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무림에 좀 흥미가 있으신지
편지를 읽고 난 월령안은 수횡천을 훔쳐보았다. 예상대로 수횡천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월령안은 어색하게 편지를 치우고 말했다.
“저기……. 수 맹주, 우리가 육 장군의 말을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편지를 자신의 자리가 아닌, 수횡천 앞에서 펼쳐본 것을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난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괜찮소. 육장봉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오. 나는 아주 가난하오. 무림맹도 가난하기 마찬가지요.”
수횡천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호방하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고, 밀물 다음에는 썰물이기 마련이죠. 누구라도 주머니 사정이 빠듯할 때가 있지요. 가난은 그저 한순간일 뿐입니다.”
월령안도 수횡천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수 맹주께서는 저와 어떤 거래를 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까?”
수횡천의 신분을 확인한 월령안은 사뭇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거래, 그것도 무림인과 하는 거래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게 기회임은 분명했다.
‘무림이 그렇게 크니, 장사를 할 기회도 많겠지.’
예전의 그녀라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나 다른 세력에 쉽사리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수완으로는 어디서든 돈을 벌 수 있었다.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청주의 범씨 가문과 싸워야 했다. 또 아주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라면, 기회가 왔을 때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어떤 거래일까?’
월령안의 말을 듣자, 수횡천의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입에 발린 소리라도 하려고 했으나, 입만 벙긋거렸을 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무림맹이 시월에 무림대회를 개최하는데, 우리는…… 돈이 없소.”
월령안은 멍해졌다.
“수 맹주의 뜻은…….”
‘거래가 아니라 동냥하러 온 거였어? 육장봉이 수횡천을 소개해 준 게 내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나? 내게 상로를 개척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었어?’
그녀가 육장봉을 너무 높이 평가한 모양이었다.
“월 낭자…….”
수횡천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 아가씨를 괴롭히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무림맹의 처지를 생각하자, 염치를 무릅쓰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좀…….”
뒤에 서 있던 소육자는 수횡천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맹주는 항상 이렇게 직설적이셔서 탈이야. 입만 열면 만 냥이 넘는 돈을 그냥 달라 그러는데, 어떤 얼간이가 아무 대가 없이 그 큰돈을 내 주겠어? 이 월 낭자가 장사를 그렇게 크게 한다지. 딱 봐도 영특해 보이잖아. 이런 사람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가 없잖아!’
소육자는 더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나섰다. 지금 그가 나서면 수횡천의 체면을 깎는 꼴이 될지도 몰랐지만, 다급히 끼어들어 수횡천의 말을 잘랐다.
“월 낭자, 우리 맹주의 뜻은 낭자께서 무림에 좀 흥미가 있으신지 여쭈는 겁니다. 무림의 명문 정파의 비급(秘笈)이나 보전(寶典)을 배우고 싶지 않으신가요? 무림 명문의 협객을 가까이서 만나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신비스러운 무림맹을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 낭자의 하인들 발걸음이 가벼운 걸로 보아하니 싸움도 잘하지 못할 터인데, 호원 몇 명을 구해 드릴까요? 우리 무림맹에는 여러 분야의 고수들이 많아요. 꼭 낭자의 마음에 드실 겁니다!”
소육자는 말하면서 월령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웃기만 할 뿐 관심을 보이지 않자, 기가 죽었다. 어떻게 월령안을 설득할지 다시 고민하던 중 번뜩이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월 낭자, 그날 낭자께서 소씨 가문에 배상을 받으러 갔을 때, 마침 저희도 길을 지나는 중이었어요. 낭자께서 소 승상의 사당을 부수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 십만 냥을 주신다면 저희도 해 드릴 수 있어요.”
소육자는 이 말을 할 때, 마치 돈 덩어리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곧바로 소 승상의 저택으로 달려가 사당을 부술 기세였다.
월령안은 진심으로 경악하고 말았다.
‘이 무림맹 맹주는 도대체 얼마나 가난한 거야?’
몸을 팔고, 가산을 파는 것은 그렇다 치자. 소 승상 댁의 사당을 부수는 일마저 하겠다고 나설 정도라니. 돈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꼴이었다.
월령안은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눈앞의 이 땟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한 소년이 소 승상 저택으로 달려가 사당을 부술까 두려웠다. 그녀는 다급히 손을 들어 소년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소년이 조금 진정되자, 그제야 월령안이 말을 물었다.
“협객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월 누님. 제 성은 남씨로, 남육(南六)이라고 합니다. 남산파(南山派)의 제자입니다. 절 소육자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소육자는 붙임성 있게 바로 월령안을 누님이라고 불렀다.
월령안은 자신을 뻔뻔스럽다고 자부해왔다. 평소에 거래를 할 때 자신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오라버니, 숙부니 백부니 불러왔지만 소육자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소육자, 그……. 저는 무공 연마나 무공의 비급이니 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소 승상의 은원도 일단락을 지었어요. 그 댁 사당도 부수지 않을 겁니다.”
그날 그녀는 핍박에 못 이겨 화가 난 나머지 악에 받친 말을 내뱉었을 뿐이다.
소 승상이 한 걸음 물러섰으니, 그녀도 굳이 얼굴 붉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소 승상의 사당을 부수는 지경까지 간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다. 이는 소씨 가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일임을 잘 알아야 했다.
