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강호를 주름잡고 싶지 않으세요?
강호는 너무 폐쇄적이었다. 상인인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소식에 훤했다. 그래도 수횡천을 제외한 강호 인사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재자나 명기는 달랐다.
무슨 강남사대재자(江南四代才子)요, 진회십팔염(秦淮十八艶)이요, 변경 제일재자요(汴京第一才子), 제일명기(第一名妓) 등등 이들의 이름을 모든 사람이 안다고는 못 하더라도, 거리에 나가 물어보면 열에 일곱은 알고 있었다.
수횡천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자, 월령안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수 맹주, 만약 이번 무림대회에서 무림맹이 ‘강호 사대 소협(少俠)’, ‘강호 삼대 미인’, 그리고 ‘강호 십대 신인 고수’들을 선출해 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또 강호 십대 신인 고수들을 뺀 나머지는 구경꾼이 꽃을 던져 투표해서 선발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말한 월령안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선발된 강호 삼대 미인, 사대 소협을 위해 풍류가 유경장이 시를 짓고, 변경 십대 명기(名妓)가 노래를 부른다면요? 강호의 젊은 협객들과 미인들의 마음이 동하지 않겠어요? 또 ‘십대 신인 고수’에 등극한 사람들은 모두 주검산장에서 만든 명검을 하나씩 받을 수 있게 하는 거예요. 등수가 높을수록 더 좋은 검을 받을 수 있다면, 강호 사람들도 신나서 달려들지 않겠어요?”
월령안이 말을 마치자마자 소육자가 흥분해서 손을 들었다.
“누님! 저요! 저도 나가고 싶어요! 제가 강호 사대 소협이 되어 십대 명기들이 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싶어요!”
“그 얼굴로는…….”
월령안은 소육자를 훑어보고 웃으며 말했다.
“좀 어렵겠지만, 돈을 쓴다면 기회가 없지는 않을 거예요.”
“예?”
소육자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여기서 왜 돈 얘기가 나오는 거지?’
“이름을 날리려면 일단 외적 조건이 뛰어나야 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에게 꽃을 투표하게 하려면, 돈을 써야 하죠.”
수횡천과 소육자의 멍한 표정을 보자,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변경에서 삼 년에 한 번 선출되는 화괴가 되려면, 얼마나 돈을 많이 들여야 하는 줄 아세요?”
“얼만데요?”
소육자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월령안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다.
“삼 년마다 변경의 십대 청루에서는 자기네 간판 기녀를 내보내 화괴 낭자 대회에 참여하게 해요. 이 간판 기녀들이 화루(花樓)에서 한 달간 공연하거든요. 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꽃을 사서 투표할 수 있어요. 나중에 꽃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화괴 낭자가 되는 거죠.
이 년 전, 송아루(頌雅樓)의 불령(拂靈) 낭자가 꽃 삼백만 송이를 받았지요. 꽃 열 송이가 한 냥인데, 삼백만 송이면 자그마치 삼십만 냥이에요! 이건 순전히 한 사람이 받은 꽃값만 계산한 거예요. 이런저런 내기나, 대회가 열리는 한 달 동안의 객잔과 술집의 수익은 따로 있죠.”
“화괴 낭자가 되려면 돈을 그렇게 많이 써야 한다고요?”
소육자는 깜짝 놀랐다.
‘이번 생에는 죽어도 강호 사대 소협이 되지 못하겠구나.’
“그래서 기루를 쇄금굴(鎖金窟 – 돈 뿌리는 굴이라는 뜻으로 매춘하는 곳을 가리킴)이라고도 하잖아요.”
월령안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소육자는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했다.
“가난해서 세상 물정을 몰랐네요.”
수횡천은 미간을 찌푸리고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월 낭자, 화괴 시합의 방식을 무림대회에 쓸 셈이오?”
월령안을 바라보는 수횡천의 깊은 눈매에는 머뭇거림과 번뇌가 가득 들어 있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웃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그럼 이렇게 얘기하죠. 수 맹주, 강남사대재자와 변경오대공자(汴京五代公子)를 아시나요? 저는 이들의 방식을 무림대회에 쓰고 싶어요.”
‘무림맹주라는 수횡천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었구나.’
“낭자,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소.”
자신의 생각을 들키자, 수횡천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수 맹주, 저와 손을 잡고 강호를 주름잡고 싶지 않으세요?”
강호는 고인 물 같았다. 물결 한 점 없이 너무 평화롭고 너무 안정적이었다. 강호에서 돈을 벌려면, 먼저 이 고인 물부터 휘저어 살려내야 했다.
사람은 체면이 없으면 죽고, 나무는 껍질이 없으면 죽는다.
사람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서 세속의 명리라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적어도 월령안은 자신을 평범한 속물이라고 여겼다.
‘강호를 주름잡다니!’
