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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17)화 (117/1,004)

117화 생강탕을 마시는 게 무서워요?

“오라버니, 지금 광원사로 출발해도 되겠죠?”

비는 이미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수횡천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지금 움직이면 광원사에는 날이 저물어서야 도착할 거야. 그러면 오늘 내로 성에 돌아갈 수는 없어.”

“괜찮아요. 장원 사람들에게 성으로 가서 소식을 전하라고 하면 돼요.”

그녀가 수 맹주와 함께 있는 것을 알면, 노인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처음으로 외출하는 게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은 상인은 이익만 중요하게 여기고 이별은 가볍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사가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군들 집에만 있으면서 한량 노릇이나 하고 싶지 않을까.

생계를 고민하지 않고, 평온한 일상 속에서 풍류나 즐기며 노닥거리기를 싫어할 사람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생계를 고민하지 않고 노닥거리려면,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져 주고, 대신 세상을 떠받치고 있어야 했다.

월령안은 집안을 짊어지고, 세상을 떠받칠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는 평온한 생활이나, 풍류나 즐기는 생활을 바랄 자격조차 없었다.

그녀가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많았다. 걸음을 멈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알았어. 그 생강탕을 마시고 나면 움직이자. 그렇지만 걸칠 걸 하나 더 챙겨. 아까 비를 맞아서 몸이 약해졌잖아. 밤이 되면 산속은 훨씬 추워진다. 이제 더는 찬 기운을 쐬면 안 돼.”

수횡천은 월령안을 누이동생으로 삼기로 했으니, 정말 누이동생처럼 대했다. 그전 같았으면 월령안이 걱정되더라도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알았어요.”

월령안도 수횡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폐를 끼치니, 안 끼치니 하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덕은 덕으로, 원한은 원한으로 갚아 온 사람이었다. 수횡천이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고 누이동생으로 여기면, 그녀 역시 그를 오라버니로 생각할 셈이었다. 굳이 체면을 차리거나 내외하지 않을 것이다.

마름의 딸이 커다란 사발에 생강탕을 가득 담아 왔다. 월령안은 뜨거운지 살짝 확인해 본 다음, 살살 불어 식히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얼굴을 하도 찡그리는 바람에 꼭 늙은이처럼 주름이 잔뜩 졌다.

수횡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단숨에 들이켜길래 매운 것도 잘 먹는 줄 알았네. 다음번에 사매(師妹 -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여자 후배)를 만나면, 세상에 생강탕의 알싸한 맛도 잘 먹는 아가씨가 있다고 말해 줘야겠어.”

월령안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한참 지나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생강탕의 알싸한 맛에 눈까지 새빨개져, 무척 불쌍해 보였다.

수횡천의 말에 월령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강탕이 이렇게 알싸한데 싫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다만 길고 가는 고통보다 짧고 굵은 고통이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차라리 단숨에 들이켜 딱 한 번만 매운 게 나아요.”

“사매는 너와 정반대야. 걔는 가늘고 긴 고통이 낫다고 생각해. 그래서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시지.”

그마저도 옆에서 달래 가며 마시게 해야 했다.

수횡천은 무엇을 떠올렸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전 안 돼요. 너무 힘들어요.”

월령안은 생강탕의 알싸한 맛에 계속 시달려야 한다고 상상해 보았다. 저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수횡천은 한쪽에 놓아둔 생강탕을 보고는 묵묵히 눈길을 돌렸다.

“짧고 굵은 고통을 선택하기도 쉽지는 않아.”

아까 그는 한참이나 용기를 내 보려고 애썼으나, 결국 생강탕을 마시지 못했다.

그는 몸이 약한 아가씨도 아니니까, 자신은 이 생강탕을 마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때마침 마름이 들어왔다.

“그럼 어서 출발하자. 머뭇거리다가는 날이 저물겠다.”

수횡천은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생강탕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탁자 위의 생강탕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오라버니, 생강탕을 아직 안 마셨잖아요.”

“아니, 괜찮아. 난 안 마셔도 된다. 우리 서둘러야 해.”

수횡천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 곧 손사래를 쳤다.

“오라버니, 그만한 시간은 있거든요.”

월령안은 생강탕을 수횡천에게 주라고 마름의 딸에게 눈짓했다.

마름의 딸이 생강탕을 들고 쫓아 나왔다. 수횡천은 연신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난 몸이 튼튼해서 마실 필요가 없어.”

“오라버니, 혹시…… 생강탕을 마시는 게 무서워요?”

월령안이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수횡천은 금세 얼굴이 붉어지며 단박에 부인했다.

“그럴 리가. 내가 생강탕을 무서워한다고?”

“그럼 어서 드세요.”

월령안은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분명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입만 살았네.’

“나는…… 그래, 마시마!”

수횡천은 눈앞에 건네주는 생강탕을 보았다. 마치 장사가 아픈 팔을 자르기라도 하듯, 비장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농담이에요. 생강탕은 땀을 내려고 마시는 거잖아요. 오라버니는 건강하니까 마실 필요가 없어요.”

월령안은 여태껏 상대방을 위한다는 핑계로 남이 싫어하는 일을 시킨 적이 없었다. 수횡천이 싫어하는 것을 보고, 더는 권하지 않았다.

“흠흠……. 난 이 맛을 정말 싫어해서.”

수횡천은 겸연쩍어했다. 그러나 월령안의 말을 듣자마자, 마름의 딸에게 생강탕을 얼른 돌려주었다.