굳이 필요가 없다면, 그녀도 그렇게 많은 소씨 가문 사람들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월 누님, 그럼 어디에 관심이 있나요? 말씀해 보세요. 말씀만 하시면 뭐든 찾아 드릴게요. 천산설련(天山雪蓮)이든, 한담무련(寒潭霧蓮)이든 돈만 주신다면 다 찾아다 드릴 수 있어요. 만약 병기를 좋아하신다면, 주검산장(鑄劍山莊)의 장주(莊主)에게 직접 만들어 드리라고 할게요. 분명 예쁘고 멋있을 거예요. 만약 병기 모양을 한 게 싫으시면, 장신구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할 수도 있어요.”
소육자는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
“강호가 지금…… 이 정도로 힘든가요?”
월령안은 수횡천을 바라보았다가 또 소육자를 바라보았다. 수횡천은 굳은 얼굴이었지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월령안은 참다못해 묻고 말았다.
“어렵습니다! 아주 어렵습니다!”
수횡천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육자는 나이가 어리다 보니 거리낄 게 없었다. 월령안과 얘기가 통할 것 같자, 창피한 줄도 모르고 바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월 누님, 모르시죠? 저희도 예전에는 그래도 풍족하게 지냈었어요. 그런데 삼 년 전에 무슨 남상권인가 하는 녀석이 나타나서는 강호의 사악한 무리들을 모아 천목신교(天木神敎)를 세웠어요.
그 뒤로 저희가 현상금을 타지 못하게 된 건 둘째 치고, 그놈들이 우리 밥줄까지 빼앗았어요!
근 삼 년 동안 정말 쪼들리며 살 수밖에 없었어요. 하루하루 빠듯해서, 있던 돈도 줄기만 할 뿐, 불어날 줄 모르고요.”
소육자는 기운이 쭉 빠졌다.
“평소라면 그나마 낫죠. 저희는 사내라서 어찌어찌해도 배는 곯지 않잖아요. 하지만 곧 무림대회를 열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무림대회를 열 방법이 없어요. 남상권이 이 꼴을 보면 저희를 얼마나 비웃을지 몰라요. 또 여러 문파의 사람들도 우리 맹주께 실망하겠죠.”
“다른 재산은 없어요?”
월령안은 강호에 대해 잘 몰랐다. 강호 사람들이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지도 잘 몰랐다. 단지 이야기책에 본 소림파(少林派)니, 무당파(武當派)니 하는 곳들은 모두 재산이 넉넉했다.
소육자는 어른스럽게 탄식했다.
“큰 문파라면 재산을 갖고 있지만, 작은 문파의 재산으로는 연명하기도 힘들어요. 큰 문파라도 재산에만 의지하면 안 돼요. 제자가 많을수록 돈 쓸데도 많잖아요.
월 누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가난한 자는 학문을 익히고, 부유한 자는 무예를 익힌다는 말이 왜 나왔겠어요? 무술을 연마하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들어요. 몸을 단련하려면 잘 먹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연습하다가 다칠 일이 많잖아요. 약을 사는 데도 돈이 많이 들어요. 그리고 무기도 필요하죠. 월 누님, 보세요…….”
소육자는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의 패검을 끌러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제 이 검은 주검산장의 대사부가 만든 건데, 오천 냥이 들었어요!”
말을 마친 소육자는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횡천을 가리켰다.
“제 검은 싼 편이에요. 우리 맹주의 검은 주검산장에서 전해 내려오는 십대 명검 중 하나인데, 십만 냥이나 하는걸요. 월 누님, 보셨죠? 그깟 재산에 의지해서 어찌 먹고 살 수 있겠어요?”
그는 자신들이 가난하기는 해도, 몸값은 비싸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강호에서 살아남기가 정말 쉽지 않네요!”
월령안은 수횡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 남루한, 아니, 자유분방한 차림을 한 무림맹주의 검이 십만 냥이나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는 진흙 속의 진주였다. 진정한 실력자는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소육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낌 없이 말했다.
“월 누님, 누님 말이 맞아요! 강호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아요. 특히 우리 맹주는 더욱 힘들어요. 정의를 위해서라면 재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선행을 즐겨 하시지요. 이 몇 년 동안, 우리 맹주가 가산을 털어 남들을 돕지 않았더라면, 저희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을 거예요.”
월령안은 수횡천에게 포권을 하며 진심으로 칭찬했다.
“수 맹주의 정의로움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나는 단지 본분을 다했을 뿐이오. 월 낭자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수횡천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신이 전혀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였다.
이 모습을 본 월령안은 수횡천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그녀는 선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선행을 베풀더라도 모종의 목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은양당에 음식을 보내고,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한 일도 모두 원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가 수횡천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그녀는 고상한 품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상한 품성을 지닌 사람은 존경했다.
소육자는 분위기가 좋아진 것을 보자, 염치를 무릅쓰고 말을 꺼냈다.
“월 누님, 제가 듣기로 누님께서는 돌도 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다던데, 어떻게 좀……. 저희 무림맹에게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수는 없나요?”
소육자의 말을 들은 월령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수횡천에게 말했다.
“정말 돈벌이 방법을 알려 드리길 원하시나요? 수 맹주, 돈을 버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돈을 버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무술은 연마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럼 돈을 벌 시간과 힘이 있기는 하겠어요?”
“그게…….”
소육자는 주저하며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수횡천도 말없이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웃으면서 적극적으로 말했다.
“사실 무림대회를 열도록 바로 돈을 드릴 수도 있어요.”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무림맹주의 체면을 봐서, 어느 정도의 금액을 내놓는 것으로 수횡천과 친분을 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주 많이는 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