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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16)화 (116/1,004)

116화 이게 오라버니구나

월령안은 잠깐 쉬고 나자, 체력이 절반 정도는 회복되었다. 수횡천의 부축을 받아 억지로 두어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수횡천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 광원사에 어떻게 간다고?”

“안 가면 안 돼요.”

월령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광원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육 대장군이세요. 제 어머니의 시신을 광원사에 모셔 두었는데, 대장군의 말씀이 없으면 볼 수가 없어요.

오라버니도 육 대장군을 만나봤으니 그 사람의 성격과 됨됨이를 아실 거예요. 오늘 광원사에 가지 않으면, 이유야 어쨌든 간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나무랄 거예요. 웃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감히 육 대장군께 노여움을 사면 안 되거든요.”

우느라 목이 쉬어서인지, 마음이 울적해서일까. 월령안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수횡천이 주춤하다가 말했다.

“나는 육장봉과 친하지 않아. 여기 오기 전에는 만난 적이 없어. 겨룬 것도 딱 한 번뿐이야. 그때 내 어려움을 알고 너를 찾아가라고 말해 주었지. 걱정하지 마라. 그 빚은 오늘 갚았으니까.”

남원대왕 야율제의 행방을 알려 주었다. 이만하면 육장봉이 그와 월령안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 신세를 갚는 데는 충분했다.

수횡천은 육장봉과 일면식만 있을 뿐,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육장봉이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월령안의 말을 들은 수횡천은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먼저 적당한 곳을 찾아 옷도 갈아입고, 마차도 마련해야겠다. 지금 네 상태로는 갈 수가 없어.”

“성 밖에 작은 장원이 있어요. 여기서 아마 십 리쯤 떨어졌을 거예요. 지금 제 상태로는 오라버니의 짐이 될 거 같으니까, 일단 숨어 있을게요. 오라버니는 제 증표를 가지고 장원에 찾아가세요. 장원의 마름에게 마차로 절 데리러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이곳은 인적이 드문 외딴곳이었다. 지금 그녀의 상태로는 장원으로도, 성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물론 혼자 남는 건 위험했다. 그러나 수횡천이 그녀까지 데리고 움직이면, 날이 저물어도 장원에 가지 못할 것이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수횡천은 단박에 거절했다.

“령안아, 너만 괜찮다면 내가 업고 가마.”

“오라버니, 폐만 끼치네요.”

월령안은 당연히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 수횡천의 등에 업혀 같이 가는 쪽이 좋았다. 금방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납치당하고 심지어 겁탈당할 뻔했다. 지금 밖에 혼자 있는 게 얼마나 두려운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수횡천에게 먼저 가라고 한 건, 남의 짐이 되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한 소리였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수횡천을 오라버니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사실상 두 사람은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수횡천이 그녀를 구해 준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수횡천이 손을 내저었다. 몸을 굽혀 월령안을 업으려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잠깐만요. 제 인감이 저 사람에게 있어요.”

“어느 놈?”

수횡천이 몸을 돌려 물었다.

“저기 저 사람이에요.”

월령안이 우두머리를 가리켰다. 수횡천은 머리를 끄덕이고 앞으로 다가갔다. 우두머리의 몸을 뒤져, 인감과 기름종이에 싸인 물건을 찾아냈다.

수횡천은 이 사람들이 고용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혹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기름종이를 헤쳐 보았다.

“이건 은표 뭉치잖아. 액수가 적지 않은데.”

수횡천은 은표가 물에 젖을까 두려워 자세히 세어 보지는 못했다. 대충 눈으로 보고 어림짐작했다.

“오륙천 냥은 될 듯싶구나.”

“제 목숨을 노리는 값으로 준 계약금일 거예요.”

월령안의 눈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오라버니, 어서 챙기세요. 이건 저희의 수고비예요.”

누군가와 싸우더라도, 돈과 싸울 필요는 없다. 돈이 무슨 죄인가. 돈을 잘못 사용한 사람이 죄인일 뿐이다.

“그래, 반씩 나누도록 하자.”

수횡천도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은표와 인감을 함께 월령안의 손에 쥐여 주었다.

“먼저 보관하고 있어.”

“좋아요. 은표는 제가 먼저 보관하고 있을게요.”

월령안도 내외하지 않고 은표를 챙겼다. 하지만 인감은 받지 않았다.

“인감은 오라버니가 가지고 있어요. 제 개인 인감이에요. 월씨 가문의 사장들은 모두 알아볼 거예요. 이 인감이 있으면 우리 가게에서 일만 냥 이하의 은표나 물건은 마음대로 쓸 수 있어요. 사장들도 제일 먼저 오라버니의 요구를 들어줄 거예요. 강호를 떠도는 오라버니가 인감을 가지고 있으면, 훨씬 편할 거예요.”

“이건 너무 귀중한 거야. 난 못 받는다.”

수횡천은 단박에 거절했다. 하지만 월령안은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오라버니, 저를 싫어하는 거죠. 이제는 가게 하나 없는 처지에 맨입으로 약속한다고요?”

“아니야. 너무 귀한 물건이라 그렇지.”

월령안의 말을 듣자, 말주변이 없는 수횡천은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월령안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귀하긴요. 저도 지금 말만 번지르르하지, 제 명의로 된 가게 하나 없어요. 오라버니가 이걸 가지고 있더라도 써먹을 데가 없을지도 몰라요.”

수횡천이 인감을 받게 하려고, 월령안은 자기 비하도 서슴지 않았다.

“네 능력이라면 월씨 가문 가게를 온 나라 방방곡곡에 다 차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

월령안은 대범하고 시원시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할 때도 파격적이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여인들의 가냘픔과 민감함 대신 육장봉과 비슷한 강인함과 독기를 엿보았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하든 성공할 사람이야. 월령안은 해낼 수 있어!’

