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남매 둘이 오십보백보
황제는 탄식만 했다. 등요 공주를 쳐다보지 않고 또 물었다.
“이제는 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별일 아닙니다. 등요가 월령안한테 트집을 잡으려고 미인방에 찾아갔었습니다. 그런데 월령안이 등요보다 한 수 위라서,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해 버렸지요. 그리고 태후의 세력을 빌려 등요에게 한 방 먹였을 뿐입니다.”
조계안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얼굴에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조사한다 해도 두려울 게 없었다.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거짓말한 게 없었으니까.
“그러면 월령안은 손해 본 게 없다는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흥!”
조계안은 등요를 가리키며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 멍청이가 월령안에게 손해를 보게 할 수나 있겠습니까? 황형, 월령안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월령안이 손해를 보지도 않았는데, 너는 왜 등요를 때리느냐?”
‘아직 어린데 따끔하게 몇 마디 타이르면 될 일을 가지고. 그래도 안 되면 황궁에 가두어 두고, 출궁하지 못하게 하면 그만인데. 어린애가 무슨 소란을 피운다고?’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쟤가…….”
조계안은 등요 공주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멍청이가요! 미인방에서 월령안에게 된통 당했어요. 십만 냥에 가까운 계산서에 서명했다고요. 거기까지면 괜찮습니다. 월령안이 한 수 위니까, 멍청하게 당한 제 탓만 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황형, 등요가 계산서에 서명한 다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무슨 짓을 했단 말이냐?”
황제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등요 공주는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을 느끼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황제 오라버니, 전 아니에요…….”
조계안은 그녀의 새된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하여 말했다.
“이 멍청이가…… 글쎄 돈을 떼먹었답니다. 계산서를 소 승상의 딸에게 던져 주고는 도망쳤다지요. 황형, 쟤가 저렇게 멍청하게 구는 데 제가 좀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황형은 분명 월령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그냥 억지를 쓰는 거라고요!”
조계안이 힘을 주어 때리지 않았지만, 등요 공주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 입을 벌릴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변명하지 않으면 끝장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조계안이 냉소했다.
“월령안이 너 때문에 손해를 봤느냐?”
“아, 니요.”
등요 공주는 속으로 끙끙 앓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래도 공주인데, 그깟 장사치 하나를 못 찍어 누르다니. 분통 터져 죽겠네!’
“월령안이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데, 내가 왜 월령안을 위해서 나서겠느냐? 등요, 다시 한번 말하마. 내가 오늘 너를 혼내는 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네가 멍청하게 굴어서 황실의 체통을 잃었기 때문이다. 육장봉이 나한테 귀띔해 준 것도, 네가 황실의 체통을 지키지 못해서란 말이다. 알겠느냐?”
조계안은 사리에 맞는 말을 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오라버니, 황형이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등요 공주는 화가 나서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제도 참지 않았다. 더는 그녀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파악했다.
조계안은 등요가 황실의 체통을 잃었다는 핑계로 월령안을 대신해 화풀이한 것이었다. 황제는 이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조계안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등요는 공주임에도, 일이 터진 뒤 책임질 생각은 않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확실히 황실에 망신살이 뻗치는 행동이었다.
황제가 원래 조계안을 편애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평하고 공정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오늘 일은 등요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는 등요에게 적공주로서의 대우를 충분히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람이 없었다.
“등요, 짐은 네게 너무 실망했다!”
황제는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온몸에서는 사람을 압박하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공주로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깟 여자 상인에게 망신을 당하다니! 그 정도로 체면을 잃었으면, 만회할 방법을 궁리해도 모자랄 판에 울기만 해! 황실의 체통을 내동댕이친 꼴이 아닌가.’
등요 공주는 깜짝 놀라 한참을 떨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다, 그만 무릎을 풀썩 꿇고 말았다. 무릎이 땅바닥에 사정없이 부딪혔다. 아픈 나머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감히 일어서지 못했다. 황제의 발치까지 기어가서 연신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이럴 때의 황제는 너무 무서웠다. 저번에 그녀가 현음 고모를 입에 담았다가 뺨을 맞았을 때도 지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황제는 꼼짝도 하지 않고 등요 공주를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등요, 황실에서 너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준 건, 너더러 약한 이를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다. 비겁하게 도망이나 치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공주로서 체통을 지키지 않고, 상인을 찾아가 괴롭힌 거로도 모자란단 말이냐? 지고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계산서를 신하의 딸에게 떠넘기다니!
경중의 명문 세가가와 귀족들이 이 사건을 알면 너를 어떻게 볼지 생각이나 해 보았느냐? 그들이 황실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황제는 발로 등요를 밀쳐 버렸다.
“그들은 황실이 무능하고 탐욕스러워 신하의 돈까지 떼먹는다고 할 거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 네 행동을 귀족 아가씨들이 보고서 똑같이 따라 하지는 않을까 생각이나 해 보았느냐? 그들이 아랫사람을 착취하고, 마음대로 백성들을 모욕하고 압박하지 않겠느냐?”
“황형, 전 아니에요……. 제가 정말 안 그랬어요!”
등요 공주는 놀라 미칠 지경이었다. 황제에게 걷어차였어도 다시 그의 발치까지 기어가 무릎을 꿇었다. 뺨의 통증을 무릅쓰며 서둘러 변명했다.
“황형, 전 월령안을 괴롭히려고 찾아갔던 게 아니라, 전 그저…… 그저…….”
