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13)화 (113/1,004)

113화 야율제를 찾아라

수횡천은 월씨 저택의 집사에게도 말 한마디 없이, 바로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바로 쏜살같이 성 밖 방향으로 뛰어갔다.

수횡천의 속도는 아주 빨랐다. 촘촘한 빗줄기를 바람처럼 재빨리 뚫고 갔다. 빗방울이 그의 몸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의 동작은 아주 가벼웠다. 발끝이 수면 위에 닿았지만, 빗방울은 조금도 튀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물결만 일으켰다.

“변경에 이런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길옆의 다루(茶樓) 위. 거친 외모에 야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수횡천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동공이 확대되었다.

그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마음속의 놀라움을 감췄다.

“보아하니,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야겠군!”

빗줄기를 가로지르던 수횡천도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슉!

푸른 나뭇잎이 빗줄기를 가르며 그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내가 변경 사람을 너무 얕잡아 보았군!”

순간, 남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손에 든 찻잔을 내던졌다. 동시에 몸을 일으켜 다루에서 사라졌다.

팍!

찻잔과 나뭇잎이 허공에 부딪혀 맑은소리가 났다. 찻잔이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나뭇잎은 전혀 상한 곳 없었다.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수횡천은 빗속에서 잠시 서 있었다. 그 사람이 떠나가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강호의 사람만 아니라면, 변경의 사람이나 사정은 그와 관련이 없었다. 그가 나서서 경고하는 것만으로도 할 도리를 다한 셈이었다.

일각(一刻 – 15분) 뒤, 관복 차림의 비쩍 마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관졸들을 이끌고 빗속을 뚫고 나는 듯이 다루를 향해 뛰어왔다.

남자는 서둘러 다루에 들어가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한쪽으로 향하더니 건물 밖의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그곳에 있는 부서진 사기 조각을 침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빗물에 젖어 불은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주워들고 냉소를 지었다.

“역시 고수의 솜씨가 맞아!”

나뭇잎만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른 남자는 나뭇잎을 잘 챙겼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루에 들어선 뒤,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다루를 봉쇄하고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해라.”

“대인, 이, 이게, 어찌 된 일인지요?”

관리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다루의 사장은 놀라서 허둥거리며 달려 나와서 물었다.

“추밀원에서 조사 중이다!”

마른 남자는 영패를 꺼내 사장 앞에 꺼냈다. 그의 두 눈은 칼처럼 날카롭게 다루 안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남자는 빠른 속도로 다루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초상화 한 장을 꺼내 한 손으로 펼치고 물었다.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눈에 익긴 하네요. 아까까지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앉은 자리가…….”

주인은 초상화를 보더니, 구석진 자리 한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어라? 언제 나갔지?”

주인은 매우 놀랐다. 고민하더니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언제 갔지? 용정(龍井) 한 주전자에 고급 간식을 세 접시나 시켰으니, 그 값이 자그마치 반 냥이나 되는데. 돈도 내지 않고 도망을 갔단 말인가?”

주인의 말을 듣자, 마른 남자는 바로 몸을 돌려 부하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얼른 가서 대인께 보고 드려라. 정보대로 야율제가 수도에 들어왔다고.”

관복 차림의 남자는 그렇게 명령한 뒤, 부하 중 절반은 다루에서 손님들을 조사하게 하고, 나머지 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비를 무릅쓰고 정탐꾼이 남겨 놓은 흔적을 따라갔다.

* * *

황궁.

조계안은 홀딱 젖어 있었다. 주홍색 비단 도포에서는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부랴부랴 황제의 난각에 들어섰다.

“황형.”

조계안은 서둘러 예를 행하고 말했다.

“황형, 야율제가 변경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안에서 누군가와 겨룬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북요의 남원대왕 야율제 말이냐? 이미 수도에 들어섰다고? 믿을 만한 정보냐?”

황제도 깜짝 놀랐다.

‘그자가 이미 변경에 들어섰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우리 주나라의 정보망이 이리도 허술했단 말인가?’

“믿을 만합니다! 제 부하가 수횡천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수횡천이 그자에게 손을 쓰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자의 흔적을 찾은 것입니다.”

조계안은 조금 낙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야율제의 행방을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수횡천의 덕을 본 셈이었다.

수횡천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조계안의 정탐꾼이 그 다루를 지나가더라도 야율제의 행방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횡천? 그자가 왜 야율제에게 손을 썼다는 말이냐?”

무림맹주가 변경에 들어온 일에 대해서는 황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횡천이 변경에 온 이유를 알고 난 뒤, 더는 그의 동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돈 때문에 변경에 들어온 가난뱅이 무림맹주는 큰 영향력이 없었다.

“수횡천이 먼저 손을 썼습니다. 아마도 수횡천이 무심결에 야율제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이겠지요.”

조계안도 그 나뭇잎을 보았다. 만약 수횡천이 정말로 사람을 다치게 할 생각이었다면,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나뭇잎은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로 보건대, 수횡천은 애초에 최선을 다해 상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횡천에게 감사해야겠군.”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쾌하다는 기색을 비쳤다.

“북요 사절단이 변경에 오는 일은 줄곧 장봉이가 책임지고 있었다. 야율제가 변경에 들어오도록 전혀 몰랐단 말이냐? 육장봉더러 당장 입궁하라 해라.”

