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직금금의 가격
등요 공주는 월령안이 둘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소함연을 흘겨보았다.
“함연, 얼마나 살 거니?”
‘이 멍청이. 월령안이 계약금을 받고 직금금을 내놓지 못하면 몇십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는 소리를 믿고, 정말로 몽땅 사려는 건 아니겠지? 이 정도로 멍청하니 몇 년간 저런 상인 계집 하나도 처리하지 못했지.’
“공주 마마, 전 아니에요…….”
이번에야말로 소함연은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등요 공주는 공주이다 보니, 세상 물정을 전혀 몰랐다. 평소 황제가 그녀에게 천을 하사할 때도 몇 필, 열몇 필 단위로 하사했다. 그러니 열 필, 스무 필이 많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여염집에서는 한 필을 사도 아주 많은 양이었다.
‘열 필, 스무 필이나 샀다가 언제까지 입으라고?’
소함연은 열 필은커녕 한 필도 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등요 공주는 그녀가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당장 대신 대답했다.
“열 필로 하렴. 월령안, 걱정하지 마라. 공주로서 너처럼 하찮은 상인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지. 나머지는 모두 예약해 두었다 하니, 남의 것을 가로챌 생각은 없느니라.”
‘월령안이 날 호구 취급하려나 본데? 어림없지!’
월령안이 서둘러 말했다.
“공주 마마, 감사합니다. 공주 마마의 은혜는 소녀가 마음속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사람을 시켜 옷감을 마차에 실어 드리겠습니다. 계산서에 서명해 주시겠습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월령안은 등요 공주가 번복할까 두려웠다.
“방금 구천 냥짜리에 서명하지 않았느냐?”
등요 공주는 계산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소리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월령안이 겸연쩍게 웃었다.
“돈이 모자랍니다. 미인방은 작은 가게라 직금금은 매입가 그대로 공주 마마께 드렸습니다. 한 푼도 버는 게 없어서 우수리도 떼어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우수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등요 공주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월령안을 훑어보았다.
‘가난뱅이 상인 주제에!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공주 마마께서는 정말 대범하십니다. 역시 황실의 공주 마마답습니다!”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당 낭자에게 눈치를 주었다.
“당 낭자, 서둘러서 공주 마마와 소 낭자의 옷감들을 전부 실으라고 하게. 여기에는 내가 있으면 되네.”
말을 끝내기 바쁘게 월령안은 쏜살같이 계산대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등요 공주와 소함연의 계산서를 쓱쓱 써 내려갔다.
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은 묵묵히 차를 마시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저런 싸움은 물 건너 불구경하듯이 구경이나 하면 그만이었다.
“이것은 공주 마마의 계산서입니다. 서명하고 인감을 찍어 주십시오. 그리고 소 낭자, 이건 낭자의…….”
월령안은 두 사람에게 각자 계산서를 건네주었다.
“이까짓…… 뭐야?”
등요 공주는 대수롭지 않게 계산서를 건네받았다. 하지만 위의 숫자를 본 순간, 화가 나서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계산서를 월령안의 얼굴에 냅다 던졌다.
“구만 냥? 월령안,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지 돈에 미쳤느냐?”
소함연도 계산서에 적힌 사만팔천오백 냥을 보고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 곧 바보를 보는 눈길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 저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니면 하늘이 나를 돕는 건가?’
한창 월령안이 교활하다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데 월령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감히 등요 공주에게 사기를 치려 든 것이다.
‘월령안이 살기 싫은 모양이구나. 스스로 제 명을 재촉하는군!’
얇은 종잇장에 불과한 계산서가 얼굴에 던져진들 아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의 얼굴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손으로 계산서를 받아 쥐고는 등요 공주를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보기엔……. 가난해서 돈에 미친 쪽은 공주 마마이신 것 같은데요? 미안방의 물건을 사지 못하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사셔서 출고하고 마차에까지 실었는데, 인제 와서 돈을 내지 않으시겠다니요. 이게 말이 되나요? 공주 마마, 신분이 높다 하여 이렇게 강제로 탈취하셔도 되나요? 물건은 챙기고 돈을 내지 않으셔도 되나요?”