“오라버니, 저를 과대평가하는 거예요. 이 인감이 나중에 값어치나 나갈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지금은 땡전 한 푼 값어치도 없어요. 오라버니. 제가 싫지 않으시면, 그냥 누이동생이 오라버니에게 공경하는 거로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어요?”

수횡천이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인감 하나가 대수랴. 월씨 가문의 전 재산을 선물해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수횡천이 은혜를 보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남매 사이의 정만 언급했다.

‘이러면 거절하지는 못하겠지?’

결국, 수횡천은 거절하지 못했다. 손에 쥔 인감을 힐끔 보더니, 월령안의 ‘간절한’ 기대 속에서 머리를 끄덕이며 챙겨 넣었다.

“네가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니, 그럼 나도 체면을 차리지 않으마.”

일단 물건은 받아 두었다. 쓸지 안 쓸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월령안이 그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라비가 되어서 아무리 무능하다고 한들 자기 누이동생의 물건을 탐낼 수는 없었다.

“한집안 식구끼리니까 당연히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죠.”

수횡천이 더는 거절하지 않자 월령안은 그가 이익보다는 정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사람만이 ‘대협(大俠)’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횡천은 그녀에게 대협과 정의에 대한 모든 환상을 만족시켜 주었다.

인감을 받은 수횡천은 그녀의 말까지 듣자, 더는 내외하지 않았다. 예전과는 달리 훨씬 친근하게 대했다.

물론 이런 친근함에는 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 오직 오라버니로서 누이동생에 대한 친근함일 뿐이었다.

“자, 어서 업히거라.”

수횡천도 더는 전처럼 머뭇거리지 않았다. 과감하게 월령안의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오라비가 다친 누이동생을 업는 게 당연하잖아?’

월령안도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수횡천의 등에 업혔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가자.”

수횡천은 월령안이 제대로 업히자 팔로 두 다리를 받치고는 갈림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월령안이 흔들릴까 걱정하는지, 걸음걸이는 빠르면서도 안정적이었다.

수횡천의 등에 업힌 월령안은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게 오라버니구나!’

그녀는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오라버니가 가장 즐겨 하던 일은 그녀를 업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그녀를 가장 달콤한 짐이라고 했다. 한평생 업고 다니며 지켜 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오라버니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오라버니는 먼저 가 버리고 그녀만 남겨 두었다. 결국, 그녀는 홀로 가시덤불이 가득한 진창길을 걸어야 했다.

월령안은 수횡천의 등에 뺨을 대고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불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보고 싶어요! 한 번만이라도 다시 저를 봐 주고, 한 번만 더 업어 주세요. 다시 한번 저를 령안아, 하고 불러 주세요.’

* * *

월령안은 비를 맞은 데다가 정신적으로도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속병까지 더해져 가는 내내 줄곧 흐리멍덩한 상태였다.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떠 낯선 곳임을 확인했다.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는 동안 의식이 있기는 했다. 자신이 어떻게 장원에 들어왔는지, 마름에게 무엇을 분부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다만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온몸이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꿈속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월령안은 눈을 뜨더니, 물속에서 나와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여봐라!”

그녀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인을 불렀다. 옷 시중을 들러 들어온 사람은 장원 마름의 딸이었다.

“아가씨, 다치셨다면서요! 장원에 마침 상처약이 있었거든요. 함께 오신 수 공자께서 저더러 약을 발라 드리라고 당부하셨어요.”

월령안의 몸에는 찰과상이 여러 군데 있었다. 특히 오른쪽 손과 팔이 전체적으로 벌겋게 부어 있었다.

월령안은 힐끗 바라보고는 머리를 저었다.

“필요 없어. 옷만 갈아입혀 주면 된다.”

그녀는 의술에 대해 몰랐지만, 팔의 상처가 심상치 않은 것이 근골을 다친 게 분명했다. 의원에게 보이고 치료를 받아야지, 괜히 아무 약이나 잘못 발랐다가는 상처가 깊어질 수도 있었다.

월령안이 거절하자, 마름의 딸도 더는 말할 엄두를 못 냈다. 그녀에게 마른 옷을 입혀주고, 큰 수건을 가져다 머리를 닦아주었다.

머리가 반쯤 마르자, 마름의 딸이 머리를 빗겨주면서 또 말을 붙였다.

“아가씨, 주방에 생강탕을 끓여 놓았는데 좀 가져다드릴까요?”

월령안은 머리를 끄덕였다.

“마차를 준비하고 먹을 걸 좀 실어 두렴. 일각 뒤에 출발할 거야.”

“알겠어요. 아가씨.”

마름의 딸이 물러갔다. 월령안은 동경(銅鏡)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보았다. 연지를 엷게 발라 푸석한 기운을 감추고는 밖으로 나섰다.

수횡천은 바깥 대청에서 생강탕 한 사발을 들고서 입김을 불어 가며 식히고 있었다. 월령안이 나오는 것을 보자, 당장 생강탕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령안아, 괜찮아?”

월령안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회복했다. 반 시진밖에 안 지났는데, 평상시와 다름없어 보였다.

이렇게 강한 내면과 인내심은 보통 남자들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일들을 겪었기에 이렇게 강해진 건지 알 수 없군.’

월령안이 대답했다.

“오른손만 조금 아프고, 다른 데는 괜찮아요.”

사실이 아니었다. 온몸이 성한 데 없이 모두 아팠다. 아까는 비를 맞고 있었고, 놀라고 두려웠다. 그 바람에 무감각해져 통증을 못 느꼈을 뿐이었다.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의식을 회복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이 엉망진창이 되어 찰과상도 잔뜩 입은 걸 알았다.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해 봤자, 남에게 걱정만 끼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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