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뼛속까지 오만으로 가득 찬 사람
월령안은 조계안이 넘보아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다른건 제쳐두고 생각하더라도 황제가 극구 반대할 것이다.
황제가 비록 조계안을 아끼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일단 한 나라의 군주였다. 그다음에야 누군가의 형님이 될 수 있었다.
누구든, 어떤 일이든 강산과 종묘사직보다 더 중요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자신이 괴로움을 당해도 참을 수 있었다. 강산과 종묘사직, 혹은 나라의 강성을 위해서라면 희생조차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누구든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조계안이 월령안을 가까이했다가는, 월령안과 자신을 해칠 뿐이었다.
“난 내가 무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조계안의 눈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의 온몸에서 사람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육장봉은 그를 흘끔 바라보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조계안도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는 내내 잔뜩 긴장된 분위기였다. 금방이라도 곧 싸울 것만 같았다. 뒤따르던 친위대도 깜짝 놀라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남은 길이 멀지 않았다. 일행은 곧 광원사에 도착했다.
친위대 열두 명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광원사에서 싸우지는 않겠지?’
* * *
육장봉과 조계안은 어둠이 내려앉은 다음에야 광원사에 도착했다. 광원사는 이미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지민 스님이었다.
지민 스님은 육장봉을 보자 불호를 읊더니,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말했다.
“육 시주, 늦으셨습니다! 사조께서는 행각을 떠났습니다.”
“행각?”
육장봉의 눈빛이 삽시간에 예리해졌다.
“혜능 대사께서 오늘 무슨 일을 하셨나?”
혜능 대사는 행각을 마치고 며칠 전에 돌아왔다. 그도 어제야 혜능 대사를 만났다. 그때 행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게다가 혜능 대사는 그가 오늘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행각을 떠났다니. 분명 그를 피하려는 뜻이었다.
“사조께서는 오늘 한 여시주를 만나 보신 후 행각을 결정하셨습니다.”
지민 스님이 매우 요령 있게 대답했다.
“여시주는 언제 왔었고, 지금은 어디 있소?”
묻지 않아도 지민 스님이 말하는 여시주가 곧 월령안임을 알 수 있었다.
“여시주는 어제 폭우를 무릅쓰고 중상을 입은 몸으로 사찰이 문을 닫기 직전에 왔었습니다. 사찰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두 시진 전에 떠났습니다.”
지민 스님은 육장봉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사조께서 떠나시기 전에 그 여시주가 사찰에 거금을 시주해서 광원사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민 스님은 그녀를 위해 될수록 좋은 말을 해 주기로 했다.
“중상? 심하게 다쳤는가?”
조계안은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민 스님을 바라보는 어두운 눈빛에서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민 스님은 고개를 들어 조계안을 힐끗 보았다. 또 한 번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시주, 그 여시주의 상처가 가볍지는 않으나, 생명의 위험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시진 전에 하산했으니, 아마 지금쯤은 의원을 찾아가 치료하고 있을 겁니다.”
“여시주는 낮에 어디에 갔었소?”
육장봉이 물었다.
그는 월령안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포기할 여인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영리하고 일 처리도 잘했으며, 눈치도 빨랐다.
월령안이라면 다음 기회를 잡기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월령안이 깔끔하게 하산했다. 게다가 혜능 대사도 갑자기 떠났다. 혜능 대사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월령안이 어머니에게 제사를 지내게 해 주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분은 낮에 서탑에 갔었습니다.”
지민 스님은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육장봉은 그 대답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저 표정만은 더욱 차가워졌다.
“잘났군!”
‘월령안은 과연 능력이 넘쳐나는군. 내가 뻔히 보는 앞에서도 감히 수작을 부리다니! 내가 너무 얕잡아 봤구나!’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 소매를 확 떨치며 자리를 떴다.
막 두어 걸음을 옮겼는데, 조계안이 막아 나섰다.
“육 대장군, 온 김에 월령안의 어머니께 향이라도 올리고 가는 게 어떤가? 아까 소 승상은 사람을 보고 손을 쓴다지 않았나? 네가 직접 오지 않았다가, 소 승상이 꿍꿍이라도 꾸미면 어떡해?”
조계안은 육장봉이 뻔히 사심이 있으면서도 공평무사한 척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오늘은 기필코 그의 치부를 들춰낼 심산이었다.
“조왕 전하께서 계시는데 소 승상이 어찌 감히 설치겠습니까?”
육장봉과 조계안이 동시에 왔다. 소 승상이 조금만 머리가 돌아간다면,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에는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소 승상이 다른 건 몰라도,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갔다.
“말만 번지르르하긴!”
조계안은 피식 웃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육 대장군, 인정하지 그래! 월령안을 괴롭히는 건 네 사심 때문이라고!”
육장봉이 차갑게 물었다.
“제게 사심이 있건 없건, 조왕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심?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저 이 기회를 빌려 월령안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은 것뿐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으니, 좋은 잔머리만 믿고 술수만 부리지 말라고 알려 주려는 것뿐이었다.
