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사람을 얼마나 사랑해야
상국사는 국찰(國刹)로 공양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월령안이 거금을 들여 불상에 도금해 준다고 하면, 상국사의 주지는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특히 월령안은 광원사와 상국사 중에서 상국사를 선택했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 상국사는 월령안의 공양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널리 알릴 게 뻔했다.
광원사는 성 밖에, 상국사는 성안에 있었다. 사실 두 사찰은 서로 다툼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옳았다. 그런데 언젠가 광원사 주지의 ‘상국사는 너무 속세에 물들었다’라는 한마디가 상국사 전체의 불만을 자아냈다.
그로부터 두 사찰은 원수가 되었다.
물론 두 사찰이 원수가 되었다고 해서 저잣거리 아낙네들처럼 아귀다툼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암암리에 겨루며 경쟁할 뿐이었다.
이 순간 월령안이 혜능 대사 앞에서 상국사를 거론한 걸 보면, 두 사찰 사이의 사연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로써 혜능 대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월령안의 이 수법은 상대적으로 온화했다. 그래서 혜능 대사는 마음속으로 알면서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만 지었다.
“월 시주,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관두자, 관둬!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수완이 뛰어나구먼. 내가 늙었구나.’
“대사께서 어제 말씀하시기를 고승께서 어머니를 위해 매일 경을 읊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대사께서 편의를 봐주시어, 게가 고승들과 함께 서탑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담벼락 때문에 길이 막히면, 그 담벼락을 피해 돌아가면 된다. 세상에는 길이 수없이 많았다. 그녀는 단 하나의 길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 월 시주는 돌아가서 기다리십시오. 한 시진 뒤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나가고 물러날 때를 잘 아는구나.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할 줄 아는군. 어쩐지…….’
혜능 대사는 그녀의 관상을 보았다. 장사를 하고 남의 이익을 빼앗아, 평생 순탄치 않고 파란이 끊이지 않을 팔자였다. 그러나 복과 인연이 닿으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복과 인연은 이런 식으로 스스로 만들어 낸 모양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뜻대로 되자 월령안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혜능 대사는 속세를 떠난 분이었다. 그런 사람과 만나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선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강하게 나가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게 나가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지금 이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월령안은 몸을 일으켜 작별을 고했다. 수횡천도 때맞춰 일어났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월령안과 함께 방 안에 앉아 있기만 할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기 전에 혜능 대사에게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떴다. 혜능 대사의 작은 처소를 벗어나자,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 성공했어요!”
“대단하다!”
수횡천은 줄곧 월령안을 따라다니며, 그녀가 혜능 대사를 어떻게 설득하는지를 모조리 지켜보았다.
월령안이 세심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잘 파악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였더라면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상국사와 광원사의 원한 관계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방법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에요. 얻어걸린 것뿐이에요.”
수횡천의 칭찬에 월령안은 조금 겸연쩍었다.
오늘 일은 분명 그녀의 운이 좋았던 것도 있었다. 다른 사찰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수횡천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네가 평소에 세심했으니까 그런 거지. 봐, 나 같은 사람은 상국사와 광원사 사이에 원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모르잖아.”
성공이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오늘만 해도, 월령안이 거금을 들여 혜능 대사가 타협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똑같은 방법을 썼더라면, 혜능 대사는 아마 곤장을 때려 쫓아냈을지도 모른다.
* * *
한 시진이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월령안은 같이 가 주겠다는 수횡천을 거절했다. 그리고 사찰의 사미승을 통해 인적이 없는 편전을 찾아 홀로 꿇어앉았다.
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서 지내는 제사였다.
상심이나 비애보다는 실망스러움, 그리고 마음속 집념을 이루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어머니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애달프지 않았다.
그녀가 매정하거나, 어머니를 원망해서는 아니었다.
십 년 전,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잃었다. 그 뒤로 언제든 어머니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칠 년 동안, 모녀 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다. 그때 어머니는 거듭 말했다.
‘령안아, 원래 이 어미는 네 아버지와 오라비의 뒤를 따라가야 했어. 내가 이리 살아 있는 것은 네가 자라는 걸 지켜보고 싶어서란다.
내 마음은 이미 죽었단다. 이미 네 아버지와 오라비를 따라 죽은 거야. 지금 살아 있는 건 다만 영혼이 없는 시체일 뿐이야.
령안아, 명심하렴. 내가 죽어도 서러워하지 말고 울지도 마. 기뻐해 주렴. 드디어 내가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만나러 갔다고.
넌 나와 달라. 나는 나약하고 무능해서 네 아버지와 오라비를 위해 복수할 능력이 없구나. 하지만 넌 할 수 있어. 그러니 꼭 살아야 해. 잘 살아야 한다. 아버지와 오라비의 몫까지 살아야 해.
령안아, 나는 기쁘단다. 드디어 네 아버지와 오라비와의 약속을 지켜줄 수 있게 되었어. 네가 커서 어른이 되고, 아무 탈 없이 시집도 가는구나. 이제 나도 네 아버지와 오라비를 만날 수 있겠구나.
