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무림지존 수횡천
월령안은 집사에게 해야 할 일을 분부한 뒤, 은표가 든 나무함을 들고 노인에게 달려갔다. 그가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았다.
“영감님, 영감님……. 제가 은표 가지고 왔어요.”
월령안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 즐겁고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먼저 노인의 귀에 들어갔다.
“조계안이 가져온 것이냐?”
노인은 조계안이 월씨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알아챘다. 그러나 나설 수도, 월령안에게 알려 줄 수도 없었다.
지금의 월씨 저택에 조계안의 종적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에게 미리 알려 줘서는 더욱 안 되었다.
“맞아요.”
월령안은 노인의 옆에 대나무 의자를 옮겨와 앉았다.
“제가 은양당에 미인방을 기부했다고 황제 폐하께서 상을 내리신 거예요. 저 대단하지 않나요?”
“폐하께서 등요 공주의 뒷수습을 해 주신 게냐?”
노인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근심이 깃들어 있는 듯 보였다.
“그러든지 말든지요. 결과적으로 제가 이득을 봤으면 됐죠. 그리고 전 그 자리에서 복수했어요. 전 손해 본 거 없거든요.”
황제가 무슨 이유에서 보상했든지 간에, 월령안은 돈을 받으니 좋을 따름이었다.
“네 말이 맞다. 우리가 이득을 보면 됐지. 미인방을 은양당에 넘긴 게 판 것보다 낫다.”
노인은 월령안의 손에서 나무함을 받아 열어보았다. 나무함 안의 두툼한 은표를 보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돈을 어떻게 쓸 생각이냐?”
“모르겠어요. 요즘 손에 들어온 돈이 너무 많아요. 부동산을 사들일 수도 없고, 새 장사를 시작할 수도 없고,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월령안의 처지에서 보자면, 상인으로서 손에 든 은표를 움켜쥐고만 있다는 것은 큰 수치였다.
돈은 물과 같다. 움직여야만 점점 불어나는 법이다. 손에 움켜쥔 채 가만히 있다 보면 고인 물이 되어 언젠가 말라버릴 것이다.
“그럼 나한테 맡기거라. 나중에 네가 쓸 만한 사람들을 내가 좀 키워 봐야겠다.”
노인은 전혀 사양하는 기색 없이 나무함을 닫았다.
“지금 시작하면 좀 늦은 감이 있긴 하다만, 싹수가 있는 아이들을 찾으면 몇 년 후에는 쓸모가 있을 게다.”
월령안은 청주의 범씨 가문 사람들과 십 년을 싸워야 했다. 지금은 아무 준비도 해 둔 것이 없었다. 이미 한 걸음 늦게 출발하는 셈이었다. 더는 뒤처지면 안 되었다.
“영감님, 연세도 많으시면서 이런 건 뭐 하러 신경 쓰세요? 은표는 저 돌려주세요. 영감님께 드리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은 짐짓 은표를 뺏으려고 했다.
노인이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길러낼 사람들도 절대 평범한 부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쓸 만한 사람을 키워내려면 돈만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심혈도 많이 기울여야 했다. 노인은 나이도 많고, 몸도 좋지 않았다.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노인은 월령안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연세가 많기는 뭐가 많아? 난 이제 마흔이 좀 넘었다고!”
“마흔여덟이잖아요! 젊지 않아요! 의원도 이 몸뚱어리는 환갑노인만도 못하다고 했잖아요. 제 말대로 얌전히 쉬세요, 아셨죠? 제가 영감님 잘 모시려고 돈을 버는 거잖아요? 영감님이 이것저것 걱정하는데, 그럼 몸이 어떻게 나아요?”
월령안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게 나를 더 빨리 늙게 하는구나.”
