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96)화 (96/1,004)

96화 안녕, 미인방

은양당의 뒤에는 태후가 있었다. 그런데 월령안이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했다. 태후가 미인방 때문에 따로 무엇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개를 때려도 주인을 보고 때리는 법이다.

미인방에 실제로 문제가 있다면, 등요 공주가 월령안을 찾아와 괴롭혀도 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월령안이 엉큼하게도 문제가 있는 가게를 은양당에 기부했다고 질책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인방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등요 공주가 찾아냈다고 생각한 문제점은 순 엉터리였다.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월령안을 괴롭히려다 보니, 자기보다 권세가 높은 사람 앞에서는 더욱 난처해질 뿐이었다.

장 상궁은 일개 여관일 뿐이지만, 논리적으로 우세를 점했다. 그래서 등요 공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등요 공주에게 가게를 부술 거냐고 되물었지만, 장 상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의 편을 들어 주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등요 공주는 화가 나서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월령안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 상궁도 공주에게 빠져나갈 구실을 주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한쪽에 서 있었다.

미인방에는 쥐 죽은 듯한 적막이 감돌았다. 모든 아가씨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외면하고서 모른 체했다.

등요 공주가 난감해서 빠져나갈 구실을 찾아 헤맬 때였다. 소함연이 나서며 미인방의 적막을 깨뜨렸다.

“령…… 아니, 월 사장. 미인방에서 내놓은 옷감은 공주 마마나 나나 모두 마음에 드네. 우리에게 혜택을 줘서 고맙군. 계산서는 모두 내게 주게. 이러면 되겠지?”

“물론 됩니다. 소 낭자.”

월령안도 적정선에서 물러섰다. 계산서 넉 장을 함께 소함연에게 건넸다.

“소 낭자, 날이 저물기 전에 제가 은양당과 인수인계를 마쳐야 하거든요. 그전에 돈을 미인방으로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큰 금액이라서, 영수증도 없이 장부를 맞출 수가 없네요.”

“그러지!”

소함연을 이를 악물었다.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피어올랐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월령안은 십오만 냥에 달하는 돈을 날이 저물기 전에 가져오라고 했다.

‘그 사이에 어디에 가서 이렇게 많은 돈을 마련한담?’

월령안은 일부러 소함연을 난처하게 만드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소함연은 장 상궁, 등요 공주와 여러 아가씨들 앞에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승상 가문이 얼마나 옹색해 보이겠어?’

“어서 가자!”

소함연이 나서서 계산서를 받자, 등요 공주는 순식간에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장 상궁이 월령안의 편을 들어주는 게 분명했다. 그녀로서도 더는 월령안을 괴롭힐 수 없었다. 다만 표독스럽게 월령안을 노려보고는 한마디를 남겼다.

“월령안, 두고 보자.”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공주 마마를 배웅합니다.”

“공주 마마, 살펴 가세요.”

월령안과 장 상궁은 마치 등요 공주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차례대로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예를 올렸다.

“흥!”

등요 공주는 인사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장 상궁 옆을 지날 때 옷소매를 홱 떨치며 자신의 불만을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월령안이든 장 상궁이든 평온하기만 했다. 누구도 등요 공주의 분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등요 공주는 갑자기 들이닥쳤다가 허겁지겁 물러났다.

가게를 가득 채운 아가씨들은 기세등등하게 찾아왔다가 줄행랑을 놓는 등요 공주를 지켜보았다. 서로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모두 마음속으로 동정의 눈물을 훔쳤다.

등요 공주는 오늘 안팎으로 체면을 여지없이 구겼다.

이 미인방의 주인은 기개와 패기를 모조리 갖추었다.

그녀들도 며칠 전에 소식을 전해 들어, 은양당의 배후에는 태후 마마께서 버티고 계심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양당을 통해 태후 마마께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기껏해야 의복이나 음식을 가져다주는 정도였다.

그런데 월 사장은 어떤가. 등요 공주를 골탕 먹이기 위해 미인방을 통째로 갖다 바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 같은 단골손님은 미인방이 날마다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금 달걀을 낳는 암탉이 따로 없어 같은 업계 사람들마저 부러워했다. 그런데 월령안은 그러한 미인방을 바로 기부했다.

이런 씀씀이와 패기에는 그녀들 같은 대갓집 규수들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주옥같은 월령안이 선두에 서 있었다. 은양당에 기부함으로써 태후 마마 앞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란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러 아가씨들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월령안이 태후 마마 앞에서 체면을 세웠다 한들 무슨 대수인가. 고작해야 일개 상인 집안 출신 여인일 뿐이었다. 게다가 시집까지 갔었으니, 태후가 아무리 밀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기껏해야 월령안이 변경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도와주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도 원래 아주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었다.

아가씨들은 금세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때마침 당 낭자가 다가오더니 그녀들에게 사죄했다.

“귀빈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저희 미인방에서 대접을 제대로 하지 못했네요. 저희 새 주인장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오신 귀빈들께는 미인방에서의 쓰신 금액에서 이 할을 깎아드릴 겁니다.”

“이 할? 장 상궁 마마님, 당 낭자가 한 말이 정말인가요?”

