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내가 있으니 괜찮소
월령안은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걸린 미소도 변함이 없었다. 아주 협조적인 태도였다.
“예, 형님.”
월령안에게 칼을 휘두르려 했던 그 남자는 칼을 뒤쪽에 있는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띠를 풀었다.
월령안의 미소가 약간 경직되었다.
“당신들 제법 전문적이로군. 나같이 연약한 여인은 묶여 있지 않더라도, 도망칠 수는 없어.”
“월 사장, 미안하게 됐네.”
우두머리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지.”
월령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면서 꾹 참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인질이 되었으니 절대 이자들의 화를 돋우지 말자. 난 가치가 있는 인질이니까, 협조하면 고생을 덜 할 거야.’
“손 내밀어!”
그중 셋째라고 불린 남자가 허리띠를 밧줄 삼아 들고 월령안 앞으로 다가와 험악하게 말했다.
월령안은 그를 힐끔 보더니, 이를 악물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셋째는 월령안의 손을 묶지 않고 그녀의 가슴을 더듬으려 들었다.
“이 하얀…….”
“무슨 짓이냐?”
월령안은 홱 뒤로 물러서고 손을 들어 상대방의 손을 내리쳤다.
“돈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선을 넘는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철썩!
셋째는 월령안이 피하고, 또 자신에게 손찌검하자 크게 화가 났다. 도리어 월령안의 뺨을 쳤다.
“이 천한 계집이, 뻔뻔하기 짝이 없군! 우리가 널 좀 데리고 놀겠다는데, 어쩔 셈이냐?”
월령안은 뺨을 맞고 휘청거리면서도 셋째가 달려들자 또 한 번 피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선을 넘지 마라! 나 월령안은 다른 건 몰라도 돈은 차고 넘친다. 오늘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기만 해 봐! 너희 모두…… 영원히 편치 못할 거다!”
“셋째야, 그만해라!”
우두머리가 서둘러 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 셋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미친개처럼 월령안에게 덤벼들었다.
“아직도 입만 살았구나. 죽고 싶으냐!”
털썩!
월령안은 상대에게 떠밀려 땅에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셋째가 그녀의 몸을 내리눌렀다.
“나쁜 놈!”
월령안은 벌게진 두 눈으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대방을 걷어차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셋째에게 꽉 눌린 다리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찌익…….
그녀의 옷이 셋째에게 찢겨 나가고 있었다. 월령안은 그를 죽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이때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셋째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팍 터져 나왔다.
셋째는 월령안의 옷을 찢던 동작을 멈췄다. 두 눈은 크게 뜨인 채였다.
월령안의 얼굴에 피가 가득 튀었다.
“앗!”
월령안은 재빨리 입을 막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웬 놈이냐?”
우두머리는 경악하여 주변을 두리번댔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찾지 못했다.
“어서, 이 계집을 데리고 철수하자.”
우두머리는 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셋째의 시체를 걷어찼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월령안을 끌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도 허리를 숙인 순간, 셋째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우두머리의 이마에서 튀었다. 선혈이 뿜어져 나오며 또다시 월령안의 몸 위에 떨어졌다. 그의 뻣뻣해진 몸이 월령안의 위로 쓰러지고 있었다.
“저리 가!”
월령안은 남자를 밀치고 싶었다. 그러나 오른팔이 다친 데다, 왼팔도 싸우는 도중 삐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몸을 최대한 움직여 시체에 깔리지 않도록 했다.
“어서, 저 여자를 잡아라. 도망쳐!”
우두머리가 죽자, 다른 사람들은 크게 당황해하며 월령안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쓰려는 찰나, 수횡천이 긴 연검(軟劍)을 들고 나타났다.
쉭! 쉭!
검의 섬광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이 전부 쓰러졌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구나!”
그들을 죽인 뒤, 수횡천을 검을 거두었다. 월령안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다리를 짓누르는 시체를 차 버렸다. 그다음 쪼그려 앉아 월령안을 일으켰다.
“월 낭자, 괜찮소?”
월령안은 일어나 앉았다. 한참 동안 멍하게 있다가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월령안은 자신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빗물 때문에 흐릿해진 수횡천의 얼굴을 보고 얼떨떨해서 물었다.
“수, 수 맹주?”
“나요.”
수횡천은 월령안이 겁먹은 모습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내가 있으니 괜찮소.”
“감, 감, 감사해요! 감사해요! 수 맹주, 정말 고마워요.”
수횡천의 ‘내가 있으니 괜찮소’라는 말을 들은 순간, 강한 척하던 월령안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실은 너무나 무서웠다.
월령안은 왼팔을 한쪽에 늘어트리고, 오른팔로 자신을 감싸 안아 옹송그렸다.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통곡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억울함을 당한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좀처럼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월, 월 낭자……!”
수횡천은 울기만 하는 월령안을 바라보면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월령안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말주변이 없어 입만 실룩거리며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다독이거나 안아주려고 해도 너무 당돌한 행동 같았다. 그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월령안이 울음을 그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광원사에서 내려온 육장봉 일행은 다른 길을 따라 세차게 달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세 갈래 길에 이르렀다.
관도는 자갈길이었다. 마차가 남긴 흔적은 장대비에 말끔히 씻겨 갔다. 관도까지 온 일행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었지만, 여전히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선두에 선 육장봉은 살짝 속도를 늦추었다가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맨 뒤에 있던 육십이가 좌우를 둘러보며 가볍게 탄식했다.
