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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94)화 (94/1,004)

94화 얼마나 사시렵니까

궁녀는 등요 공주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가득 널려 있는 찻잔 조각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주워 작은 쟁반에 담았다.

작은 쟁반에는 검은 융이 깔려 있었다. 깨진 조각들이 그 위에서 은은하게 부드러운 빛을 뿜고 있었다.

“이게 군자배구나?”

“자기 조각이 희고 얇아. 딱 보기에도 색다르잖아.”

등요 공주와 가까이 있던 아가씨 몇 명이 참지 못하고 목을 길게 뺐다. 슬그머니 훔쳐보고는 옆 사람과 소곤거리고 있었다.

먼 곳에 있는 이들은 차마 목을 빼고 보지는 못했다. 대신 옆 사람과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월 사장이 정말 통이 크기도 하지. 군자배로 차를 대접하다니. 혹시 우리가 쓰는 찻잔도 어느 대가의 작품이 아닐까?”

“어마나, 내가 쓰는 찻잔은 관요(官窯 –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던 도자기 가마)에서 나온 균자(鈞瓷 – 중국 송나라의 5대 관요 중 균요에서 나온 자기)구나. 어머나……. 소(蕭) 대가의 작품이네. 그분의 인감이 찍혀 있어.”

나이 어린 아가씨 하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찻잔의 차를 모두 마셔 버렸다. 찻잔을 뒤집어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야?”

이 소리를 들은 아가씨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들 더는 체통에 연연하지 않았다. 너도나도 찻잔에 든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잔을 뒤집어 확인했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정말 소 대가의 작품이네. 이 인감은 내가 알지. 우리 오라버니한테 소 대가의 다구가 한 벌 있는데 맨날 큰 보배나 되는 양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내가 좀 보자고 해도 안 보여 준다니까.”

“월 사장이 소 대가의 찻잔으로 우리에게 차를 대접하다니, 정말이지…….”

아주 호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찻잔 한 벌에 적어도 몇천 냥은 될 것이다.

그녀들이 찻잔을 사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찻잔으로 대수롭지 않게 손님 접대를 할 만큼 통이 크지는 못했다. 게다가 월령안은 그 사실을 한 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 일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이 매번 미인방에서 썼던 찻잔이 하나에 천 냥이나 하는 것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월령안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낭자들은 저희 미인방의 귀빈이에요. 당연히 최고급으로 대접해야죠. 낭자들께서 어여삐 여겨 주시는 것이야말로 저희 미인방의 영광입니다.”

“내가 마시는 차는 무이산(武夷山)의 대홍포(大紅袍)가 맞는가?”

유 낭자는 고상해서 시, 서예, 차를 즐겼다. 손에 든 찻잔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유 낭자께서 대홍포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특별히 사람을 시켜 찾아온 거예요. 양이 많지 않아서 일반적인 방법으로 살 수가 없더군요. 기왕 포장을 뜯었으니, 괜찮으시다면 조금 챙겨 드릴게요. 어떨까요?”

월령안이 유 낭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신경 썼던 부분을 세심하게 알아봐 주는 월령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받겠네.”

유 낭자는 오늘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내 언니가 타향에 시집가서도 미인방을 잊지 못하더라니. 이제야 왜 그랬는지 알겠군. 언니는 아예 대놓고 얘기했네. 그렇게 돈을 많이 썼지만, 미인방에서 쓴 돈이 가장 가치 있었다고. 예전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오늘에야 알겠네.”

“월 사장, 정말 너무 하네. 이렇게 좋은 물건이 많으면서 우리한테는 말 한마디도 안 했잖나. 미리 얘기했으면 차를 마신 뒤에 이 찻잔을 그냥 가져갔을 텐데.”

성격이 유쾌한 이는 월령안이 이처럼 대범한 것을 보고는 역시 격의 없이 농담을 건넸다.

“그건 안 되죠. 소 대가의 찻잔은 제게도 몇 벌밖에 없거든요.”