이 말을 들은 수횡천은 순간 마음이 움직였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사 년 전, 무림대회에 참가해 무림맹주가 되었을 때는 무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주류에서 밀려나서 생기라고는 전혀 없어진 무림맹을 최고의 자리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여러 문파가 개성을 뽐내고, 인재들이 속속 배출되던 전성기를 다시 이룩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이루려면, 강호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해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림맹주가 되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무림지존,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앉아보자, 이 일들이 상상처럼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무림맹주이자 무림지존으로,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여러 문파에서도 그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 그러나 힘이 닿는 데까지, 자신의 이익이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봐주었을 뿐이다. 그 이상은 상상도 하지 말아야 했다.
무림맹주라는 감투가 대단하기는 했다. 그러나 권리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심지어 맹주가 되기 전보다 자유롭지도 못했다.
월령안의 말에 그는 설렘을 느꼈다.
무림의 전성기를 다시 이루고 싶다면, 일단 강호를 주름잡을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강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수횡천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었다. 무림을 전성기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수횡천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월 낭자, 낭자가 하는 모든 일이 우리 강호 인사들에게도 유리하다고 보장할 수 있겠소? 무림맹의 위엄을 되찾고, 무림을 전성기로 되돌리는 게 맞소?”
“수 맹주…….”
월령안은 난감해졌다.
“저는 단지 장사꾼일 뿐입니다.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려는 것뿐이죠. 다른 것들은…… 맹주의 일이지요.”
“월 낭자,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소.”
수횡천은 정의롭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법이 없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했다.
“수 맹주, 지난날 무림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무림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지도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상인일 뿐이니까요.”
‘수 맹주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녀에게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럴 능력이 있다 해도 무림맹을 다시 세우는 데 그 능력을 쓰라는 법은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무림인도 아닌데, 무림에 소속감을 느낄 리도 없었다. 무림의 각 문파가 죽든 살든, 번창하든 말든 그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월령안은 수횡천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의 화를 돋울까 걱정하지도 않고, 아예 입바른 말을 다 해 버렸다.
“수 맹주, 제가 하는 사업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도, 법률에 어긋나는 일도, 타인의 이익에 손해를 주는 일도 아닙니다. 맹주께서 보시기에는 이걸로 부족한가요?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돈을 내서 무림인들에게 일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쌍방이 원할 때만 시키려는 것이지 절대 억지로 시키려는 건 아니에요. 거래가 끝나면, 각자 필요한 것을 얻게 될 뿐이죠.
무림의 전성기를 재현하는 건 맹주께서 하실 일이죠. 일개 상인인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제게 책임이 있다 한들, 무림을 책임지는 건 아니에요. 상인으로서 저의 책임은 백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죠!”
“그래서 낭자가 말한 협력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우리 무림인들을 위해서는 아니라는 뜻이오?”
수횡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허!”
월령안 얼굴의 웃음기도 사라졌다.
“수 맹주, 제가 무림에서 장사를 하면 할 일이 없는 협객들에게 일거리를 찾아 주고, 돈을 벌게 해 줄 겁니다. 큰 대가를 치르고, 모두가 이름을 날리게 돕는 것인데……. 제가 또 그들을 위해 뭘 더 해야 한다는 건가요?
설마 그들을 조상님 모시듯 하란 말인가요? 돈과 힘을 쏟아 유명한 스승을 찾아다 그들을 가르치고, 또 귀한 무기까지 구해서 바치라고요? 그들의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한마디에, 저는 돈과 힘을 들여 모든 걸 마련해 줘야 도와주는 셈인가요? 만약 그런 거라면, 송구합니다. 수 맹주, 우리는 협력할 수 없겠네요.”
월령안이 비꼬듯 말하고 일어섰다.
“물론, 무림대회를 열 돈은 그대로 드릴 수 있어요. 수 맹주의 무림 사업에 대한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시죠.”
“월 낭자, 내 뜻은 그게 아니오.”
월령안이 불만을 토로하자, 수횡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수 맹주는 그렇게 해오셨고, 저한테까지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시고 계시잖아요, 아닌가요?”
월령안은 무림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육자의 말로 미루어 보아, 수횡천이 이 몇 년간 어떤 식으로 일을 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진정한 협객이었다.
그녀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수횡천처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헤프게 써 버릴 금은보화가 없었다.
“낭자,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소.”
수횡천도 자신이 이 몇 년간 해 온 일이 얼마나 적절하지 못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돈을 주는 방법 말고는, 그들을 도와줄 방법을 몰랐다.
수횡천이 한 걸음 물러서자, 월령안의 어조도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수 맹주, 지금도 저와 협력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수횡천이라는 이 사람은 동업자로서는 별로였다. 그러나 세상만사라는 게 생각과 뜻대로 안 될 때가 대부분이다.
그녀도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장사를 하다 보면 별별 인간이 다 있었다.
이념이 다른 것은 괜찮았다. 그녀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생각이 아무리 맞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월 낭자, 우리에게 상세한 계획을 알려줄 수 있겠소? 대체 낭자가 무림맹으로 뭘 할 건지 알고 싶소. 우선 낭자의 생각을 알아야, 나중에 불필요한 분쟁을 줄일 수 있지 않겠소.”
월령안은 지금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협력자였다. 수횡천은 쉽사리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죠! 사흘, 제게 사흘의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무림과 무림맹의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상세한 계획을 세워서 알려 드리죠.”
월령안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