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계산이 빠른 사람
“월 낭자, 감사합니다. 저희는 여기서 보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외부에 소문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월령안이 이렇게 사리에 밝은 것을 보자, 부 대인은 그녀에 대한 호감이 약간 늘었다.
자고로 장사꾼들은 자신의 장부와 이윤에 대해 감추기 마련이었다. 남들이 자신의 돈 버는 방법을 알아낼까, 자기가 얼마나 벌었는지 알아낼까 두려워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들에게 흔쾌히 장부를 보여주었다. 이 흉금(胸襟)과 박력을 보니, 그녀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들께서는 천천히 보세요. 지금 바로 가게들의 재고를 정리해 드릴게요.”
월령안이 보기에, 이 두 대인은 오늘 다섯 가게의 재고와 인수 금액을 파악하지 않고는 떠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입만 아프게 자신의 사정을 해명하고 양해를 바라느니, 차라리 빨리 움직여 가게들의 수익과 재고 현황을 전부 계산해 주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견적을 알려 주고 보낼 셈이었다.
아까 가게 사장들과 함께 장부를 한 번 맞춰 보았다. 지금 할 일은 각 장부의 합산이었다.
월령안은 숫자에 매우 민감했다. 기본적으로 한 번 본 것은 모조리 기억할 수 있었다.
부 대인과 그의 동료는 이 가게들의 일 년 동안의 매상과 이윤을 보고 있었다. 그때 월령안은 가게가 개업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매상, 원가와 이윤을 합산했다.
이윤 합계를 정리한 다음에는 재고 금액도 계산했다. 또 다섯 가게의 견적을 적어 두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부 대인과 그의 동료는 여전히 장부를 보고 있었다. 월령안은 문제가 생길까 염려하여 주판을 들고 다시 맞추어 보았다.
월령안은 틀린 데가 없음을 확인했다. 총 장부를 부 대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부 대인, 이건 가게들의 매해 매상과 이윤의 합계입니다.”
말을 마치고 또 다른 책자를 꺼냈다.
“이건 오 년 동안의 재고와 견적입니다. 부 대인께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월 낭자, 이걸 전부 계산한 거요?”
부립엽은 장부를 받아 들었다. 첫 번째 가게의 매상과 이윤을 보고, 이 가게의 재고도 확인했다. 그리고 동료가 계산한 합계와 비교해 보았다.
두 금액이 똑같았다.
그의 동료는 대인이 특별히 호부(戶部)에서 빌려온 사람이었다. 호부에서 제일가는 계산의 신, 동신산(董神算)이라 불리는 동효(董驍)였다.
‘동신산은 이제야 한 가게의 계산을 끝냈는데, 월령안은 벌써 다 했단 말인가? 이 속도가 말이 되나?’
부 대인은 동효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한 번 보리다.”
부 대인의 뒤에서 말없이 있던 호부에서 제일가는 계산의 신, 동 대인이 부 대인의 손에서 장부를 건네받았다. 그는 자세히 뒤져보더니, 잠시 후 장부를 덮었다. 월령안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심사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이건 월 낭자께서 방금 계산해 낸 거요?”
그는 세상에서 자기보다 계산을 더 빨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어떤 사람인가. 단번에 문제점을 알아채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방금 계산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계산을 해서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게의 소유주일 뿐, 가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장이 아니었다. 계산이 빠른 것은 그녀의 강점 중 하나일 뿐, 먹고 사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뽐낼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의 대답을 들은 동효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이까.”
‘그럼 그렇지. 세상에서 나보다 계산을 더 빨리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월령안은 단지 미리 계산해 두었을 뿐이야.’
월령안은 웃음을 지었다. 한 시진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가게 하나의 계산이 겨우 끝났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여러분, 이 가게들의 장부와 견적은 제가 잘 적어 두었습니다. 두 분께서는 장부를 가지고 돌아가셔서 살펴보시는 편이 어떨까요? 문제가 있어도 바로 펼쳐 보실 수 있게요.”
그녀는 성 밖으로 빨리 나가야 했다. 가게 다섯 군데의 장부를 전부 확인하려면, 이 둘의 속도로는 하루로도 모자랐다. 그녀에게는 이 둘과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월 낭자께서는 급히 외출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부립엽은 상관이 내린 명령을 떠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떠보았다.
“부 대인, 그럴 리가요. 이렇게 큰비가 쏟아지는데 어떻게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월령안은 큰소리로 웃으며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상인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법이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부 대인이 그녀의 외출을 막으려 하는 것쯤은 진작 눈치챘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하긴 그렇군요. 이렇게 큰비가 쏟아지는데 외출하기가 쉽지 않겠어요. 우리도 장부를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가져가는 도중 젖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낭자께서 조용한 곳을 내어 주시면 저희는 계산을 마치고 가겠습니다.”
