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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22)화 (122/1,004)

122화 남의 뒤꽁무니를 따르기는 싫거든

수횡천도 월령안이 온 것을 보았다. 그러나 잠깐 뒤돌아보며 말했을 뿐이다.

“령안아, 옷 버리니까 가까이 오지 말고 저쪽에 서서 잠깐 기다려……. 마차에 물기만 닦아내면 금방 떠날 수 있어.”

“좋아요. 오라버니,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월령안도 재촉하지 않았다. 한쪽에 서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일각이 지나자 말이 풀을 다 뜯었다. 낡고 더러워진 마차도 수횡천이 말끔하게 닦아 놓았다. 특히 마차 안에 놓인 들꽃 한 바구니가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월령안이 마차 안의 들꽃을 보자, 수횡천은 조금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마차가 어제 비를 맞고 하룻밤을 묵었더니, 오늘 말리긴 했지만, 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더구나. 사찰 밖에 들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니까 아가씨들이 꽃을 좋아하던 게 생각났어. 좀 꺾어다 안에 두면 냄새도 없애고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저도 아주 좋아해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월령안은 거칠게만 보이는 수횡천에게 이렇게 세심한 구석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역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네가 좋다니 다행이네. 자…… 부축해 줄게. 어서 마차에 타.”

월령안이 좋아하자, 수횡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월령안이 사매처럼 꽃을 좋아하는 한편 조심성 없이 꽃을 죽였다고 나무랄까 두려워했었다.

‘손으로 꺾은 꽃과 가위로 자른 꽃이 도대체 뭐가 달라? 그리고 꽃을 꺾은 다음에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구분할 수 있단 말이야?’

다행히도 월령안은 사매처럼 그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월령안과의 접촉도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매 같은 여인은 하나로 충분했다. 그녀 하나로도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마차가 조금 높은 편이었다. 수횡천은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월령안을 부축해 주었다. 그녀가 확실하게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다음, 마차에 뛰어올라 말을 몰아 하산했다.

“령안아, 잘 앉아 있어.”

“네!”

월령안이 대답했다. 그녀는 마차 벽에 고개를 기대고, 창문으로 사찰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 * *

그 무렵 황궁.

어제 큰비를 무릅쓰고 돌아온 육장봉은 야율제가 변경에서 출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시 조계안과 만나 합동으로 야율제의 행방을 쫓았다.

하루 밤낮의 추적 끝에 변경에 있는 북요의 거점 두 군데를 발견했다.

그들은 사람을 거느리고 거점을 쓸어버렸다. 겸사겸사 실마리를 더듬어 변경에 수십 년간 잠복해 있던 첩자 수십 명도 함께 잡아냈다.

두 사람의 이번 협력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야율제는 놓치고 말았다.

야율제는 그들의 예상보다 기민했다. 수횡천과의 접전에서 행적이 발각되자,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조계안이 거느린 정탐꾼이 찾아낸 인물은 야율제의 대역이었다. 진짜 야율제는 행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하루 밤낮을 꼬박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때 황제가 보낸 소식을 받았다. 성 밖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에, 우선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형!”

“폐하!”

조계안과 육장봉이 앞뒤로 난각에 들어서며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예를 거두어라.”

황제는 손을 들어 올렸다.

“순천부윤의 보고가 들어왔다. 성 밖에서 여러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또 마차가 있었는데 월씨 가문 마차와 비슷해 보인다고 한다.”

“월씨 가문의 마차라고요?”

황제의 말에, 방금 자리에 앉았던 조계안이 벌떡 일어났다.

“어찌 된 일입니까? 월령안이 사고를 당했습니까? 아닐 겁니다! 어제 월령안은 제가 보낸 사람에게 잡혀, 성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텐데요?”

육장봉도 황제를 바라보며 의혹을 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계안의 말에 육장봉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조계안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어제 네가 사람을 시켜 월령안을 붙잡았다고?”

조계안은 육장봉의 눈빛을 받자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곧 당당하게 육장봉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문제가 있나?”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찔릴 게 뭐가 있어?’.

“어제 월령안이 나와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육장봉이 물었다.

“그러면 또 어때서?”

조계안이 냉소하며 되물었다.

“월령안한테는 멀쩡히 다리가 달렸잖아. 내가 묶어 놓은 것도 아니고, 자기가 성 밖에 너를 만나러 가기 싫었겠지.”

“월령안은 어제 성 밖으로 나갔다. 수횡천은 월령안을 찾으러 가는 길에 야율제의 행적을 발견했지.”

황제가 동정 어린 눈길로 조계안을 힐끔 보았다.

‘저런 못난 녀석!’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내 부하는…… 월령안이 성 밖에 나갔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조계안은 눈을 크게 뜨고 대경실색하여 황제를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어제 너는 줄곧 야율제의 행적을 조사했잖느냐. 아랫사람과 직접 만나 보기는 했느냐? 월령안의 행방을 물어는 보았고?”

황제가 되물었다.

조계안은 말문이 막혔다. 옷소매를 세차게 떨치더니,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하지만 앉자마자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다시 일어났다.

“황형, 월령안이 사고를 당했습니까, 안 당했습니까? 월령안이 야율제를 만난 건 아니겠죠?”

“월령안은 아마 수횡천이 구해 주었을 거다. 야율제를 만났는지는 짐도 모르겠구나. 순천부윤의 보고에 따르면, 살수들의 가슴팍에는 늑대 머리 문신이 있다고 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북요인들 말입니까?”

육장봉이 눈을 치뜨더니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강호에 섞여 들어갔다는 얘기입니까?”