절대적인 권세 앞에서는, 그녀가 믿는 금전과 재능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조계안은 언짢아서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장봉, 사내대장부가 돼서 좀 대범하면 안 되나? 월령안은 네 사촌 동생에게 쫓겨나고도, 너희 육씨 가문을 찾아가 복수하지 않았어. 그 못난 동생 때문에 맨날 월령안을 괴롭힐 필요가 있나?”
“내 일이다. 너와 무슨 상관이냐?”
조계안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만 해 대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계속 월령안을 괴롭히겠다고?”
조계안은 육장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월령안이 도대체 네 어딜 건드린 거야? 왜 그렇게까지 물고 놓지 않는 건데?”
조계안도 육비우의 일을 일부러 들먹였다.
육장봉이 그렇게까지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조계안도 월령안이 육비우를 골탕 먹인 일 때문에 보복하고, 못살게 굴었던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육장봉은 부인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이렇게까지 월령안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니. 조계안으로서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의 훌륭함은 그가 먼저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훌륭함이 마냥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알아차린 것처럼, 육장봉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내게 월령안을 지켜보라고 강요한 게 아니었나?”
육장봉은 조계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내가 언제 네게 강요했다고?”
조계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육장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철광산.”
“철광산 때문에 일부러 월령안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고?”
조계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상하다는 듯이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돌을 들어 내 발등을 찍은 꼴이잖아?’
“그게 아니면?”
육장봉은 군대에 있는 병기에 손을 썼다. 황제가 월령안이 제공한 병기는 금나라에서 밀수한 것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월령안이 지난 삼 년간 변방에 제공한 병기가 금나라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황제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른다. 월령안의 수중에는 정말로 철광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강산과 종묘사직에 관련된 일이었다. 반드시 확실하게 조사해야 했다.
만약 월령안에게 철광산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바치게 해야 했다.
“네가 동의해야만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한 것도 철광산 때문이었어?”
조계안은 갑자기 힘이 빠졌다. 자신이 육장봉을 오해한 것 같았다.
“넌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나는 월령안의 콧대를 좀 눌러 주려고 한 것뿐이다. 그 여자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설쳐대면서,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잖나.”
월령안은 온화하고 고집도 없어, 세도가 앞에서는 쉽게 수그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상 상대해 보면, 그녀는 겉모습만 나약해 보일 뿐이다. 실제로는 뼛속까지 오만으로 가득 찬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리함과 재능, 월씨 가문이라는 출신, 자신의 돈 버는 재간, 손에 쥔 거액의 재산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부터 뼛속까지 모두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 딴에는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며, 남들 앞에서는 사람 좋게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금만 눈썰미가 매서운 사람이라면, 그녀의 오만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오만방자하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자신이 잘난 줄로만 알았다.
철광산 건만 놓고 봐도 그랬다. 분명 빈틈이 수두룩하건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사실상 월령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일은 그녀도 모르는 새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월령안이 솔직해지게 하려면, 우선 그녀의 오만방자함을 눌러야만 했다. 그녀의 자신감을 부수고, 대쪽 같은 성격을 꺾어야 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일 전부를 장악할 수는 없음을 알게 해야 했다.
만약 그녀가 안정감을 바란다면, 더욱 듬직한 뒷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육장봉 같은 사람 말이다.
“칫! 결국, 네가 속이 좁은 거잖아.”
육장봉의 말에 조계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육장봉의 마음속에 아직은 나랏일뿐, 남녀 사이의 정 같은 건 없었다. 월령안의 훌륭함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도 한시름 놓고 원래의 계획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 * *
육장봉과 조계안이 성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성문은 닫힌 지 오래였다. 성안도 야간 통행금지였다. 보통 사람은 성안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러나 육장봉도, 조계안도 이런 규칙의 제재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육이가 앞으로 나아가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육장봉과 조계안은 곧장 한쪽의 작은 문으로 입성했다.
기분이 좋은 조계안은 입성하자마자 고개를 외로 꼬더니 육장봉에게 놀림조로 말했다.
“육 대장군, 준비를…….”
“전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조계안의 말은 내관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에 뚝 끊겼다.
조계안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 곁의 이반반(李伴伴)이 훤한 데 서 있다가 다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전하, 폐하께서는 전하가 성 밖에서 야율제와 싸웠다는 소식에 줄곧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아직 침수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어서 빨리 폐하를 뵈러 가시지요.”
이반반이 다가오자, 그가 거느린 사람들도 등롱이며, 횃불을 들고 다가왔다. 육장봉과 조계안의 주위는 대낮처럼 환해졌다.
“대장군!”
이반반이 육장봉을 보더니 서둘러 예를 올렸다. 다시 등롱을 들어 조계안을 비춰 보았다. 그가 멀쩡하게 말에 타고 있자 기뻐서 소리쳤다.
“전하,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폐하께서 온종일 걱정하셨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