월령안도 체면 같은 걸 따지지 않고 아가씨들을 향해 공수하며 짐짓 사정했다.

“여러분, 좀 봐주세요. 몇 개 남겨 주셔야 제가 겉치레라도 해야죠. 아니면 미인방을 양심 없는 가게라고 하실 거잖아요.”

“알았네. 그대로 두지……. 대신 가게의 다과를 전부 먹어 치워야겠어. 예전부터 미인방의 다과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었거든. 다만 함께 모여서 먹는 음식이라 더 맛있는 줄로만 알았지. 오늘 보니 모두 최상급이네. 어서, 어서 빨리……. 차를 더 따라 주게.”

아가씨 몇 명이 웃으며 여공들에게 부탁했다.

이 아가씨들은 평소에도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니, 이만한 물건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평소에 평범하다고 여겼던 차와 찻잔이 모두 최고급이라고 하니, 잠시 놀랐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등요 공주가 정말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앞에서 드러내 놓고 등요 공주와 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등요 공주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는 가운데, 등요 공주가 갑자기 또 사달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궁녀가 받쳐 올린 쟁반을 냅다 뒤엎은 것이다. 쟁반에 담겼던 자기 조각들이 또다시 흩뿌려졌다.

“월령안!”

궁녀는 풀썩 무릎을 꿇고서 놀라 바들바들 떨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아가씨들도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모두는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 등요 공주를 바라보았다.

등요 공주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의혹이 담긴 시선을 받기는 싫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월령안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동시에 이를 갈며 소리쳤다.

“감히 날 농락해!”

“공주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월령안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등요 공주의 노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담담한 얼굴로 등요 공주를 바라보았다.

“네가 직접 봐……. 조금 전, 이게 묵 대가의 군자배라고 했지! 이게 무슨 찻잔인지 당장 엎드려서 다시 한번 똑똑히 보아라! 모조품도 아닌 싸구려를 군자배라고 하면서 감히 나를 농락해? 가게 문을 닫고 싶은 모양이구나!”

등요 공주는 잔뜩 화가 나서 공주로서의 체통도 잃었다. 조금 전까지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걸 생각하니 자신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당당한 공주가 일개 상인 집안의 여인에게 농락당했다. 소문이 퍼지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어머……. 공주 마마께서 깨신 찻잔이 군자배가 아니라니요?”

월령안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당장 고개를 돌려 미인방의 여공에게 말했다.

“너희는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 공주 마마께 군자배에다 차를 올리라 했는데, 무슨 찻잔을 내놓은 거냐? 어서 빨리 공주 마마께 군자배에다 다시 차를 올려라.”

“네!”

여공들은 대답하자마자 바로 금세 물러갔다. 등요 공주가 그녀들에게 화풀이할까 봐, 월령안이 자신들을 내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령안, 지금 군자배가 아니라, 날 속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등요 공주는 월령안이 화제를 돌리려 하자 더욱 화가 났다.

“공주 마마께 사과드립니다. 방금 제 눈에 무엇이 씌었는지 그 찻잔을 군자배로 잘못 보았습니다. 그럼 공주 마마께 군자배로 다시 차를 올리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월령안은 성실한 태도로 연신 사과했다.

“안 돼!”

등요 공주는 콧방귀를 뀌고는 흩뿌려진 자기 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찻잔은 금방 내가 샀으니 지금 당장 주울 수 있겠느냐?”

“이 찻잔은 관요에서 나온 균자로, 소 대가의 작품입니다. 공주 마마, 그 구천 냥이면 얼추 가격이 맞겠습니다만…….”

월령안은 난감한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주 마마, 직금금은 사지 않으시렵니까? 직금금이 공주 마마의 격에 맞지 않습니까? 공주 마마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습니까? 직금금이 나쁘다고 생각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옷감을 요구하시든 저희가 최대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직금금은 태후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감이었다. 등요 공주라도 여러 사람 앞에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등요 공주는 직금금이 나쁘다고 말할 엄두를 못 냈다. 대신 악에 받쳐 월령안을 쏘아보며, 악문 잇새로 말을 뱉어냈다.