시간을 보니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도 올 때가 되었다. 이제 더는 가식적으로 등요 공주의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나더러 무릎 꿇고서 깨진 조각을 주우라고? 흥, 나중에 무릎을 꿇을 사람이 누구인지 두고 보자!’
월령안이 불쾌한 표정을 보이자, 등요 공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쏘아붙였다.
“월령안, 말 한번 잘했구나. 그럼 나도 대놓고 말하겠다. 물건을 가지고 돈을 내지 않으면, 네가 감히 날 어쩔 셈이냐? 옷감 몇십 필을 가지고 돈을 내지 않는다 한들, 심지어 이 싸구려 가게를 부순다 한들 네가 감히 날 어찌할 수 있다는 말이냐?”
웬만하면 월령안에게 체면은 조금이나마 남겨 주려고 했었다. 그저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모욕하는 선에서 끝낼 셈이었다. 그런데 체면을 좀 봐주었더니 오히려 기어오르려 한다. 그렇다면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여봐라. 미인방을 부숴 버리거라!”
월령안이 태후의 친정 집안사람을 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월령안이 먼저 사기를 치려 했다. 이 가게를 부수더라도 태후가 질책할 이유가 없었다.
“공주 마마께서는 미인방을 부수시려는 겁니까?”
문밖에서 부드럽지만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끝나자, 짙은 남색 궁장 차림의 장 상궁이 단정한 자태로 문턱을 넘어서 들어왔다.
“장 상궁?”
등요 공주는 들어온 사람을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 대경실색하는 동시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여기 있는가?”
장 상궁은 태후를 시중든 지 오래된 사람이었다. 지난 이 년간은 줄곧 황궁 밖에서 태후를 도와 은양당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달 입궁해서 등요 공주도 잘 알고 있었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장 상궁은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 그리고 등요 공주가 말하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공주 마마, 미인방을 부수시겠다고요? 미인방이 접대를 제대로 못 했습니까? 그래서 공주 마마의 불만을 산 건가요?”
장 상궁의 말투는 부드러워 누구를 두둔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등요 공주는 장 상궁이 월령안의 편을 들어주려고 미인방에 나타났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 도울지는 알 수 없었다.
등요 공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쪽이 당당하다는 것을 떠올리자, 월령안을 자신 있게 가리키며 말했다.
“장 상궁 마침 잘 왔네. 이 여인이……. 나를 사기 쳤을 뿐만 아니라, 위무의왕까지 들먹이며 태후 마마의 명성을 더럽혔네.”
장 상궁이 낯빛을 흐리며 엄숙하게 물었다.
“월 낭자, 어찌 된 일인가요?”
월령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마님, 전 공주 마마께 사기를 치지 않았습니다. 공주 마마께서 미인방에서 직금금 스무 필을 사시고서 돈을 내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공주인데 돈을 내지 않으면 어찌할 것이고, 또 미인방을 부순다 한들 어찌할 것이냐고 하셨습니다.”
“허튼소리! 월령안, 내 앞에서 감히 사실을 왜곡하려 드느냐!”
등요 공주는 노발대발하며 월령안의 말허리를 잘랐다.
“분명 네가 사기를 쳤잖느냐. 그러니 내가 화가 나서 이런 못된 가게를 부수겠다고 했을 뿐이다.”
“공주 마마, 감히 여쭙겠습니다만, 제가 어떻게 사기를 쳤다는 말씀이십니까?”
장 상궁이 왔다. 월령안도 등요 공주의 신분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한발 물러서서 등요 공주를 보며 말했다.
“제가 나쁜 물건을 좋은 물건이라고 속였나요? 아니면 허튼 가격을 불렀나요? 직금금을 팔기 전에 품질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씀드렸을 텐데요?”
“네가 언제 가격에 대해서 말했단 말이냐?”
