겠어?’

“사부인을 넷째 집으로 돌려보내거라.”

육장봉은 냉랭한 표정으로 분부했다. 그는 사부인이 목숨으로 협박했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비우 도련님한테는…….”

육이가 난감한 듯이 말했다.

사실 문제는 사부인보다 비우 도련님이었다.

사부인은 온통 못난 동생 생각뿐이었다. 그 못난 동생 때문에 넷째 집안의 모든 재산을 거덜 냈다. 심지어 비우 도련님의 예물을 장만할 돈과 큰아가씨의 혼수마저 날려 먹었다.

이번에는 들어보니 목숨이 달린 일인 듯싶었다. 사부인이 장군한테서 거절당했으니, 비우 도련님을 협박할 게 뻔했다.

“육비우한테 전해라. 나한테는 돈이 없다고. 제 어머니가 딱하거든 월령안한테 가서 돈을 빌리라고 해라. 월씨 가문에는 돈이 많으니까.”

육비우를 혼내 줘야 할 때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장군부만 믿고 뭐든 제멋대로 해도 되는 줄 알 것이다.

여기는 변경이다. 발에 채는 게 황족이나 권문세가였다.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월령안도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아무것도 없는 육비우가 무슨 자격으로 제멋대로 굴 수 있겠는가.

“네, 장군.”

육장봉이 해결 방법을 제시하자, 육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장 사부인을 집으로 모셨다. 동시에 육장봉의 말도 육비우에게 전했다. 이제 육비우가 어떻게 할지는 그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 * *

비록 사부인이 길을 막긴 했지만, 육장봉 일행은 평소대로 진시(辰時 – 오전 7시~9시) 전에 군영에 도착했다.

군영에 들어서자마자, 한 병사가 서둘러 달려오더니 신속하게 보고했다.

“대장군, 나(羅) 장군이 아침 훈련 중에 실수로 병기에 찔렸습니다. 복부를 찔렸는데, 군의관의 말로는 목숨이 위험하니, 설옥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대장군께서 약을 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기(羅技)가?”

육장봉이 눈썹을 찌푸렸다.

“네. 나기, 나 장군입니다.”

병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육장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육이에게 눈짓을 했다.

“설옥고를 내어 주어라!”

“어……!”

육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옥고는 길가에 널린 배추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장군께서는 설옥고에 대해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느냐?”

육이의 이상한 표정을 보자,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다시 눈짓을 했다.

육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실대로 말했다.

“장군, 설옥고는…… 없습니다. 다 썼습니다.”

일전에 장군이 밤을 틈타 북요의 도성을 탐색하려다 중상을 입었다. 이 일은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며칠 내내 육장봉은 오로지 설옥고에 의존해서 버텼다. 변경에 돌아온 뒤에도 하루빨리 상처를 아물게 하느라 계속 설옥고만 썼다.

예전 같았으면 걱정할 게 없었다. 변경에서 군대로 두 달에 한 번씩 설옥고를 보내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월령안이 설옥고를 보내 줄 리가 없었다. 설령 보낸 준다고 해도 받을 염치가 없었다.

설옥고를 쓰기만 했을 뿐, 더는 받은 게 없었다. 그러니 이제 동이 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설옥고를 사 오너라.”

“약왕 손불사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저희가 바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육이는 대답을 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손불사를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팔지는 미지수였다.

손불사는 성격이 괴팍했다. 특히 조정과 관련된 사람을 싫어했다. 아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손불사는 조정 사람들은 절대로 치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월 낭자가 손불사를 어떻게 설득해 설옥고를 샀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손불사를 찾아가면 분명 살 수 없을 텐데.’

“그럼 가서…….”

육장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말했다.

“됐다. 내가 한번 다녀오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기가 정말로 우연히 다쳤는지, 아니면 누군가 손을 쓴 건지 조사해라.”

한 달 뒤면 북요의 사절단이 변경에 도착한다. 변고가 없으면 쌍방은 소규모의 비무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이는 북요에서 사전에 제안한 행사였다. 말로는 육장봉의 수하 병사들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북요에서는 비싼 ‘속수지례(束脩之禮 – 옛날 제자가 스승을 모실 때 드리는 예물)’까지 덧붙였다.