월령안의 말을 듣고, 부립엽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장부를 보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월령안더러 계속 함께 있으라고 하기도 미안했다. 아예 다른 빈방을 내어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모두 아무 탈 없이 자기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상관의 명령에 따라 월령안이 외출하지 못하도록 지켜볼 수 있다. 시시각각 돈을 벌어들이는 월씨 가문 가주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죠!”
추밀원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보니, 월령안도 상대방의 체면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인에게 방 하나를 정돈하고 다과를 가져가라고 일러두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 사람도 보내라고 했다.
* * *
월령안이 부 대인에게 외출하지 않겠다고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건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 둘에게 자리를 마련해준 뒤, 큰비를 무릅쓰고 밖으로 나갔다.
정오까지는 아직 반 시진이 남았다. 서두르면 점심이 좀 지나서 광원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길에 행인은 없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마부는 마차를 빨리 몰 수가 없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천천히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속도라면 절대 약속한 시간까지 광원사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큰 빗속에서 너무 빨리 달렸다가는 마차가 미끄러져 뒤집힐지도 몰랐다. 그러면 더욱 낭패였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아직도 밖에 사람이 다니네요? 변경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걸까요?”
동순 거리에서 한가롭게 돌아다니던 수횡천과 소육자는 큰비 때문에 주루에 발이 묶여 있었다. 마침 심심하던 차였다.
마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자, 소육자는 호기심이 들어 더 눈여겨보았다.
“저 마차는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큰비가 내리는데도 별로 젖지도 않았고 속도도 느리지 않네요. 변경이 역시 번화한 곳인가 보네요. 길거리의 낡은 마차 하나도 평범하지 않아요.”
소육자는 연신 감탄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수횡천도 잡아끌어 함께 구경했다.
“저건 우리 아가씨의 마차입니다.”
두 사람과 함께 외출한 집사가 소육자의 말을 들었다. 그도 힐끔 보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가씨가 쓰는 물건은 겉보기에는 평범했다. 하지만 물건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물건들의 색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의 일 처리 방식은 늘 조용했다. 다른 사람이 시샘을 낼까 걱정해, 평소에 쓰는 물건들도 평범하게 보였다.
“월 누님이오? 비가 이렇게 크게 내리는데 누님께서 왜 외출하신 거죠?”
소육자는 월령안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맹주, 아니면 우리 가서 도와드릴 게 있나 물어볼까요?”
“월 낭자가 알아서 하겠지.”
수횡천은 잠시 생각하다 거절했다.
월령안은 아침 식사 때 외출하겠다고 말을 했었다. 소육자는 분명 까먹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월 누님이 여인의 몸으로 이렇게 큰비를 무릅쓰고 외출했잖아요. 분명히 급한 일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도울 일이 있는지 물어보러 가요.”
‘비가 이렇게 크게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차라리 따라가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나 보는 게 어때요? 우리가 먼저 다가가 호의를 보여주면, 앞으로 협력할 때 누님이 좀 양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호의를 보여주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소육자는 계속해서 수횡천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함께 가자고 눈치를 줬다.
하지만 수횡천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이를 본 집사가 허허 웃으며 답했다.
“수 맹주와 남 소협께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가씨께서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 건 아닙니다. 성 밖에서 누굴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뿐입니다. 약속을 어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누님을 성 밖으로 불러낸 사람도 너무 하네요. 비가 이렇게 크게 오는데, 다른 날에 만나면 안 된대요?”
소육자는 약속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집사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의 일을 어떻게 전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날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냥 비가 내린 것뿐이다. 장사할 때는 칼날이 내리든 눈이 내리든, 가야 할 길은 가야만 했다.
“맹주, 우리도 돌아가요. 이렇게 큰비가 내리니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네요. 여기에 가만히 있으려니 재미도 없어요.”
소육자는 월령안의 마차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부루퉁해서 제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가자.”
수횡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가 바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날이 저물지도 몰랐다.
세 사람은 비를 맞으며 월씨 저택으로 돌아왔다. 하인이 서둘러 나와서 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들을 건물 안으로 바래다주고 나서야 하인들이 물러갔다.
수횡천과 소육자는 처소로 돌아왔다. 하인들은 이미 목욕물과 깨끗한 옷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소육자는 목욕을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탁자 위에 간식, 과일, 생강차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돈이 있으니 정말 좋네요. 마치 신선놀음하는 것 같아요. 여기 더 있다가는 떠나기 아쉬울 것 같아요.”
그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봤겠는가.
비를 맞고 집에 돌아왔는데, 뜨끈한 목욕물이 데워져 있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깨끗한 옷이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소육자는 털썩 자리에 앉아, 간식들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수횡천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소육자는 서둘러 그를 불렀다.
“맹주, 이 간식이 아주 맛있어요. 고기 소가 들었어요……. 얼른 드셔 보세요.”
수횡천은 그에게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더니 불쑥 말했다.
“내가 잠깐 나갔다 올 테니 넌 싸돌아다니지 말고 여기 가만있어라.”
말을 마친 수횡천은 빗속으로 뛰어갔다. 소육자는 간식을 든 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