“월 낭자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모양이네요. 혹시 장군과의 약속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말하느라 입에 빗물이 가득 찼다. 육십이는 그것을 뱉어내려다가 갑자기 깜짝 놀랐다.
“어, 저기 마차의 흔적이 있는 것 같은데.”
“육십이, 너 뭐 하는 거냐? 빨리 따라오지 못해?”
육이는 한참을 가다가, 육십이가 멀리 뒤떨어진 것을 보자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눈치 없는 놈. 장군이 화가 나신 걸 아직도 모르나?’
“둘째 형님, 그게 아니라요. 저기……!”
육십이가 말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입안은 또다시 빗물로 가득 차 버렸다.
“서둘러라! 늦으면 군법대로 처리한다.”
육이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육십이를 더는 거들떠보지 않고 빠르게 쫓아갔다.
“그런데 저기……!”
육십이는 홀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번 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앞사람들은 나는 듯이 달려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낙오되면 군벌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는 말을 채찍질해 재빨리 뒤쫓아갔다.
‘마차의 흔적이 있다고 해도 월 낭자는 아니겠지. 에라, 모르겠다!’
육장봉 일행은 재빨리 관도에 진입했다. 가장 빠른 속도로 성안에 돌아갔다.
* * *
그 무렵, 한바탕 울고 난 월령안은 드디어 평온을 되찾았다. 고개를 들고 벌겋게 퉁퉁 부은 눈을 떴다. 그리고 쉰 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수 맹주,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네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찢어질 듯 아픈 오른팔의 통증을 무릅쓰고, 흙탕물이 잔뜩 튄 옷소매로 얼굴의 핏물, 눈물, 빗물을 닦아냈다. 차라리 그대로 두었으면 좋았을 걸, 얼굴이 도리어 얼룩덜룩해졌다.
“괜찮소, 월 낭자. 저기 얼굴이…….”
수횡천은 월령안의 얼굴을 가리켰다. 손수건이 있으면 얼굴을 닦으라고 건네고 싶었지만, 사내이다 보니 몸에 그런 물건을 지녔을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손짓으로 알려줄 뿐이었다.
“얼굴요?”
월령안의 멍한 시선이 수횡천의 손짓을 따라갔다. 옷소매의 핏자국과 흙탕물을 보자, 금세 알아차렸다.
“아……!”
월령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곧 쓴웃음을 지으며 왼팔을 가리켰다.
“수 맹주, 왼손을 삐었나 봐요. 좀 봐 주실래요?”
사실 오른손도 부어올라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살이 떨릴 정도로 아파, 크게 움직일 수 없었다.
“실례하겠소.”
수횡천은 머리를 끄덕이고 앞으로 다가갔다. 월령안의 왼팔을 잡더니, 관절 부분을 가볍게 두 번 내리눌렀다. 월령안이 아파서 신음을 내자, 수횡천은 서둘러 손을 놓았다.
“탈골되긴 했지만, 그리 심각하지는 않소. 내가 맞출 수 있소. 다만 약간의 통증이 있을 테니 조금만 참으시오.”
“부탁드릴게요. 전 괜찮습니다.”
월령안은 아파서 헐떡이면서도,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별말씀을.”
수횡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시 앞으로 다가가 월령안의 팔을 잡고 손목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탈골된 손목이 제자리에 끼워졌다.
“악!”
월령안은 아파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비에 젖고, 바람까지 맞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입술도 하얗게 질렸다.
이를 본 수횡천이 당장 일어나 겉옷을 벗어 주려고 했다. 겉옷을 벗고 난 다음에야 부적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옷을 주지도, 도로 입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월령안은 수횡천보다는 과감했다. 이 모습을 본 월령안이 되려 손을 내밀었다.
“제 옷이 찢어져서 신세를 져야겠네요.”
“월 낭자가 꺼리지 않으면 됐소.”
수횡천도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서둘러 옷을 건네주다가, 곧 그녀가 팔을 다쳤다는 게 떠올랐다. 그는 사과하고 옷을 펼쳤다. 직접 월령안에게 걸쳐 줌과 동시에 부축해서 일으켰다.
“실례하겠소.”
월령안은 머리를 저었다.
“수 맹주, 아니에요. 만약 괜찮다면 저를 누이동생처럼 생각하시고, 령안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럼 월…… 동생도 날 맹주라고 부르지 마. 오라버니라고 부르면 돼.”
수횡천은 월령안이 무척이나 대범해 보였다. 다른 규수들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조금만 스쳤다고 호색한이라고 욕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의가 아니었다. 긴급 상황에서 임기응변했을 뿐이었다.
월령안도 사양하지 않고 고마워했다.
“수 오라버니,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오라버니가 때마침 오지 않았으면, 제가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우두머리를 설득해서 셋째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어지간히 고생했을 것이다.
“날 오라버니라고 불렀으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오라버니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야.”
수횡천은 바닥에 가득 널려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훑어보고 물었다.
“령안아, 누가 보낸 사람들인지는 알아?”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급할 것 없어요. 돌아가거든 조사해 봐요.”
월령안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땅 위에 널브러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갈겠어!’
수횡천은 월령안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것을 보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하여 앞으로 갔다.
“날씨가 궂으니 일단 돌아가자.”
“저는 광원사에 가봐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