진 쪽에서 한 수 배우겠다는데 이긴 쪽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되레 북요를 두려워하는 꼴이 될 것이다.

황제는 이 요청을 승낙했다.

그래서 육장봉은 최근 한 달 동안 성 밖에서 병사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바로 한 달 뒤, 북요인들이 ‘가르침을 청할’ 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나기는 무예가 뛰어났고, 단독 전투에도 강했다. 육장봉이 비무에 내보내려고 점 찍어 둔 이로, 요즘 중점적으로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실수로 병기에 다쳐 목숨이 위험해졌다.

만약 야율제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육장봉은 이 일을 단순한 사고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야율제가 때마침 변경에 나타났다. 게다가 어제는 성 밖에서 발견되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다. 육장봉은 더욱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육이는 엄숙한 표정이 되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러한 점들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육장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등 뒤에 있는 육일에게 말했다.

“육일, 나와 입성하자.”

육일이 대답하고, 곧 육장봉의 뒤를 따라나섰다.

“장군, 저…… 저도 가도 되겠습니까?”

맨 끝에 서 있던 육십이는 결국 참지 못했다. 묵묵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따라나서려고 애썼다.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추고 육십이를 바라보았다.

“가서 뭐 하려는 거냐?”

“월 낭자가 다쳤다면서요? 병문안을 가고 싶습니다.”

육십이는 육장봉의 싸늘한 눈을 마주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말꼬리는 거의 기어들어 갔다. 이제는 육장봉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육장봉은 육십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가버렸다.

“저…….”

육십이는 입을 열어 변명하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육십일이 그를 끌어당겼다.

“까불지 마. 장군께서는 지금 언짢으시다고.”

“그게 아니라, 그날 내가…….”

육십이는 서둘러 해명하려고 했다.

그날 성안으로 돌아올 때, 그 길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보고하지도, 가서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월령안이 그 길에서 습격당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부터 양심의 가책과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젯밤 내내 생각했다.

‘만약 그때 내가 말을 했거나, 한 번 확인이라도 했다면, 월 낭자는 다치지 않았을 거야.’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잘못을 되돌리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알아. 근데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건 장군이 걱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은 친위대일 뿐이다.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육십이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잠깐 보고만 오면 안 될까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가서 일이나 해라!”

이번에 육십이를 꾸짖은 사람은 엄숙한 표정의 육이였다.

육십이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똑바로 섰다.

“네, 둘째 형님!”

육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각자에게 임무를 주었다.

“넌 십일과 함께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나기가 오늘 아침에 훈련했던 장소를 에워싸라!”

“셋째, 넷째. 너희는 주위에 무슨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라.”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넷은 오늘 아침 훈련에 참여했던 사람과 병기를 점검했던 사람 전부를 데려가서 심문해라.”

“아홉째, 열째. 둘은 병기 창고를 한 번 조사해라.”

육이가 일일이 명령을 내리자, 나머지 호위병은 당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군대를 통제하고, 나기 부상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육이가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알았기에, 육장봉은 전적으로 맡기고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 * *

육장봉은 육일을 데리고, 성안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갔다.

육일은 육장봉이 곧바로 월씨 저택으로 말을 모는 것을 보더니,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장군, 월 낭자가 어제 성 밖에서 다쳤습니다. 이렇게 다짜고짜 방문하지 말고, 선물을 준비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려면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 육 장군이 신분과 지위가 높다 해도, 월령안에게 손을 벌리는 처지에 자세가 너무 거만해서는 안 됐다.

육장봉은 고삐를 당기려던 손을 잠깐 멈칫했다. 살짝 힘을 주어 말을 세웠다.

“가라, 예물을 후하게 준비해라!”

월령안은 정말 운이 좋았다. 때마침 그가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긴 것이다.

‘이제 월령안이 나에게 사람 노릇을 하는 법을 가르치려 들려나? 돈만 있으면 정말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였군.’

이제는 광원사에서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고 나무랄 수 없게 되었다. 도리어 그가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고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네, 장군.”

육일은 자기가 움직이는 대신, 으슥한 곳에 숨어 있는 암위에게 손짓을 했다. 후한 예물을 준비해 월씨 저택으로 보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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