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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25)화 (125/1,004)

125화 장식품을 모두 치워라

조계안은 강렬한 불빛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손으로 눈앞을 가리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반반, 그만해라! 이러다 내 눈이 다 멀겠구나!”

“전하, 고정하십시오. 황공합니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폐하께서 황궁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빨리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이반반은 조금도 성내지 않았다. 웃는 낯으로 연신 달랬다.

“됐다, 그만해라!”

조계안은 짜증스럽게 이 대태감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리고 육장봉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넌? 나와 같이 입궁하지 않을 거야?”

“아니, 난 집으로 갈 거다.”

육장봉이 머리를 저었다.

야율제와 조계안이 맞붙었으니, 분명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 실마리를 따라 조사해야 했다.

조계안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뽐내듯 웃었다.

“알았다. 난 궁으로 돌아가지. 너도 일찍 집으로 들어가라.”

‘역시, 육장봉은 온통 나랏일만 생각하고, 월령안을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을 줄 알았지.’

조계안은 더는 머무르지 않았다. 말을 몰아 그를 마중 나온 사람들과 함께 궁으로 돌아갔다.

육장봉은 조계안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절레절레 머리를 젓고, 친위대를 거느리고 장군부로 돌아갔다.

장군부는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새 장식품들도 들였고 배치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이틀 전까지는 육장봉의 눈에도 괜찮아 보였다. 지금의 장군부는 월령안이 꾸민 것만큼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넘어가 줄 만 했다.

하지만 오늘 저녁 장군부에 들어선 순간, 육장봉은 실내 장식이 눈에 거슬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서재에 이르러서도 찌푸린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서재에 들어서기 전, 육장봉은 걸음을 멈추었다.

“육이, 어서 장군부의 장식품을 모두 치워라. 내 저택에는 이런 실용성 없는 것들은 필요 없다.”

“네, 장군.”

육이는 잠깐 어안이벙벙했다. 겨우 반응해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육장봉이 서재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뒤에 있던 육삼, 육사 등과 서로 바라만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군은 왜 저러신대?’

‘전에는 분명 아무 말씀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장군부의 장식품을 치우라고 하시지?’

‘왜 실용성이 없다고 하지?’

‘변경에 막 돌아왔을 때는, 집사한테 심혈을 기울여 꾸몄다고 칭찬까지 했었잖아.’

‘혹시 이번에는 월 낭자가 꾸민 게 아니라 그런가?’

“멍하니 뭐해? 빨리 움직이자.”

육사가 앞으로 다가와 육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별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한밤중에 장군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까지 자지 못하게 하다니. 우리는 도대체 뭘 잘못한 걸까?’

‘광원사의 일은 우리가 잘못 처리한 것도 아니잖아. 장군도 너무 옹졸하셔.’

육일을 제외하고, 육십이를 포함한 나머지 호위병 열한 명은 그러려니 하며 움직였다. 장식품을 창고로 도로 내가고, 다보격과 진열대도 전부 치웠다.

서재 안.

육장봉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암위를 불러냈다.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야율제가 어쩌다가 조계안과 맞닥뜨렸느냐?”

조계안이 그보다 먼저 광원사에 가겠답시고 설친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야율제가 가까운 교외에 있었다고 한들, 경솔하게 출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감히 조계안과 싸운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이곳은 변경이고, 그들의 세력 범위였다.

조계안과 야율제가 성 밖에서 만난 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었다. 싸우게 되었다는 것은 더욱더 예상 밖이었다.

“장군께 아룁니다. 저희 쪽이 먼저 야율제의 행적을 발견했습니다. 곧이어 조왕의 부하들이 추격해 왔고요. 그들이 공을 채가려고 다투는 바람에 야율제에게 발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접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암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자기들이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암위가 말하지 않는다고, 육 대장군이 짐작하지 못할 리도 없었다.

육장봉이 칼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암위를 보았다.

“잔머리는 집어치워라. 야율제는 보통 놈이 아니다.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알았느냐?”

자신이 먼저 광원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암위들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조계안도 아니었다. 유치하게 누가 먼저 도착했는가 하는 문제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암위는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것만 느껴졌다.

장군이 육이에게 저택의 장식품을 치우라고 명령하는 것을 문가에서 보았다. 장군이 그들에게까지 화풀이를 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그들은 화를 피했다.

“야율제는 지금 어디 있느냐?”

육장봉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다. 얼굴이 어둠 속에 가려졌다. 그는 손을 탁자 위에 얹어 두고 이따금 가볍게 두드렸다.

야율제가 갑자기 변경에 나타났다.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화 회담을 시작하기 전, 야율제가 미리 변경에 잠입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장군, 우리 사람들이 야율제를 미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놈이 청희(晴熙) 장공주(長公主)의 성 밖 별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을 할 때는 어조가 평소보다 많이 떨렸다. 사실 그들도 매우 놀랐었다.

“청희 장공주? 내가 기억하기로는 영녕후부(永寧侯府)의 세자 부인이었는데.”

육장봉은 탁상을 두드리던 동작을 순간 멈추었다. 슬쩍 감고 있던 눈도 번쩍 떴다. 마치 잠을 깬 호랑이처럼 순식간에 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청희 장공주는 황제의 고모이자, 육장봉의 아버지가 사모했던 여인이었다. 야율제의 아버지가 한마음으로 바라보던 화친공주였다. 그리고 그의 생모가 북요에 화친하러 갈 수밖에 없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맹세를 강요했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청희 장공주에게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그도 아버지와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 청희 장공주가 화를 자초했다. 이번 일은 그의 개인적인 일과 상관이 없었다.