“직금금은 당연히 좋은 물건이지. 물론 나도 좋아하고!”

태후마저 좋아하는 옷감을,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공주 마마, 직금금을 가져왔습니다. 보십시오.”

월령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약속이나 한 듯이 당 낭자가 직금금 한 필을 들고 들어왔다.

역시 태후마저 칭찬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바로 모두의 시선을 빼앗았다.

직금금은 염색한 명주실과 금실로 정교한 무늬를 짜 넣어 만든 것이었다. 금실은 명주실에 묻혀 보일 듯 말 듯하면서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꽃무늬도 화려하고 대범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호화롭고 진귀한 물건이었다.

다만, 일반인들이 소화하기는 힘들었다.

“어머, 예쁘다!”

직금금을 내놓자마자 아가씨 중 누군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직금금은 매우 아름다웠다. 옷감으로만 보면 모든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아무도 나쁘다고 할 사람이 없었다. 그게 직금금이 진상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등요 공주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의 칭찬이 없다 하더라도 직금금은 최고급 옷감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모두의 반응에 월령안은 대단히 만족했다. 오늘은 꼭 재고를 처리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월령안은 직금금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주 마마, 직금금이 여기 있으니 보시지요. 얼마만큼 사실 겁니까? 스무 필이나 서른 필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더 많이는 안 됩니다. 나머지는 예약을 해서 계약금까지 받아 둔 거라서요. 절대로 어기면 안 됩니다.

부디 공주 마마께서 제 체면을 봐 주셨으면 합니다. 제 수중의 직금금을 몽땅 사지는 말아 주세요. 사흘 뒤에 물건을 내놓지 못하면 제가 몇십만 냥을 배상해야 하거든요.”

‘옷감을 스무 필, 서른 필씩이나 사야 한다고?’

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은 월령안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월 사장이 등요 공주를 호구 잡는 건가?’

모두 속으로 짐작은 했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폭로하려 하지는 않았다.

등요 공주가 월령안을 괴롭히고 싶었다면 다른 날 찾아올 것이지, 하필이면 그녀들이 옷을 사는 이날 들이닥쳤다. 그녀들의 기분을 일부러 망치려고 작정한 꼴이었다.

등요 공주는 그녀들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등요 공주에게 귀띔해 줄 필요가 없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스무 필을 가져가마!”

등요 공주도 바보는 아니었다. 월령안의 말에 함정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를 속여 직금금을 몽땅 사게 하려고? 흥, 월령안, 그 얄팍한 잔머리로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

“공주 마마, 감사합니다. 공주 마마께서는 너무나 좋은 분이십니다.”

월령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지덕지하는 모습을 취했다. 곧이어 등요 공주 뒷자리에 있는 소함연에게 말을 건넸다.

“소 낭자, 공주 마마께서 스무 필을 사신대요. 소 낭자 몫으로는 열 필을 드릴게요. 괜찮죠?”

소함연은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동생, 난…….”

소함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월령안이 정색하며 말했다.

“저를 동생이라고 부르셔도 스무 필은 안 돼요. 재고가 딱 이것뿐이라서요. 공주 마마도 스무 필만 사셨잖아요. 소 낭자, 사람 노릇을 하려거든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해야죠. 비록 소 승상의 따님이시지만 공주 마마와 어떻게 비교를 하겠어요? 공주보다 더 많이 사실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말은 소씨 가문의 큰 도련님과 큰아가씨가 월령안의 귓가에 수시로 하던 말이었다. 특히 어머니가 소씨 저택에 들어간 초기에는 소씨 남매 때문에 모녀가 고생을 적지 않게 했다.

오늘 그녀는 그 말을 소함연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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