령안아, 너도 기뻐해 주렴. 나는 이날이 오기만을 칠 년이나 기다렸어.
이 어미가 미안하다. 너만 남겨 두고 가게 되었구나. 앞으로는 오로지 너만 믿고 살아야 해. 하지만 령안아, 나는 더는 버티지 못하겠구나. 나를 탓하지 말아다오. 네가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야. 다만 네 아버지와 오라비가 너무나 보고 싶구나.
령안아, 앞으로…… 꼭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령안아…….’
그녀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유약한 여인이었다. 동시에 강인하고 과감한 면도 있었다.
십 년 전, 어머니는 그녀를 무탈하게 키우기 위해 소 승상에게 의연하게 재가했다.
어머니는 소씨 가문에 재가하던 그날,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영혼도, 마음도 모두 죽었다. 산송장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지옥 같았다.
그리하여 삼 년 전, 어머니는 그녀를 위해 육씨 가문과의 결혼을 추진해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육씨 가문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게 확실해진 순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유일하게 미련을 가진 사람이 그녀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녀를 잘 키워 시집보내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집가자,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곧 그녀를 남겨 두고 떠나 버렸다.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이야기 때문일까. 정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마음속에는 슬픔 외에도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라는 감회가 더 많았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도 더는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었다. 매일 어머니가 자신을 두고 떠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언제든 어머니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되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으니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영전(靈前)에 무릎을 꿇었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살아생전 어머니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죽음은 어머니에게는 해탈이라는 것도 알았다.
어머니가 죽지 않고서야, 소씨 가문에서는 어머니를 놔 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죽음이란 많은 이에게는 고통, 비애, 영원한 이별이지만, 어머니에게는 해탈, 희망, 그리고 상봉이었다.
소씨 가문에 있는 몇 년간 어머니는 아주 힘들고 어려웠다. 그녀로서는 어머니가 계속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월령안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길래,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희로애락, 안위, 의지, 감정을 모조리 무시하고, 가슴을 에는 고통을 참으며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길래, 유일한 딸자식이 혈혈단신 고아가 되어 험악한 세상에서 혼자 허덕이게 놔두고 그를 다시 만나러 갔을까.
사람을 얼마나 사랑해야, 그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을 십 년간 좋아했다.
하지만 평생을 가도 어머니처럼, 육장봉을 위해 살고 죽는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육장봉보다는 자신을 더욱 사랑했다. 자신을 아꼈던 아버지, 오라버니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낳아 키운 월씨 가문을 더욱 사랑했다.
월령안은 불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처님께, 그리고 자기 마음에 물었다.
안타깝게도 부처님이나 자기 마음이나 모두 답을 주지는 못했다.
* * *
어느덧 한 시진이 지났다. 사미승이 와서 월령안을 불렀다.
월령안은 몸을 일으켜 고맙다고 말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사미승은 그녀를 서탑의 대전으로 데려갔다. 곧 승려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법기(法器)가 들려 있었다. 선두에 선 큰스님이 월령안을 보자, 합장하고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월령안은 오른손을 움직일 수 없어 한 손으로 승려들에게 예를 행했다.
“월 낭자, 사조(師祖 – 스승의 스승)께서 분부하셨습니다. 다른 스님들과 함께 들어가시면 됩니다.”
사미승은 월령안에게 여러 고승을 소개하지 않았다. 맨 마지막 자리를 가리키며 그쪽에 가서 서라고 했다.
“고마워요. 혜능 대사께도 제가 감사한다고 전해 주세요.”
월령안도 알고 있었다. 혜능 대사가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그녀가 거금을 들여 불상을 새로 도금해서도, 광원사와 상국사 사이의 원한 때문도 아니었다.
혜능 대사는 그녀를 동정하고, 가엾게 여겼다.
출가인은 가슴에 자비를 품어야 하는 법. 혜능 대사야말로 진정한 고승이었다.
불상에 새로 도금을 하는 것이나 두 사찰 사이 원한 관계나 결국 혜능 대사가 그녀에게 편의를 봐주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그녀를 도우려는 마음이 있어서, 편의를 봐준 것이다.
그녀는 혜능 대사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월령안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승려들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법사(法事)를 치르는 승려들과 함께 서탑의 편전에 도착했다.
혜능 대사의 말대로, 편전 밖에는 육장봉이 배치한 시위가 지키고 있었다.
사찰의 승려가 미리 말을 해 둔 모양이다. 지키고 있던 시위는 월령안을 저지하지 않고, 이맛살만 찌푸렸다.
월령안은 편전에 들어서면서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갑자기 법사를 하지? 게다가 여자 참배객까지 들이고?”
“혜능 대사께서 이렇게 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더 묻지 마.”
월령안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혜능 대사께 감사를 드렸다.
편전에 들어서자, 승려들은 양쪽으로 나누어 앉아 법기를 앞에 두고 경을 외기 시작했다.
월령안은 편전에 놓인 관과 관 앞에 놓인 위패를 보고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