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97)화 (97/1,004)

97화 이번 기수 암위는 영 아니로군

돌아가는 길에 소씨 가문의 마차를 맞닥뜨렸다. 마부가 월령안의 뜻을 몰라 속도를 늦춘 뒤 물었다.

“아가씨, 소씨 가문의 마차입니다.”

“한쪽으로 비켜 길을 내주거라.”

월령안은 이런 사소한 부분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세도가들에게 길을 양보하는 것뿐이었다. 힘든 일도 아니었다.

“네, 아가씨.”

마부는 마차를 한쪽 구석으로 몰았다. 소씨 가문 마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소씨 가문 마차가 나는 듯이 달렸다. 길 위의 모든 마차가 한쪽으로 비켜서서 먼저 지나가도록 길을 터 주었다.

월령안은 차창 너머로 미인방 쪽으로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가게 하나를 써서 기쁨을 샀다. 천금을 주고도 기쁨을 사기는 어렵다. 그러니 이 돈은 가치 있게 쓴 게 분명했다.

월령안이 차창을 열고 맞은편에서 오는 마차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몰랐지만, 저 멀리 다루 위에서는 두 남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월령안? 미인방 쪽에서 오는 건가?”

남색 옷차림에 은으로 만든 가면을 쓴 조계안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육장봉은 찻잔을 입가에 갖다 댔다. 그러나 고개만 살짝 숙였을 뿐 마시지는 않았다.

* * *

월령안은 날이 저물기 전에 처소에 돌아왔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괜찮느냐? 등요 공주가 미인방에 찾아가 널 괴롭혔다는 말을 들었다. 웬일이냐?”

“영감님, 절 걱정하셨어요? 오늘따라 제가 들어오는 모습이 평소와 다른가요?”

월령안은 방금 문 안으로 집어넣었던 발을 도로 문밖으로 물리더니, 다시 진지하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역시 제가 들어오는 모습이 좀 달랐나 보네요. 보세요. 이젠 걱정 안 되시죠?”

“얘는, 정말이지…….”

노인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씀씀이가 아주 살뜰했다.

“정말 예쁘죠? 저도 제가 오늘 특별히 예쁜 거 같아요.”

월령안은 노인의 등 뒤로 다가가 바퀴 의자를 밀었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감님, 제가 오늘 얼마나 멋있었는지 몰라요. 등요 공주는 저에게 큰돈을 뜯기고 화가 나서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어요. 저를 찢어 죽이고 싶은데 어쩌지도 못하잖아요. 그 분통 터져 하는 모습만 생각해도 일 년 동안은 두고두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요 공주가 손해를 보게 했어? 등요 공주는 제멋대로인 데다가 아둔하고 독하기까지 해. 자기 진짜 처지도 모르고, 황제의 동복 여동생이라며 안하무인이지. 후궁에서도 공주에게 수모를 당한 비빈이 적지 않은 거다. 황후마저도 몇 번이나 당했어. 그런 사람에게 큰돈을 뜯어냈다고? 도대체 무얼 한 게냐?”

노인은 바퀴 의자에 기댄 채, 머리를 갸우뚱하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에요.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했어요.”

월령안이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노인은 갑자기 바퀴 의자 손잡이를 꾹 내리누르며, 월령안을 돌아보았다.

“미인방을 기부했다고? 미인방은 일단 닫았다가 나중에 변경에 돌아오면 다시 열려고 하지 않았느냐?”

“바람 따라 돛을 단 거뿐이에요. 이 기회에 장 상궁과 가까워질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힘도 없고, 가련해 보이고, 얼마나 좋아요?”

월령안은 마음을 비운 듯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녀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으니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노인은 월령안의 손을 다독이었다.

“괜찮아. 낡은 게 가야 새로운 게 올 게 아니냐. 미인방이 없으면 우리가 여의방(如意坊), 순심방(順心坊)을 차리면 되잖아.”

“좋아요! 변경에 돌아오면 미인방 맞은편에 가게를 하나 차리죠. 미인방과 똑같은 장사를 하고, 이름은 여의방으로 해요.”

월령안은 구김살 없이 환히 웃었다. 심지어 여의방을 세울 계획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가능한 계획임을 알고 있었다.

미인방이 있는 한, 똑같은 장사는 할 수 없었다. 다시 한다고 해도 모방에 그칠 뿐, 더는 미인방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인방의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더는 똑같은 미인방을 가질 수는 없었다. 마치 부모님, 오라버니의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육장봉을 더는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 * *

밤이 깊은 시각. 육장봉은 수중의 공무를 마쳤다. 그리고 암위가 보고하는 변방의 동향에 대해 듣고 있었다.

“북요 사절단이 이미 산해관(山海關)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이변이 없다면 한 달 뒤에 변경에 도착할 겁니다. 이번 사절단 주 책임자는 남원대왕(南院大王) 야율제(耶律齊)입니다. 동행한 이는 삼황자 야율헌일(耶律軒逸)과 오황녀 야율아한(耶律雅嫻)입니다.

야율제가 변경에 오기를 자청했습니다. 그때 장군께 패한 것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장군을 노리고 왔다고 추정됩니다. 양국 장사들끼리 무예를 겨루자는 제안도 야율제가 한 것입니다.

삼황자 야율헌일은 어머니가 한족입니다. 북요에서 총애를 받지 못하여, 이번에는 볼모로 변경에 온 것입니다. 유학한다는 구실로 변경에 남는다고 합니다.