그도 사매처럼 생강탕 특유의 맛을 좋아하지 않았다. 짧고 굵은 고통이 길고 가는 고통보다 낫다고 수없이 되뇌어도,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마시기 싫으면 마시지 마세요. 광원사에 가서도 몸이 안 좋으면, 약을 지어 먹으면 돼요. 광원사의 승려가 의술에도 능통하셨던 거로 기억해요.”

월령안도 천천히 앞으로 나가, 수횡천과 함께 밖으로 걸어갔다.

“좋아.”

수횡천도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고 월령안의 걸음에 맞춰 자신의 발걸음을 늦추었다.

* * *

수횡천은 마차를 몰아 재빨리 달렸다. 그들은 광원사의 문이 닫히기 전에 도착했다.

“여러분, 일각 뒤면 사찰을 닫아야 해서, 지금은 참배자를 접대하지 않습니다.”

사찰에 들어가려는 순간, 문을 지키는 젊은 승려가 막아 나섰다.

월령안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면서 말했다.

“스님, 저는 육 대장군과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 그분이 제게 광원사에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월 시주이십니까?”

젊은 승려가 물었다.

월령안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월령안이에요. 육 대장군께서 저더러 광원사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 저를 따라오십시오.”

젊은 승려는 합장하고 나서 불호를 한 번 읊었다. 곧이어 월령안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월령안과 수횡천은 젊은 승려를 따라 광원사 뒤쪽에 있는 선방(禪房 - 참선하는 방)에 도착했다. 젊은 승려는 두 사람을 왼쪽 구석의 작은 뜰로 데리고 갔다. 입구에서 잠깐 기다리게 하고는 혼자 들어갔다.

잠시 후 젊은 승려가 나오더니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시주분들, 들어오세요.”

월령안과 수횡천은 선방으로 들어갔다. 선방 밖에는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친위대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마침 선방 안쪽에 있는 혜능 대사가 보였다.

월령안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혜능 대사에게 예를 올렸다.

“혜능 대사!”

혜능 대사는 변경에서 명성이 드높았다. 월령안은 다행히 한 번 뵌 적이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월 시주, 육 시주를 찾으십니까?”

혜능 대사는 월령안의 경직된 오른팔을 얼핏 보고 나서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월령안과 수횡천에게 앉으라고 했다.

‘육 시주, 미안하지만 소승이 이번에는 돕기 어려울 듯하오.’

“네, 육 대장군께서 제게 광원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월령안은 혜능 대사의 맞은편에 꿇어앉아 공손하게 대답했다.

“너무 일찍 오셨습니다.”

혜능 대사는 자비롭고 인자한 표정이었다.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었다.

월령안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육 대장군께서 아직 안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육 장군은 오셨다가 가셨습니다.”

혜능 대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제가 늦었군요.”

‘육장봉이 가 버렸다고. 내가 너무 늦게 왔다고 괘씸해서 가 버렸나?’

“아닙니다. 월 시주는 일찍 오셨습니다.”

혜능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월령안은 침묵을 지키며 혜능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살짝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혜능 대사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월 시주, 산에 선방이 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묵으셔도 됩니다.”

월령안이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녀도 이 시간에 산에서 내려갈 수는 없었다. 혜능 대사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다시 물었다.

“대사, 제가 우선 어머니께 제사를 지내도 되겠습니까?”

“월 시주, 자당(慈堂 –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의 관은 육 장군의 사람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육 장군의 명령이 없으면 누구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혜능 대사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제사만 지내는 것도 안 되겠습니까?”

육장봉이 어머니의 관을 아무 때나 가져가도 된다고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허락이 없으면, 볼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육장봉을 원망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육장봉과 거래하며 군마를 찾아 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아직 군마를 주지 못했으니, 육장봉이 관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대가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월 시주, 소승은 광원사의 일에만 결정권이 있습니다.”

혜능 대사가 가볍게 탄식했다.

“육 대장군께서 오늘 오면 어머니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월령안은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육 장군은 광원사라는 장소를 빌렸을 뿐입니다. 육 장군이 맡긴 것에 관해서는…… 광원사에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혜능 대사는 다시 한번 탄식했다.

“월 시주, 기왕 왔으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오.”

“대사, 육 대장군께서 언제 돌아오신다는 얘기는 했습니까?”

월령안은 이 일로 혜능 대사를 탓할 수 없음을 알고 고분고분하게 물었다.

혜능 대사는 머리를 저었다.

“육 시주는 가기 전에 월 시주에게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혜능 대사는 연이어 한숨만 쉬었다.

‘육 시주의 성격을 생각하면, 낮에 그가 기다린 만큼 월 시주는 더 오래 기다려야 하겠구나…….’

“감사합니다, 대사. 알겠습니다.”

월령안은 혜능 대사에게 절을 올려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뒤에 물었다.

“대사, 제 어머니의 관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겠습니까?”

“자당의 관은 서탑(西塔) 안에 두었습니다. 매일 고승들이 경을 읊어드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월령안이 거듭 거절당해도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자, 혜능 대사는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육 시주와 월 시주 두 사람은 출신, 성격, 일 처리 방식마저 너무나 다르구나. 이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앞으로도 많이 부딪혀야 하겠어.’

월령안은 이 일이 혜능 대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육장봉의 일 처리가 막무가내고, 억지를 쓴다고 여겨도 혜능 대사 앞에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서탑으로 가 보아도 됩니까?”

‘육장봉이 어머니 관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 나조차도 안 된다고. 그럼 서탑에 가는 건 괜찮겠지? 육장봉이 그 정도로 오지랖 넓게 굴지는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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