암위는 깜짝 놀라 무릎을 꿇을 뻔했다.

“맞습니다. 청희 장공주이십니다!”

“황실에 연관된 일이로군. 우리는 개입할 필요가 없다. 이 소식을 조왕에게 넌지시 귀띔해 주어라. 너희의 흔적은 지워 버리고, 알겠느냐?”

육장봉의 말투가 이렇게 무거웠던 적은 없었다.

암위는 사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서둘러 정신을 다잡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장군.”

“물러…….”

육장봉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제! 월령안이 습격당한 건, 어찌 된 일이냐?”

육장봉은 원래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모가 떠올랐다.

전날 월령안 습격 사건은 마침 조정에서 야율제의 행적을 발견한 사건과 맞물렸다. 만약 월령안을 습격한 범인들이 북요와 연관이 없었다면, 암위도 조사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육장봉이 묻자, 암위는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장군, 저희가 조사한 데 따르면 월 낭자가 습격당한 일은 북요와는 무관합니다. 소 승상의 짓거리입니다. 심씨 가문에서는 심민이 자기들을 고발할 때 월 낭자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 승상을 통해 알게 된 모양입니다. 그놈들이 소 승상의 암시 하에 사람을 사서 월 낭자를 죽이려 했던 겁니다. 심씨 가문에서 하필 그 자객들을 찾은 건 완전히 우연입니다.”

마침 그 자객들이 야율제와 함께 변경에 왔다. 그들의 표면상의 신분은 살인과 약탈로 먹고사는 강호의 무뢰한이었다. 심씨 가문이 그들을 찾은 것은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사실대로 폐하께 보고해라.”

소 승상은 요 몇 년간 제멋대로 날뛰었다. 무슨 돈이든 가리지 않고 벌어들였다. 황제는 이 일이 우연의 일치라고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네, 장군.”

암위는 대답했다.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육장봉을 훔쳐보았다. 그는 주저했지만, 결국 월령안의 상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육장봉도 월령안의 일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냉정하게 암위를 내보냈다.

* * *

이튿날 아침 일찍, 육장봉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 식사를 하고 성 밖으로 훈련을 나가려고 했다. 막 문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허겁지겁 달려 나온 사부인이 길을 막았다.

“장봉아!”

사부인은 육장봉이 나오는 것을 보자, 그가 앞으로 다가서기도 전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연이어 머리를 조아리며 울며불며 애원했다.

“장봉아, 네 외숙부가 사고를 쳤구나. 십만 냥이 있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대! 이 숙모가 이렇게 무릎을 꿇을 테니까, 나한테 십만 냥만 빌려다오. 사람 목숨부터 좀 구해야겠구나!”

사부인은 말하는 와중에도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순식간에 이마에 피가 배어 나왔다.

“사부인을 부축하거라.”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섰다.

“사부인, 어서 일어나십시오!”

장군부의 시위가 재빨리 앞으로 나갔다. 사부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사부인은 억지를 부려, 죽기 살기로 무릎을 꿇으려 했다. 쉰 소리로 울고불고하며 연신 애걸했다.

“장봉아, 이 숙모가 빈다. 딱 십만 냥이야. 숙모한테 십만 냥만 주면 돼. 더는 필요 없어. 나한테 빌려주는 셈 치면 되잖니? 네 넷째 숙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사람이 없단다. 나도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어. 그래서 이렇게 너한테 비는 거야……. 장봉아, 숙모가 이렇게 빌게……!”

사부인은 어쨌든 육씨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인 부인이었다. 게다가 칠품 칙명(勅命)을 받은 몸으로, 남편은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영웅이었다.

그래서 시위도 감히 거칠게 대하지는 못했다.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기만 했을 뿐, 입을 막지는 않았다.

육장봉은 사부인을 흘끔 보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사부인을 집으로 모시고 가서 육비우에게 처리하라고 해라. 그리고 이런 일이 다음번에는 없기를 바란다고 전해라.”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사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바로 말에 뛰어올라 채찍질하여 가 버렸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게 월령안이 보복한 것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육비우의 노름꾼 외숙부가 끝내 사고를 친 것이다. 사부인도 이제 더는 제 동생이라는 밑 빠진 독을 막을 힘이 없었다.

“네, 장군.”

시위는 명령을 받자 더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사부인을 억지로 끌고 갔다.

사부인은 육장봉의 말을 듣자, 사색이 되어 큰 소리를 질렀다.

“대장군, 대장군……. 넷째 숙모가 이렇게 빌겠네! 십만 냥만! 더는 필요 없다고. 더 많이 달라고 하지도 않겠다니까!”

육장봉은 이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며, 말을 몰고 떠났다.

“육장봉! 고작 십만 냥도 숙모에게 빌려주지 못하겠단 말이냐? 네 눈에는 도대체 이 숙모가 있기는 해? 네 외숙부가 죽는 꼴을 봐야겠느냐?”

육장봉이 점점 멀어지자, 사부인은 절망에 빠져 대성통곡했다.

그녀는 미친 여자처럼 버둥거리며 시위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가 없자, 이번에는 자기 옷을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건드리지 마! 또 건드렸다가는 이 옷을 홀딱 벗어 던져서 네놈들이 날 모욕했다고 고발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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