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혼세마왕 조계안
“여봐…….”
육장봉의 얼굴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책상 위의 필묵과 종이, 벼루 그리고 다보격(多寶格 – 골동품 등을 진열하는 진열대)의 새 장식품을 보자 다시 멈칫하고 말았다.
“됐어! 이번만이다. 다음은 없어.”
월령안이 자신을 위해 서재와 뜰을 꾸며준 대가로 도와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물건들을 조계안이 모조리 부쉈지만, 월령안이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것들이었다.
공은 공이고 잘못은 잘못이다. 그는 줄곧 상과 벌을 확실히 해왔다.
월령안에게 공이 있으니, 당연히 기억해 둘 것이었다.
육장봉은 동강난 붓을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섰다. 회랑을 지나 아직 수리가 덜 된 정원을 흘끗 쳐다보고는 눈길을 거두었다.
‘조계안이 내 집을 부숴 놨는데, 폐하께서 돈을 배상하는 정도로 끝내면 그놈을 너무 봐주는 거지. 등요 공주를 떠넘겨 골칫거리를 안겨 주는 거로 이자를 받는 셈 치면 되겠군.’
* * *
조계안은 밖에서 온종일 바삐 돌아다니다가 침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하에게 월령안에게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려던 참이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관이 보고했다.
“전하, 육 장군의 호위병이 뵙기를 청합니다.”
“육장봉의 호위병?”
조계안은 가면을 벗어 얼굴의 흉측한 상처를 드러내더니 짜증스럽게 말했다.
“낮에 금방 만났는데 호위병을 왜 보냈지?”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얼굴의 상처가 그에 따라 움직였다. 촛불 빛에 비친 그 모습은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내관이 힐끔 훔쳐보고는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내관은 들키지 않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 작은 행동은 조계안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하……!’
곁에서 수년간 시중든 내관마저 그의 상처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
‘그래, 내가 무얼 더 바라?’
이 세상에서 그의 꼬마 령안을 제외하면, 모두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다.
“전하께 아룁니다. 월 낭자와 관련된 일이라고 합니다.”
내관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상처를 또 보게 될까 두려워 조계안을 쳐다볼 엄두도 못 냈다.
“월령안이라고?”
조계안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관의 속마음 따위는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서둘러 재촉했다.
“얼른 들라 해라!”
“네, 전하.”
내관이 냉큼 물러갔다.
오래지 않아 육이가 들어왔다. 조계안에게 예를 올렸다.
“조왕 전하, 천추 만세!”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해라!”
조계안은 육이를 흘겨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왕 전하, 오늘 등요 공주 마마께서 미인방에 찾아가셨습니다. 그 바람에 월 낭자는 자신을 보호하느라 미인방을 아무 대가 없이 은양당에 기부하였습니다. 저희 장군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왕 전하께서 등요 공주를 잘 타이르기를 바라신답니다.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저희 장군께서 조왕 전하의 체면을 따지지 않고 직접 손을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육이는 정중하게 말했다. 말투에는 감정의 기복이 드러나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협박과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다.
육이의 말만 들어도 육장봉이 얼마나 화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조계안은 순간 얼굴색이 싹 바뀌었다. 육이를 싸늘하게 흘겨보고는 음침한 얼굴로 말했다.
“월령안과 등요의 일이 너희 장군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너희 장군이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거 아니냐? 육장봉에게 전해라. 이건 우리 조씨 가문의 집안일이다! 한가하면 책이나 좀 읽고, 남의 집안일에는 관심을 끄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봐주지 않을 테니까.”
“전하, 저희 장군께서는 전하와 같은 사부 밑에서 배웠지만, 성적은 전하보다 우수했습니다. 전하께서 저희 장군을 봐줄 능력이 안 되는 거로 압니다만.”
육이는 여전히 감정의 기복이 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상대방이 피를 토할 정도로 화나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조계안은 화내기는커녕 되레 웃었다.
“너희 장군이야 대단하지. 나처럼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는 머저리하고 비교가 되겠느냐? 재간 있으면 춘일연에 참가해 풍류가들하고나 겨뤄 보라 해라.”
이 세상에서 자신을 머저리라고 하는 사람은 아마 조왕밖에 없을 것이다.
육이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소인이 전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변고가 없다면, 저희 장군께서는 올해 춘일연에 참가하실 겁니다.”
그가 오기 전에 장군은 육십이에게 며칠 전에 버렸던 초대장을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봄이 오니, 너희 장군이 드디어 발정이 난 모양이구나. 나를 대신해 너희 장군한테 축하한다고 전하거라.”
조계안이 능글맞게 웃었다.
육이는 여전히 낯빛이 하나도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전하겠습니다. 다른 분부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옛다, 상이다!”
조계안이 손이 가는 대로 허리춤에서 옥패 하나를 끌러 육이를 노리고 던졌다.
“꺼져!”
육이는 옥패를 받아 쥐고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전하, 감사합니다.”
조왕은 입이 걸고 독설을 쏟아부었지만, 씀씀이는 컸다.
이 옥패는 적어도 천 냥 정도는 나갈 것이다. 이번 심부름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아니지……. 내가 언제부터 돈에 눈이 멀었나. 조왕께 상을 받았는데, 가장 먼저 생각한 게 물건값이라니?
이건 내가 아니야!’
육이는 궁 밖으로 나와 손에 든 옥패를 바라보다 묵묵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월 낭자, 정말 여러 사람 잡으셨습니다!’
* * *
육이가 침전에서 나가자, 조계안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냉랭한 얼굴로 측근 시위를 불렀다.
“말해라. 오늘 미인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전하께 아룁니다…….”