등요 공주는 ‘그저’라는 말만 한참 되뇌었다. 갑자기 좋은 수가 뇌리를 스쳤다.
“오라버니, 전에 제가 월령안에게 춘일연 초대장을 보냈어요. 월령안을 괴롭히려고 미인방에 갔던 게 아니에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본인을 한 번쯤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오리버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처음으로 춘일연을 주최하다 보니, 혹시 변고가 생길까 봐 특별히 월령안을 만나러 간 거예요.
오라버니, 모든 게 오해예요! 정말 오해하셨어요. 전 월령안을 괴롭히지 않았고, 월령안도 저를 골탕 먹인 게 아니에요. 물건은 제가 사고 싶어서 산 거예요. 직금금이 맘에 들어 산 거예요. 월령안이 제게 사기를 친 게 아니에요. 월령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오라버니, 오늘 일은 제가 잘 처리하지 못했어요. 제가 잘못한 게 맞아요. 황형이 절 혼내시는 것도 당연해요. 오라버니, 제가 지금…… 당장 깨진 조각들을 주울게요. 화내지 마세요. 부디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 네?”
등요 공주는 말이 끝나갈 무렵에는 목이 메어 흐느끼고 있었다. 황제가 자기를 싫어할까, 자신을 내칠까 두려웠다.
‘춘일연이라고? 월령안이 춘일연에 참가한다고? 그래서 육이가 육장봉이 춘일연에 참가할 거라고 한 건가? 그 말이 사실이었어? 육장봉은 월령안 때문에 참가하는 건가? 육장봉, 이놈은 뭐 하자는 거지? 월령안과 이혼해 놓고, 춘일연에 참가해서는 뭘 어쩌려고?’
조계안은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육장봉, 이 자식 너무 교활하잖아!’
“등요, 정말로 네 잘못을 알았느냐?”
가련하게 울고 있는 등요 공주를 보고, 황제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황제의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보자, 조계안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네가 계산서를 소함연에게 던져 주지 않았느냐? 소씨 가문 돈으로 산 직금금을 황궁에 가져왔을 텐데?”
“저…… 제가 소함연에게 차용증을 써 주었어요. 오라버니, 내일 소함연에게 돈을 돌려줄 거예요. 저를 믿어 주세요. 돈을 떼먹으려 한 것도 아니고, 도망친 것도 아니고, 황실의 체통도 잃지 않았어요.”
조계안이 자신에게 황실의 체통을 잃었다는 죄명을 씌울까 두려워, 등요 공주는 연신 부인했다.
그랬다. 황제가 온 걸 보고 사실은 그의 손을 빌려 월령안을 된통 혼내서 속풀이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알았다. 짐이 이번 한 번은 믿겠다!”
황제는 등요가 수그러들어 조계안의 뜻대로 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조계안에게 적정선에서 그만두라고 경고의 눈빛을 가만히 보냈다.
‘오늘 일은 등요가 분명 잘못했다지만, 계안이라고 제대로 처리했나? 남매 둘이 오십보백보로군.’
조계안은 눈을 치떴다. 그래도 황제의 체면은 봐주었다.
“됐다. 황형의 얼굴을 봐서 이 정도로 하지. 빨리 주워! 다 주울 때까지는 일어나지 마라.”
조계안은 말을 마치고 다시 황제에게 말했다.
“황형, 우리는 그만 갑시다. 천천히 주우라고 하지요. 감히 요령을 부리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
황제가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등요에게 경고했다.
“등요, 이번만은 믿어 주마. 하지만 다음번은 없다는 걸 기억해 두어라. 알겠느냐?”
사실 등요가 월령안을 괴롭혔는지, 안 괴롭혔는지는 상관없었다. 다만 황실의 공주라면 남을 괴롭혀도 격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등요처럼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된통 당하고 도망까지 치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군!’
이 일이 소문 나면 황제의 체면마저 구겨질 판이었다.
“네, 오라버니.”
등요 공주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황제와 조계안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대례를 행했다.
“등요가 황제 오라버니, 황형을 배웅합니다.”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등요 공주는 자기 조각 하나를 주워 땅에 내동댕이치더니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아악!”
“공주 마마!”
침궁 밖에 있던 궁녀가 등요 공주의 가슴이 찢기는 듯한 비명을 들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일이 생겼을까 봐 서둘러 뛰어 들어갔다.
“꺼져! 다들 꺼지라고! 내 명령이 없이 누구도 들어오지 마! 알았어?”
등요 공주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리고 양손을 있는 힘껏 휘저으며 옷자락을 잡아 뜯었다.
분통이 터지고 원망스러웠다.
“월령안! 그 비천한 계집! 반드시 기억해 둘 거야! 다음번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등요 공주는 울며 욕을 하면서도, 바닥 위의 조각들을 일일이 주웠다.
줍지 않더라도 황제가 모를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황제를 언짢게 만들었으니 모험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 * *
조계안은 황제와 함께 서전을 나섰다. 서전을 나서자마자 황제에게 문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서둘러 월령안의 공적을 자랑했다.
“황형, 월령안이 하루에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했어요. 황제로서 감사의 뜻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라고? 뭘 보여 줘? 네가 등요의 뺨을 두 대씩이나 때린 것도 묵인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하단 말이야?”
황제는 조계안에게 눈을 부릅떴다. 적당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가 조계안의 속셈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저 자기 친동생이니 봐준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