“맞다. 짐은 야율제가 소리소문없이 변경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게 강호인들과 연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강호는 너무 커. 그런 데다가 강호인들은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으니, 관아에서도 관리하기 힘들다. 관아에서도 사실상 그들을 어쩔 수가 없지. 짐은 너희가 강호에 섞여들어, 강호인들이 일을 저지르지 않게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야율제가 갑자기 변경에 나타났는데도 아무도 몰랐던 이번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황제가 행적이 묘연한 강호의 협객들에게 불만을 품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직접 손을 대지 않고 회유 정책을 썼을 뿐이다. 그저 그들이 조정과 백성을 위해 활동하기를 바랐다.

아직까지는 효과가 괜찮은 편이었다. 수횡천 같은 대협은 모두 법과 규칙을 잘 지켜 황제도 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교화가 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기도 했다.

황제에게는 월령안이 습격당한 사건 따위는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죽이려던 살수가 북요와 연관이 있으니, 더는 사소한 일로 취급할 수 없었다.

“장봉아, 이 일은 네가 조사하거라.”

황제가 엄숙하게 말했다. 육장봉은 자기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이 사실상 북요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북요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야 했다. 그리고 실질적인 증거를 찾아내어, 북요에서 반박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네, 폐하.”

육장봉이 대답했다.

조계안은 육장봉을 흘겨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황형, 월령안은 제 사람입니다. 북요인들이 습격하여 죽이려 했으니 저와 관련된 일입니다. 이 일은 제가 조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북요인들이 월령안을 죽이려 한 게, 수횡천이 야율제의 행적을 폭로했기 때문일까? 북요인들이 수횡천을 어쩌지 못하니까 대신 월령안에게 분풀이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황제는 조계안을 언짢게 노려보았다.

“그런 쓸데없는 구실은 갖다 붙이지 마라. 짐도 머리 쓸 줄 안다.

수횡천은 야율제의 행적을 발견한 다음 성 밖에서 월령안을 구했다. 하지만 시간으로 추정해 볼 때, 월령안이 먼저 습격을 당했고, 야율제의 행적이 폭로된 건 그다음이다. 즉, 북요인이 월령안을 죽이려 한 건 야율제의 행적이 드러난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이 둘은 별개의 일이다.

너는 야율제만 조사하면 된다. 월령안이 습격당한 일은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월령안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아우는 경중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녀의 능력이 뛰어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어리석은 아우가 절대 그녀를 만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월령안은 제 사람입니다.”

조계안이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황제가 조계안을 한껏 노려보았다.

“경기(京畿 – 수도 및 그 근교 지방)의 안전은 짐이 장봉이에게 맡겼느니라.”

“폐하, 조왕 전하가 조사하고 싶어 하시니 전하에게 맡기십시오. 북요에 관련된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많으면 진실을 하루빨리 조사해 낼 수 있을 겁니다.”

육장봉이 일어서며 말했다.

조계안이 조사하고 싶다면 하게 내버려 두는 게 나았다. 그가 승낙하지 않는다고 해도, 조계안이 사적으로 참견할 게 뻔했으니까. 훼방을 놓는 꼴을 보느니, 일을 많이 시키는 게 훨씬 나았다. 게다가 여차하면 그에게 과실을 대신 떠넘길 수도 있었다.

“장봉아, 저 녀석은 신경 쓰지 마라. 한가해서 저러는 거다.”

황제는 조계안에게 조용히 눈을 부라리며 적당히 하라고 눈치 주었다.

조계안은 못 본 체했다. 육장봉에게 공수를 하면서 심술궂게 말했다.

“육 대장군, 함께 잘해 보세!”

육장봉은 조계안을 힐끗 보았다. 더는 거들떠보지 않고 황제에게 공수했다.

“폐하, 다른 일이 없으면 신은 먼저 출궁하겠습니다.”

“별다른 일은 없다. 어서 일들 보거라.”

황제도 육장봉이 바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물러가려고 하자, 황제는 하고 싶었던 말 몇 가지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야율제의 사건이 끝나고 다시 말하면 되지.’

“황형, 저도 가 보겠습니다.”

조계안도 육장봉의 뒤를 바로 쫓아갔다. 두 사람은 황궁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은 말을 묶어 둔 곳에 이르러 말에 올라탔다. 조계안은 말 등에 아무렇게나 타더니, 육장봉을 흘겨보았다.

“육 대장군, 서둘러 출궁하는 걸 보니 성 밖으로 갈 셈인가?”

육장봉은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채찍질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조계안이 그보다 한발 앞서 채찍을 휘둘러 쫓아갔다.

육장봉의 곁을 지나치며, 조계안은 잊지 않고 한마디 했다.

“마침 나도 성 밖에 가 보려고 했네. 나는 남의 뒤꽁무니를 따르기는 싫거든. 육 대장군, 이만 먼저 가 보겠네.”

조계안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냅다 앞으로 달려갔다.

“장군!”

육이를 비롯한 친위대들은 황궁 밖에서 육장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장봉이 말을 타고 나오자, 그들은 신속하게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

“장군, 월 낭자가 성 밖에서…….”

육이가 입을 열자, 육장봉이 손짓으로 중단시켰다.

“그 얘긴 나중에 해라.”

육장봉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찍질하여 달렸다. 하지만 조계안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조계안의 말이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여전히 원래 속도를 유지하며 성안을 달렸다. 성 밖으로 나가서야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조계안의 속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육장봉은 속도를 더 올리려는 생각이 없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일행은 관도를 벗어나 갈림길에 이르렀다. 광원사 방향으로 접어들려는 순간이었다. 육십이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다른 쪽 길을 가리켰다.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육장봉은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말머리를 돌려 육십이가 가리키는 길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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