월령안이 가격을 말했다면 절대로 스무 필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구만 냥, 게다가 앞서 구천 냥까지. 월령안을 괴롭히려고 찾아왔다가 도리어 십만 냥을 써 버렸다. 만약 이걸 고스란히 냈다가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공주 마마, 제가 들여온 가격에 드린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월령안은 말을 끝내고 등요 공주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말하기는 했지. 하지만 스무 필에 구만구천 냥이나 받겠다고 했잖느냐. 어찌 들여온 가격이라 할 수 있겠느냐?”
등요 공주가 옷소매를 떨치며 위엄 있게 말했다.
“월령안, 넌 뻔뻔하고 속이 시커먼 장사치로구나. 미인방도 강도 소굴이나 다름없어! 내가 입궁하면 황형께 아뢰겠다. 네가 밖에서 위무의왕 가문의 명성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나한테 사기까지 쳤다고. 딱 보니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더러운 돈을 많이 벌었겠지! 반드시 황형께 성지를 내려 달라고 아뢸 것이다. 이런 양심 없는 가게는 문을 닫게 하고, 너처럼 속이 시커먼 장사치는 감옥으로 보낼 것이야!”
등요 공주는 저도 모르게 의기양양해졌다.
‘월령안이 이렇게 큰 빌미를 주다니. 저 계집을 처리하지 못하면 내가 조 씨가 아니다!’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한쪽에 묵묵히 서 있었다.
장 상궁은 월령안을 힐끔 보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물었다.
“공주 마마, 직금금 스무 필을 사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등요 공주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장 상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월 낭자가 구만구천 냥에 주었으면 확실히 매입가로 계산했군요. 공주 마마를 기만하지도, 사기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뭐라고?”
등요 공주의 얼굴에서 의기양양해하던 표정이 점점 사라졌다.
“공주 마마, 계산서에 서명하시지요. 월 낭자는 사기를 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인방도 양심 없는 가게가 아니고요. 방금 하신 말씀은 모두 거두시지요.”
장 상궁은 등요 공주의 체면을 충분히 봐주며 반복해서 말했다.
“장 상궁, 지금 뭐라고 했나?”
등요 공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장 상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주 마마,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직금금 스무 필의 매입가는 십만 냥 정도입니다. 구만구천 냥을 받겠다고 했으니, 절대 사기를 친 게 아닙니다.”
등요 공주의 노기에 찬 얼굴을 무시하고, 장 상궁은 엄숙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공주 마마께서 미인방을 부수신다면 소인이 감히 막을 수는 없지요. 다만 그전에 소인이 먼저 미인방의 모든 물건값을 공주 마마께 적어 드리겠습니다. 부수고 나시면 가격대로 배상해 주시지요.”
“자, 장 상궁……. 자네…… 알고는 있는가? 자네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등요 공주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월령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태후 곁의 여관이 어째서 월령안을 이렇게까지 돕지? 심지어 내 체면을 깔아뭉개기까지 하면서?’
월령안은 계산서를 흔들어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어머나, 내 기억력 좀 봐. 깜빡하고 공주 마마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저는 이미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했답니다. 지금 이 시각부터 미인방은 은양당의 재산이에요. 공주 마마, 그런데도 미인방을 부수실 건가요?”
하루에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미인방과 장 상궁의 도움 한 번을 맞바꾸었다. 이만한 돈을 쓴 보람이 있도록 장 상궁이 잘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 네가 미인방을 은양당에 기부했다고?”
등요 공주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사실을 왜 나는 이제껏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
“맞아요! 오늘, 방금 기부했답니다. 미인방은 이제 더는 제 것이 아니에요. 공주 마마도 제게 빚지신 게 아니고요.”
월령안이 사람 좋게 웃으며 한마디 물었다.
“공주 마마, 아직도 미인방을 부수고 싶으세요? 직금금 스무 필의 값은 내실 건가요?”
‘아직도 저를 무릎 꿇리고 깨진 조각을 주우라고 할 건가요? 제가 사기를 쳤다고 할 건가요? 미인방을 양심 없는 가게라고 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