노인은 월령안에게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자식을 백 년 키우면 구십구 년을 걱정 속에서 보낸다고 하잖니. 네가 내 딸은 아니지만, 내가 키운 아이인데 어떻게 걱정을 말라는 게야? 이 몇 년간 청주 범씨 가문 놈들이 한 일을 조사해 보았다. 그놈들은 전혀 가리는 것이 없더구나. 수법도 독하고 잔인해. 내 눈으로 지켜보지 않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청주 범씨 가문을 조사해 보셨다고요? 고작 범씨 가문 때문에 영감님이 나설 필요가 있겠어요? 제가 있잖아요!”
월령안은 코가 시큰거려서 노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영감님이……. 허구한 날 걱정만 하시는데 그냥 맘 놓고 노후를 누리시면 안 돼요? 제가 효도 한 번 하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십 년 뒤에 네가 청주 갑부가 되어서 월씨 가문의 월반성(月半城)이라는 이름을 되돌려 받으면, 그때 편히 효도하게 해 주마. 어떠냐?”
노인은 인자하게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십 년 뒤에요! 꼭 기다리셔야 해요!”
월령안은 고개를 돌렸다.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약왕 손불사가 노인을 진단한 적이 있었다. 노인의 남은 수명은 십 년이 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의 몸 상태를 월령안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일 때문에 슬퍼하는 게 싫었다. 그는 가볍게 그녀를 밀치고 짐짓 무섭게 말했다.
“됐다. 청승 그만 떨고 어서 가서 돈이나 벌어라. 월씨 가문에 딸린 이 많은 입이 너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데, 게으름을 피울 생각은 말아야지.”
“제가 영감님을 굶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지금 가서 돈을 벌어와 식구들을 먹여 살릴게요. 됐죠?”
마음을 추스른 월령안은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나 다시 허리를 굽히고 노인을 살며시 안았다.
“영감님, 꼭 건강하셔야 해요. 제가 청주 갑부가 되는 것을 꼭 보셔야 해요. 알았죠?”
노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월령안과 약속을 하더라도 지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노인은 월령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징그럽다는 듯이 그녀를 밀치며 말했다.
“됐다, 됐어……. 얼른 가거라. 청승 그만 떨고.”
월령안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그녀를 징그럽다는 듯 밀치자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노인의 뜰에서 나오자, 월령안의 얼굴에 떠올랐던 노기는 어느새 걱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찾는 집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아가씨, 밖에 육 장군의 소개를 받았다는 수횡천이라고 하는 남자가 와 있습니다. 큰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수횡천?”
월령안은 순간 어리둥절해 되물었다.
“그 무림지존이라는 수횡천이?”
‘강호의 인물인 수횡천이 대체 나와 무슨 거래를 하겠다는 걸까? 내가 지금 장사를 접은 걸 모르나?’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인맥을 널리 쌓아야 한다.
월령안은 친구를 사귈 때 머릿수가 많더라도, 격에 맞지 않더라도 꺼린 적이 없었다.
당당한 무림지존이자 무림맹 맹주인 수횡천이 무슨 거래를 하려고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집사에게 수횡천을 화청으로 모시라고 했다.
‘일단 우리 집에 왔으면 손님이지.’
월령안은 수횡천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수횡천과 소육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월령안이 화청으로 들어왔다.
화청에 들어선 월령안은 주인석에 앉은 사람의 남루한 아니,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보았다.
‘무림인에게 어찌 남루하다고 할 수 있겠어? 그들은 성격이 호방하고 자유분방해서 옷차림 따위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것뿐이야.’
주인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검은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색이 바랜 푸른색 옷차림이었는데, 옷깃과 팔꿈치가 해져 너덜너덜했다. 신발에도 구멍이 세 개나 나서 발가락이 삐죽 나와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땟국에 찌든 얼굴을 한 소년은 남루함 그 자체일 뿐이었다. 도저히 자유분방하다고 포장해 줄 수 없었다.
월령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떠보듯이 물어보았다.
“수 맹주?”
