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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18)화 (118/1,004)

118화 모든 것을 홀로 짊어져야만 해

“지민(智民)아, 월 시주를 서탑으로 모시거라.”

혜능 대사는 아까 두 사람을 안내했던 젊은 승려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월령안을 서탑으로 안내하라고 분부했다.

“감사합니다. 대사.”

월령안은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횡천은 들어온 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월령안이 일어서자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가 움직이자마자 혜능 대사가 말했다.

“이쪽 시주분의 몸에서는 피 냄새가 나니 서탑은 가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수횡천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진 채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여긴 광원사니까 괜찮을 거예요.”

월령안은 머리를 저었다. 곧이어 무엇을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혜능 대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사, 제 몸에서는 피 냄새가 나지 않나요?”

그녀 역시 오는 길에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혜능 대사는 월령안을 바라보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월 시주는 가 보아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몰랐지만, 혜능 대사는 그녀도 낮에 사람을 죽이고 피를 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가 괜찮다고 하니, 그녀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젊은 승려를 따라 서탑에 도착했다. 이미 사찰 문을 닫은 뒤라 서탑 안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중요한 방들은 모두 잠겨 있었다. 대전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월령안은 대전으로 들어갔다. 대전 가운데에 모시고 있는 고승(高僧)의 사리(舍利 - 고승의 유골)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절을 세 번 올렸다.

절을 마친 뒤, 월령안은 몸을 일으키고 길을 안내하는 젊은 승려에게 물었다.

“다른 곳도 볼 수 있나요?”

“월 시주, 다른 곳은 모두 잠겨 있습니다. 오늘은 안 됩니다.”

젊은 승려가 머리를 저으며 거절했다.

월령안은 잠시 아득해졌다. 자조적인 웃음이 절로 나왔다.

혜능 대사가 어쩐지 쉽게 승낙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것도 볼 수 없으리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원사의 대사는 정말이지……. 그래, 화를 내려고 해도 화를 낼 수가 없구나!’

“그럼 내일은요?”

월령안이 단념하지 않고 물었다.

“내일은 다시 오실 수 있습니다.”

젊은 승려는 합장하고서, 불호를 한 번 읊더니 말했다.

“월 시주, 이쪽으로…….”

월령안은 서탑을 지키고 있는 승려에게 완곡하게 거절당하자, 눈치 있게 물러섰다.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젊은 승려를 따라 선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픈 것을 싫어했다. 체면을 내세우지 않는 것도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담벼락에 머리를 부딪치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세상에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

이쪽 길이 담벼락에 막혔으면 다른 길을 찾으면 그만이다. 멍청이도 아니고, 몸을 부딪쳐 담벼락을 부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얼마나 아플까.

올 때는 지명(智明)이라는 젊은 승려가 월령안을 참배객들이 머무르는 곁채로 안내했다. 가기 전에 특별히 한마디 당부했다.

“월 시주, 혜능 대사께서 시주의 몸이 성치 않으니, 일찍 잠자리에 드는 편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속뜻은 다음과 같았다.

‘월 시주, 소용없으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세요.’

육장봉은은 혜능 대사와 내기 바둑을 두어 이겼다. 그 바람에 혜능 대사는 월령안에게 어머니의 관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육장봉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월령안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혜능 대사의 선의에서 나온 권고 또는 경고를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다른 능력은 없더라도, 줄곧 세상 물정에는 밝았다. 혜능 대사가 그렇게 말한 이상, 물론 그 말에 따를 것이다. 최소한 혜능 대사의 체면을 구기지는 않을 것이다.

“편히 쉬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문밖에 있는 사미승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방법이 혜능 대사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는 별개 문제였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지명 스님을 보냈다.

지명 스님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른 곁채에 머물게 된 수횡천이 말소리를 듣고 찾아와 관심을 보였다.

“령안아, 어떻게 됐어? 어머니 제사는 지냈어?”

“아니요.”

월령안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서 가볍게 탄식했다.

“완곡하게 거절당했어요. 육장봉이 내일 광원사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내일……!”

수횡천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내일 육장봉은 산에 올 수 없을지도 몰라.”

“왜요?”

월령안은 수횡천이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않았다.

수횡천은 무림맹주였다. 그만의 정보 통로가 있을 게 뻔했다.

“오늘 너를 찾으러 갈 때, 성안에서 북요 남원대왕 야율제의 행적을 발견했어. 내가 손을 써서 그놈의 행적을 폭로했거든. 육장봉이 성안으로 돌아간 건 분명 야율제 때문일 거야. 야율제를 찾기 전까지는 아마 자리를 뜨기 힘들 거다.”

수횡천은 말을 마치고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령안아, 미안하다. 네가 육장봉을 만나려고 성 밖으로 나온 걸 몰랐어.”

만약 알았더라면, 그때 서둘러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육장봉에게 말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일이 오라버니와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오라버니께서 잘하신 거예요. 북요인들의 행적을 발견했으면, 당연히 알려서 조정에서 잡아들이게 해야죠!”

월령안은 ‘북요’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눈에 살기를 품었다. 얼굴은 복수심으로 불타는 분노와 무시무시한 악의로 가득 찼다.

그녀를 바라보며, 수횡천은 자신이 조사했던 사실들을 떠올렸다.