북요에서는 오황녀 야율아한을 변경의 권문 귀족에게 시집보내려 합니다. 북요에서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장군 또는 조왕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실권을 잡은 관리 집안의 자제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 대신 북요에서는 황태자 야율융진(耶律戎臻)에게 황실의 공주를 시집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북요 쪽 국경 지대에 주둔한 병마는 철수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인원수는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매일 소모되는 군량과 마초의 양은 심지어 전보다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금나라도 북요를 공격할 뜻이 있어, 요즈음 우리에게 호의적입니다. 함께 손을 잡고 북요를 멸망시키고자 합니다. 또, 국경 지대의 병마는…….”

지금은 북요 사절단이 변경을 방문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암위는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사실대로 소상하게 보고했다.

암위가 국경 지대 상황을 보고하고 나니 반 시진이 흘렀다.

북요 사절단이 변경을 방문하는 일에 비교하여 변경 성안에는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서너 마디로 보고를 끝냈다.

말이 끝나자 암위는 그 자리에 서서 육장봉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것뿐이냐?”

육 대장군은 미간을 찌푸리고 암위를 불만스럽게 힐끔 보았다.

“장군, 성안에는…… 별로 큰일이 없었습니다.”

암위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육장봉을 보았다.

‘내가 무얼 빠트렸지?

조정의 분쟁을 제외하고 현재 성안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건 열흘 뒤의 춘일연인데……. 설마 장군도 춘일연에 관심을 두고 계신가? 예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들으려고 하시지를 않으셨는데?’

암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춘일연 외에는 보고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잠깐 주저하다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말했다.

“장군, 춘일연도…….”

육장봉은 순간 얼굴빛이 차가워지며 오른손으로 책상을 힘차게 두드렸다.

“뭘 보고하고, 뭘 보고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나?”

‘이번 기수 암위는 영 아니로군! 할 일 없는 풍류가나 귀족 아가씨들이 어울리는 연회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나? 이놈이 무슨 근거로 내가 별 볼 일 없는 연회에 관심을 가질 거로 생각했지?’

암위는 깜짝 놀라 무릎을 풀썩 꿇었다. 머리보다 입이 빨라,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저기……. 월 낭자가 춘일연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월령안이?”

육장봉의 차가운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책상을 두드리던 손은 멈추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월령안이 어떻게 춘일연 초대장을 받을 수 있지?”

육장봉이 아무리 춘일연에 관심이 없어도, 미혼 아가씨들이 이 기회에 명성을 높이고 좋은 신랑감을 찾는 모임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춘일연에 참가자는 모두 미혼 남녀다. 월령안은 이미 혼인을 한 기혼녀인데 왜 거기에 끼지? 재가하려는 건가?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장군께 아룁니다. 등요 공주께서 월 낭자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오늘 등요 공주는 미인방으로 찾아가 월 낭자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고 합니다.”

육 대장군은 화를 내기는커녕 되물어보았다. 이 모습을 보자 암위는 정탐꾼이 알아낸 소식 대신 동료와 잡담하다가 알게 된 소식을 보고했다.

“등요 공주? 무슨 짓을 했는데?”

육장봉은 등요 공주에 대한 혐오감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싫다는 듯했다.

“공주께서 소씨 가문 큰아가씨와 함께 미인방으로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공주 마마께서 찻잔 하나를 깨고는 월 낭자더러 무릎을 꿇고 주우라고 하셨고…….”

동료와 잡담하다가 들었던 얘기라 암위도 아는 게 별반 없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만 골라 육장봉에게 들려주었다.

이제 막 도입부로 들어가, 아직 재미있는 부분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별안간 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암위는 고개를 살짝 들어 바라보았다. 붓대에 걸려 있었던 오죽으로 만든 황모필(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이 육 대장군의 두 손가락에 두 동강 나 있었다.

암위는 움찔하고 목에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급히 머리를 숙이고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월 낭자는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월 낭자가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은양당의 장 상궁이 제때 나타나 등요 공주를 쫓아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등요 공주와 소씨 가문 큰아가씨에게 재고로 있던 직금금까지 몽땅 팔아 떼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미인방을 기부했다고?”

육장봉은 동강 난 붓을 들고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영리하다니까. 시기를 딱 맞춰서 꼬투리 하나 잡아내지 못하게 하는군. 정말 약아빠졌어.”

태후는 월령안이 미인방을 기부한 데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 기회는 등요 공주가 제 손으로 갖다 바친 셈이었다. 월령안은 기회를 잡은 것뿐, 다른 잔꾀를 부린 것이 아니었다.

영리하지만 간사하지는 않다. 두루두루 원만하지만 세파에 찌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러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육장봉이 웃는 것을 보고서야 암위는 한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안도의 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육장봉의 얼굴이 또다시 차가워졌다.

“직금금의 가격이 비싸다 보니 월령안이 사들이는 데도 돈을 적지 않게 들였을 것이다.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매입가에 한 푼도 붙이지 않았겠지. 지금 이 소식을 바로 조왕에게 전해라. 그리고 등요 공주를 잘 타이르지 못하면, 내가 직접 공주에게 됨됨이를 가르칠 거라는 말도 함께 전해라.”

“네, 장군.”

암위는 육 대장군의 변덕스러움에 깜짝 놀랐다. 잠시도 더 머무르지 않고 명령을 받자마자 급히 물러갔다.

암위가 떠나자 서재는 조용하기만 했다. 육장봉은 책상 위의 두 동강 난 붓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왜 월령안을 위해 나서려는 거지? 월령안이 괴롭힘을 당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지? 등요 공주가 월령안을 모욕하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북요 사절단이 다음 달이면 변경에 도착한다. 바빠서 분신술이라고 쓰고 싶을 정도였다. 어디 월령안의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있겠는가.

‘암위는 어디 갔지? 이렇게 빨랐었나? 내 명령이 안 끝났는데 벌써 사라지다니. 역시 이번 기수 암위는 영 아니로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