그녀가 이렇게 기가 막혀서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쪽 방면으로는 정말 우물 속 개구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녀는 줄곧 무림인들은 번듯한 옷차림에 장검을 들고 다니는 줄 알았다. 품위 있고 늠름하며, 정의감이 넘치고, 강직한 기개와 부드러운 마음을 겸비했으리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녀가 그림책에서 본 무림인은 하나같이 멋있었다. 그리고 부하 일고여덟 명쯤은 반드시 거느리고 다녔다.
하지만 눈앞의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인식을 뒤집어 버렸다.
만약 이 둘이 강호에서 별로 이름이 없고, 그다지 잘 나가지 못하는 인물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분쟁이 생기기 마련이고, 모든 것에는 등급이 나뉘기 마련이니까.
강호에는 위엄을 떨친 협객도 많았다. 하지만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잖게 있었다. 가난하고 힘들게 지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정상이었다.
상업계에서 모두가 돈을 벌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손해를 크게 봐서 가산을 탕진하고, 찢어지게 가난해진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칭 무림지존 수횡천이라며! 무림지존 수횡천도 이렇게 힘들게 살 정도면, 강호는 대체 얼마나 살아남기 힘든 곳인 거야? 이 사람이 사기꾼은 아니겠지? 아니, 사기꾼이라면 조금 더 그럴듯하게 꾸미고 올 수는 없었나?’
그녀로서도 도저히 장단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소생 수횡천이라고 하오!”
수횡천은 주인석에 앉아 있었지만, 월령안이 들어오자 일어나서 포권을 해 보였다.
월령안은 그 자세로부터 약간의 비범한 기세를 느끼기는 했다.
눈앞의 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무림지존 수횡천이라고는 그다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티를 내지 않고 살갑게 맞이했다.
“수 맹주, 앉으세요!”
주인석을 빼앗긴 건 처음도 아니었다. 월령안은 이미 적응이 되어 버렸다.
“월 낭자, 소생이 실례를 무릅쓰고 갑자기 방문했소. 부디 양해해 주시오. 이건 육 장군의 친필 서신인데, 먼저 보시겠소?”
수횡천은 지금 자기가 꼴이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부귀영화도, 지독한 가난도 겪어 보았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남의 시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변경에 온 며칠 동안 적지 않은 부잣집 자제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변경의 사람들이 권력이나 재력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상대방을 평가할 때는 외모나 옷차림을 먼저 보았다.
그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방문했지만, 월령안은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 그것만 보아도 그녀가 충분히 교양이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죠.”
월령안은 비록 티를 내지 않았지만, 이 남자들의 신분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마침 그가 먼저 육장봉의 친필 서신을 꺼내자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간은 아주 귀했다. 사기꾼들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월령안은 편지를 받자, 수횡천이 보는 앞에서 펼쳤다.
편지의 내용은 읽을 필요도 없었다. 봉투와 편지지만 보았지만, 이들은 진짜일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그가 내놓은 편지 봉투는 그녀가 잘 아는 것이었다. 물론, 편지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육장봉을 위해 마련한 문방사우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종이는 보통 풍류가들이 즐겨 쓰는 징심당지(澄心堂紙 – 뽕나무 껍질로 만든 최고급 종이)가 아닌, 그녀가 특별히 주문한 어린 대나무로 제조한 옥구지(玉扣紙)였다.
옥구지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문한 옥구지는 장마다 ‘봉(鋒)’ 자가 새겨져 있었다. 봉투에도 마찬가지였다.
글자는 매우 옅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물론 매일 그녀가 준비한 옥구지를 사용하는 육장봉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편지를 펼치고, 날카롭고 기세 넘치는 글자를 보았다. 월령안은 눈앞의 이 가난뱅이가 바로 수횡천임을 알 수 있었다.
‘흠흠, 가난뱅이라고 한 건 내가 아니야. 육장봉이 그랬지.’
육장봉은 편지에 단 한 문장만 써 두었다.
「이 가난뱅이가 바로 수횡천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