월령안에게 북요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인 원수였다. 그녀가 북요인을 증오하는 건 당연했다.

“걱정하지 마. 육장봉은 야율제와 여러 번 겨룬 적이 있거든. 육장봉이 돌아갔으니 야율제도 얼마 더 숨어 있지는 못할 거다.”

수횡천이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하지만 육장봉이 단시일 내에는 광원사에 오지 못할 것 같구나.”

“괜찮아요. 북요인들을 죽이는 게 중요하죠.”

월령안은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더는 육장봉이 자신을 기다리게 하고, 또 어머니의 제사를 먼저 지내지 못 하게 한 데 대해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중 잣대를 들이댔음을 인정했다.

육장봉이 북요의 남원대왕 야율제를 잡기 위해 돌아갔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그가 돌아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육장봉이 제사를 지내지 못 하게 한다면 안 하면 된다. 기다리라고 한다면 기다리면 된다.

육장봉이 야율제를 붙잡거나, 야율제를 죽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수횡천은 남을 위로하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또한, 월령안도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서 입을 열었다.

“일찍 쉬어라. 내일…… 다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좋아요.”

월령안은 수횡천을 보내고서 방 안에 준비된 물로 간단하게 씻었다.

하지만 얼굴을 씻는 간단한 동작도 한참이나 걸렸다. 그 와중에 오른쪽 손과 팔은 점점 더 아팠다.

“아흑!”

월령안은 아픔을 잘 참는 편이었지만, 이 순간은 참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조심스럽게 옷을 벗어 보았다. 오른쪽 어깨가 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 있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밀려왔다.

“죽을 것 같아.”

월령안은 오른팔이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 상태로 어떻게 산에서 육장봉을 기약 없이 기다리지? 오른쪽 팔을 포기하면 모를까.’

“그래서 내가 오늘은 안 된다고 했잖아. 육장봉, 나쁜 놈. 왜 하필 오늘 보자고 했냐고. 오늘은 대체 무슨 마가 낀 거야? 비가 오지를 않나, 습격당해 죽을 뻔하지를 않나, 거기에 북요인들까지 끼어들었다고! 꼭 이렇게 재수 없는 날을 택하다니. 어쩐지 당신이 날 싫어하더라니.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육장봉 당신 눈이 삐어서 그런 거였어!”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육장봉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육장봉처럼, 이렇게 중요한 일을 바로 전날 저녁에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사흘 전부터 목욕재계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하루 전에는 알려 줘야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육장봉은 준비할 시간을 반나절도 주지 않았다. 서둘러 시간만 정했다. 그녀가 올 수 있는지, 없는지도 무시했다. 반드시 와야만 한다고 강경하게 요구했을 뿐이다.

어머니의 관이 육장봉의 손에 있었다. 육장봉은 지위도, 권세도 드높았다. 그러니 남을 이해해 줄 필요도 없었고, 남의 어려움도 무시할 수 있었다.

반면 그녀는 권세도 없고, 육장봉을 나무랄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에게 일이 생겨서 먼저 자리를 떴으면, 적어도 내가 먼저 어머니한테 제사를 지내게 해 줄 수는 있잖아?

나더러 여기서 꼭 기다리라니. 이러는 게 재밌나?’

게다가 지금은 육장봉이 요구하는 군마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니 기껏해야 제사만 지낼 수 있을 뿐, 어머니의 관을 모셔 갈 수도 없었다. 육장봉이 광원사에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었다.

“그때는 내가 정말 눈이 멀었었지. 당신의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당신은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과 전혀 달라. 그 사람은 내가 울 때면 조용히 옆에서 지켜줬어. 내 원수가 북요인이라는 것을 알자, 나중에 입대해서 북요와 싸우러 갈 거라고 말해줬어. 그런데 당신은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해 준 적이 없잖아.”

월령안은 혜능 대사에게 연거푸 거절당했지만, 상심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깨의 검푸르게 부어오른 상처를 보며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오늘 광원사에 오느라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하늘만이 알리라.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자객을 만나고, 능욕당할 뻔했던 것도 무섭지 않을 만큼 마음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설령 무섭고 당황해서, 남들에게 자신의 두려움과 힘든 경험을 털어놓아도 소용없었다. 고작해야 가벼운 위로 정도나 받을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에게 말하지 않는 건 모든 것을 무시할 정도로 강해서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무뎌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똑같이 공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더는 그녀를 안아주거나, 위로해 주거나, 이런 말을 해 줄 사람은 없었다.

“령안아, 앞으로 밖에 나갈 때마다 내가 꼭 지켜줄게.”

이렇게 말해 줄 사람도 없었다.

“령안아, 다음부터 이런 일은 네가 안 해도 돼. 우리 다시는 혼자 성 밖에 나가지 말자. 이제 더는 이런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거야. 이제부터 가족들은 내가 먹여 살릴게.”

그녀는 자신을 대신해 이 모든 것을 책임질 사람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객에게 쫓기든, 겁탈을 당할 뻔하든, 그녀는 여전히 피할 수 없었다. 밖에서 바삐 뛰어다녀야 하고, 홀로 성 밖으로 나다녀야 했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져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혼자만 안전한 곳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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