시위는 조계안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늘 미인방에서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만약 월령안이 곁에 있었다면, 분명 깜짝 놀라 펄쩍 뛰었을 것이다.
시위가 말한 내용은 대낮에 벌어진 사실과 한 글자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현장감이 있었다.
모두 듣고 난 조계안이 화가 치솟아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 등요, 아주 잘났구나!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어!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했으니, 오늘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겠다.”
조계안은 가면을 다시 쓰고 밖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전하!”
침궁 밖에 있던 하인은 조계안이 화가 치솟은 채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서둘러라. 어서 폐하께 아뢰어라.”
조계안을 시중드는 내관은 그가 서전(西殿)으로 가자, 목적지를 알아챘다. 급히 어린 내관 하나를 붙잡고서 부랴부랴 분부했다.
“조왕 전하께서 서전으로 가셨다.”
어린 내관은 명령을 받자 황제에게 달려갔다.
그 무렵 조계안은 화로 부글부글 끓는 상태였다. 시위의 저지를 무시하고 등요 공주의 침전으로 쳐들어갔다.
“등요, 썩 나와라!”
“전하……. 이곳은 공주 마마의 처소입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조계안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자, 서전의 궁인과 시녀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막아섰다.
하지만 조계안이 어떤 인물인가. 이 혼세마왕(混世魔王 – 원래 불교 용어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왕이라는 뜻. 보통 제멋대로 사고를 치는 사람을 가리킨다)은 화가 나면 황제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랫사람 몇을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꺼져!”
조계안은 하인들을 걷어차 버렸다. 바로 문을 부수고 등요 공주의 침궁으로 성큼 들어섰다.
“전하, 공주 마마께서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밤 동안 등요 공주를 지키는 궁녀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버선 바람으로 뛰쳐나와 두 팔을 벌리고 조계안을 막아 나섰다.
“비켜!”
조계안은 손을 들어 궁녀를 밀치고, 등요 공주의 침실로 다짜고짜 들어갔다.
“황형,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한밤중에 제 침실로 찾아와서 무슨 난리랍니까!”
등요 공주도 조계안의 소란스러움에 잠을 깼다. 화가 나서 서둘러 중의(中衣 – 겉옷 안에 받쳐 입는 옷)를 챙겨 입고 침대에서 내려서서 조계안을 노려보았다.
철썩!
조계안은 등요에게 다가서더니 다짜고짜 따귀를 때렸다.
“등요! 네 간덩이가 보통 부은 게 아니란 걸 오늘에야 알았구나!”
“앗!”
등요 공주는 조계안에게 따귀를 맞자,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갑자기 따귀를 맞자 멍해졌다. 얼굴을 감싸 쥔 채 침대에 엎드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황형, 지금 절 때리신 거예요?”
등요 공주는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벌떡 기어 일어나 조계안에게 달려들었다.
“미쳤어! 감히 날 때려! 왜 날 때려!”
안타깝게도 등요 공주는 전혀 조계안의 상대가 아니었다. 조계안의 코앞까지 달려든 순간, 바로 밀쳐졌다.
“내가 때렸다. 네가 날 어찌할 수 있겠느냐? 등요, 내가 뭐라고 경고했느냐? 네가 육장봉을 좋아하는 건 네 사정이니까, 월령안을 찾아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해 두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했느냐?”
“악!”
등요 공주는 또다시 침대에 거칠게 나뒹굴었다. 이번에는 온몸의 뼈까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몸의 통증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조계안의 말을 듣자 화가 나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등요 공주는 침대 위 도침(陶枕 - 도자기로 만든 베개)을 집어 들고 몸을 일으키더니 다짜고짜 조계안을 내리쳤다.
“황형, 미쳤어요! 나야말로 황형의 여동생, 친여동생이라고요. 그런데 월령안 그 비천한 계집 때문에 절 때려요!”
조계안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도침이 땅에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그는 등요 공주를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으로 차갑게 쳐다보았다.
“내가 미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라. 내가 정말 미쳤으면 넌 벌써 죽었어!”
‘감히 월령안을 비천한 계집이라고 해? 누가 등요에게 그럴 자격을 주었지?’
가면 때문에 등요 공주는 조계안의 얼굴에 떠오른 사나움과 분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조계안이 너무 무서웠다.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등요 공주가 조계안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할지 말지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계안아, 무슨 짓이냐?”
“황제 오라버니, 살려 주세요……!”
등요 공주는 구세주라도 본 듯이 얼굴을 감싸고 황제의 품에 뛰어들었다.
“오라버니, 드디어 오셨네요. 흑흑흑……. 황형이 절 때렸어요. 그리고 절 죽이겠대요. 오라버니, 저 좀 살려주세요!”
등요 공주는 울며 하소연했다. 때맞춰 얼굴에 남은 손자국도 교묘하게 드러냈다. 몸도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황제는 등요 공주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계안에게 눈을 부라려 보였다.
“계안아, 한밤중에…… 웬 소란이냐? 내일 얘기하면 안 되는 일이냐?”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야 할 게 아니냐? 내가 당연히 네 편을 들 텐데. 네가 손해 보게 두겠느냐?’
“황형, 이 일은 저와 등요의 일입니다. 참견하지 마십시오.”
조계안은 얼굴을 굳혔다. 황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계안아! 소란은 그만 피워라.”
황제는 골치가 아팠다.
한밤중에 서전에 들이닥쳐 여동생을 때렸다. 만약 태후에게까지 알려지면, 조계안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잘못한 게 될 것이다.
‘등요를 혼낼 생각이라 해도, 다른 때면 안 된다는 말인가. 왜 하필 한밤중에 이 난리인가.
계안이 이놈이 분명히 일부러 그랬구나. 내가 너무 한가하다 싶어 골칫거리를 만들어 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