“황형, 이 일은 육장봉과 무관합니다. 야율제가 변경에 섞여 들어오게 된 것은 제 불찰입니다.”

조계안은 평온하게 말했다.

그는 육장봉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고 희생양으로 삼을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지금 너희 중 누구의 잘못인지 따질 때가 아니다. 일단 장봉이 더러 입궁하라 해라. 야율제를 찾아낼 방법을 생각해 보자. 다른 건 나중에 다시 따지겠다.”

황제는 화를 삭이고, 칭찬하는 눈빛으로 조계안을 바라보았다. 요즘 조계안이 육장봉을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방금 보인 조계안의 태도는 황제를 안심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짐의 아우는 역시 훌륭하군. 장봉이에게 날을 세우는 것도 그냥 형제들끼리 다투는 바람에 심통을 부리는 거겠지.’

“네, 황형.”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계안은 황제에게 해명할 여유가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궁을 나가더니, 전서구로 육장봉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명령했다.

* * *

이 무렵, 육장봉은 광원사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월령안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혜능 대사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둑판 위에서는 흑돌과 백돌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좀처럼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바둑을 두는 두 사람은 여유로웠다. 가끔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보아하니, 시주께서는 결과를 기다리지 못할 모양이오.”

혜능 대사가 흑돌을 집어 들더니,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내려놓았다. 하지만 흑돌을 내려놓은 곳은 바둑판 위가 아니라 자신의 앞쪽이었다.

육장봉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혜능 대사를 보았다. 그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육이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장군, 폐하께서 속히 입궁하라 하십니다.”

“무슨 일이냐?”

육장봉은 혜능 대사에게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육이는 혜능 대사를 힐끔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원대왕 야율제가 변경에서 나타난 것을 정탐꾼이 발견했답니다.”

“야율제? 내가 그자를 얕잡아 보았군.”

육장봉은 멸시하듯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혜능 대사, 저는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만약 제 친구가 찾아오거든 제가 곧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대장군, 왜 억지로 강요하려 하시오?”

“저는 저 자신만 믿을 뿐,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대사께서 기다리지 못할 거라고 하시면, 기다리지 못하는 겁니까? 그럼 반드시 기다려 보이지요.”

육장봉은 이 말을 남기고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혜능 대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떤 씨를 뿌렸느냐에 따라 어떤 열매가 나는 법. 대장군,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오.”

날씨는 점점 더 음침해졌다. 빗줄기도 점점 거세졌다.

육장봉은 빗줄기가 자신의 몸 위로 쏟아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훌쩍 날려 말을 타더니, 열두 명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산에서 내려갔다.

* * *

하지만 이 무렵 월령안은 이제껏 없던 위험에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성 밖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성 밖의 진흙탕 길은 지나가기 어려웠지만, 마차는 점점 더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월령안은 갈림길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마부가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제야 변고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저 마부의 수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동시에 신의 손불사에게서 비싼 가격으로 사들인 암기를 살그머니 꺼냈다.

막 마차의 문밖으로 무기를 조준했을 때였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마차 바퀴가 미끄러졌다.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마차 바퀴가 비틀리고, 마차가 옆으로 쏠렸다. 마차를 끌던 말도 따라서 미끄러지며 옆으로 기울었다.

마부는 상황을 보자 서둘러 일어섰다. 힘껏 고삐를 당기며 말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월령안이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나올 줄은 몰랐다.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은색 구슬로 마부의 무릎을 맞췄다.

“으악!”

마부가 비명을 질렀다. 두 다리에서 힘이 쭉 풀렸다. 손에 든 고삐도 놓쳤다. 그대로 나뒹굴고 말았다.

월령안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마차의 다른 한쪽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쿵, 하는 소리가 울리며 흙탕물에 넘어졌다.

그녀는 아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흙탕물 속에서 몸을 굴렸다. 마차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퍽!

거의 동시에, 고삐 풀린 말도 넘어졌다. 말이 끌고 있던 마차도 함께 옆으로 넘어졌다.

“으악!”

마차가 넘어지며 마부의 몸 위를 깔아뭉갰다. 숲속의 새들도 마부의 비명을 듣고 깜짝 놀랐다. 큰비를 뚫고 푸드덕거리며 밖으로 날아갔다.

숲속에는 자객들이 잠복해 있었다. 그들은 마부의 비명을 듣자 바로 뛰쳐나왔다.

“변고가 생겼다. 얼른 가 봐. 길목에 있는 놈들에게 거기를 잘 지키라고 전해. 절대 그 여자에게 도망칠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

* * *

월령안은 흙탕물에서 기어 나왔다. 마차에 깔려 기절한 마부를 보았다. 월씨 저택의 마부가 맞았다. 그제야 마부가 누군가에게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돈은 역시 만능이 아니었다. 적어도 영원한 충성심을 살 수는 없었다.

월령안은 자조적으로 피식 웃더니, 재빨리 앞으로 걸어 나갔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비수를 꺼내 말의 몸에 씌워진 고삐를 잘랐다. 그리고 넘어져 있던 말을 끌어당겨 일으켜 세웠다.

월령안은 사탕 한 알을 꺼내 말에게 먹였다.

“내 친구, 걸을 수 있겠어?”

다친 말은 혀를 내밀어 월령안의 손에 든 사탕을 날름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너만 믿을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