장 상궁과 만난 적이 있었던 아가씨가 짐짓 기쁜 척하며 물었다.

장 상궁은 등요 공주 앞에서의 근엄한 모습을 거두고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제가 금방 미인방을 인수했습니다. 앞으로 귀빈 여러분께서 잘 봐주셔야 합니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 귀빈께서 오시면, 이 할을 깎아 드릴 겁니다.”

“장 상궁 마마님, 저희가 꼭 기억해 둘 거예요.”

장 상궁이 이처럼 체면을 세워 주자, 아가씨들은 너도나도 웃음꽃을 피웠다. 기분도 아주 좋아져서, 조금 전의 불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녀들이 마음에 두는 건 이 할이라는 할인 금액이 아니었다. 체면이었다.

등요 공주가 조금 전에 그렇게 방자하게 구는 바람에, 그녀들의 체면을 짓밟은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불쾌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 태후 마마의 집사 상궁이 이처럼 체면을 세워주니,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 상궁이 미인방을 인수하자마자 그녀들을 귀빈으로 대접했다. 게다가 매번 이 할을 할인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얼마나 많은 이가 부러워할지 모른다.

그 와중에 속 좁은 사람도 있었다. 월령안을 상대로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월 사장, 이거 보게……. 장 상궁 마마님과 비교하면 너무 깍쟁이 아닌가.”

“맞아. 맞아……. 장 상궁 마마님께서는 인수하시자마자 이 할이나 깎아 주신다지 않나. 월 사장, 얘기해 보게. 예전에 우리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

아가씨들이 기분이 좋아 웃으며 농담하자 월령안도 연신 읍을 하며 사과했다.

“아가씨들이 저를 너무 높이 본 거예요. 가게나 겨우 운영하는 소상인이 어찌 장 상궁 마마님과 비교가 되겠나요. 마마님께서는 대범하시니 오늘 많이 사세요. 그래야 예전의 손실을 메우시죠.”

“월 사장, 너무 약삭빠른데. 우리가 오늘 아무리 많이 사도 결국 미인방만 돈을 벌 거잖나.”

아가씨들은 이 층으로 올라가면서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월령안이 짐짓 난감해하며 말했다.

“그럼 어쩔까요? 아니면…… 장 상궁 마마님께 더 싸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요?”

“아니, 됐네……. 우리도 막무가내는 아니거든. 이 할이면 만족하네.”

아가씨들은 웃고 떠들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귀빈 여러분,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월령안은 계단에 서서 웃으며 아가씨들을 배웅해 주었다. 그러나 따라 올라가지는 않았다.

미인방은 이제 더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남겨둘 수 없었다.

* * *

월령안은 미인방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장 상궁과 당 낭자가 아가씨들을 배웅했다. 그다음 월령안은 장 상궁과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월령안은 화끈한 사람이었다. 미인방의 직원, 건물, 공급처를 한꺼번에 인계했다. 게다가 자신이 몇 년간 수집해 둔 여러 아가씨의 취향을 적은 책자도 함께 장 상궁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사이에 열 개가 넘는 가게를 팔았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인수인계한 건은 하나도 없었다. 직접 인수인계한 건 미인방이 처음이었다.

미인방의 장부와 계약서를 장 상궁에게 넘겨주는 순간,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 해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줄곧 잃기만 했다. 아끼는 모든 것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육장봉, 몇 년간 공들였던 사업, 그리고 직접 일구어낸 미인방까지.

내려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미인방을 둘러보고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장 상궁 마마님.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미인방은 제가 가족의 힘과 인맥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제힘으로 일구어낸 첫 가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식 하나 키우는 것보다 더 많은 심혈을 가게에 쏟아부었습니다. 미인방은 제 자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마마님께서 끝까지 운영해 주셨으면 합니다.”

“월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은양당이 있는 한 미인방도 있을 겁니다.”

장 상궁은 월령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게의 땅문서와 당 낭자 등 여러 사람의 인신매매 계약서를 넘겨받으면서 월령안에게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한발 물러서서 두 손을 겹치며 장 상궁에게 대례를 행했다.

평판이 좋은 가게를 차리기는 어려워도, 평판이 좋은 가게의 간판을 내리기는 쉬웠다.

며칠 동안 많은 이가 미인방을 넘보았다. 심지어 적지 않은 이들이 높은 가격을 불렀으나, 모두 거절했다. 미인방의 평판을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경쟁자의 손이라면 더욱이 넘겨주기 싫었다.

오늘 등요 공주와 소함연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무기한으로 문을 닫을 예정이었다. 은양당에 기부할 생각은 없었다.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변경 사람 모두가 은양당의 배후에 태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제 와서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해도 권세에 빌붙는 소인배 취급만 당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태후에게 호감을 사려 했다면 욕을 먹어도 두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는 태후가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길까 봐, 기회를 틈타 잔꾀만 부리는 소인배로 여길까 봐 두려웠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장 상궁 마마님, 이미 늦었으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월령안은 아쉬움만 적당히 드러내고 미인방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장 상궁이 배웅하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하녀만 데리고 떠났다.

미인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기 전,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뒤돌아 미인방을 바라보았다. 눈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안녕, 미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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