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93)화 (93/1,004)

93화 군자배

등요 공주는 소함연이 망신당하는 꼴을 보자, 그녀를 매몰차게 쏘아보았다.

“쓸모없는 것!”

소함연이 눈시울을 붉혔다.

“공주 마마……!”

“흥!”

등요 공주는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싹 돌렸다. 그리고 탁자 위의 찻잔을 들었다가 힘껏 내려놓았다.

탕, 하는 소리가 울렸다. 고의였을까, 아니면 손이 미끄러진 걸까. 찻잔은 탁자 위에서 핑그르르 돌더니 땅에 떨어지며 쨍, 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어머나!”

한창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던 규수들이 갑작스러운 광경에 깜짝 놀랐다. 모두가 등요 공주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등요 공주는 또 왜 저런대?’

‘다들 기분 좋게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왜 갑자기 표정이 흐려졌지?’

월령안만이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등요 공주에게 물었다.

“전하, 손을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내가 왜 손을 다치겠느냐?”

등요 공주는 월령안이 이런 질문을 하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손을 다쳤다고 해서, 월령안이 사죄하도록 하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희고 보드라운 손에는 긁힌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다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월령안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등요 공주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월령안 이게 눈치도 없나. 내가 언짢은 것도 모르나?’

등요 공주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월령안이 공주의 뒤에 서 있는 궁녀를 지적했다.

“너희는 공주 마마를 어떻게 모시는 거냐? 찻잔이 깨진 걸 못 봤느냐? 어서 깨끗하게 치우지 못할까? 공주 마마께서 깨진 조각이라도 밟아 발에 상처라도 나시면 너희가 책임을 질 거냐?”

궁녀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도 않았다.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등요 공주가 정말로 깨진 조각을 밟으면, 자신을 탓할까 두려웠다. 치우려고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치우겠습니다.”

궁녀가 움직였다. 등요 공주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월령안, 감히 내 사람을 부려? 간이 여간 부은 게 아니구나. 누가 감히 내 사람을 부리라더냐?”

“아, 네. 그럼 치우지 마세요.”

월령안이 냉큼 받아들였다. 그 바람에 등요 공주는 더욱 화가 치솟았다. 아무래도 월령안이 일부러 그녀를 화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월령안의 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방 안에 둘러앉은 아가씨들을 보고는 억지로 참았다.

등요 공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음속 울화를 억눌렀다. 그러고는 월령안을 삿대질했다. 다시 자기 발치에 떨어진 깨진 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네가 와서 치워!”

그 말이 끝나자, 등요 공주의 말투가 돌연 여유로워졌다.

“무릎을 꿇어라! 당장 깨끗이 치워! 만약 한 조각이라도 빠트렸다가는, 그걸 네 입에 넣어야 할 거야!”

당당한 공주로서 일개 여자 상인을 혼내주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까는 미인방의 규칙을 몰라, 선수를 친 원령안에게 끌려다녔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월령안에게 도대체 무슨 재간이 있는지 지켜볼 참이었다.

‘무릎을 꿇어라! 당장 깨끗이 치워!’

등요 공주의 요구가 조금 무례하고 패악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잘못했다고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공주였다. 월령안에게 깨진 조각을 치우라고 한들 어쩔 수 없었다.

꿇으라고 한 것도, 월령안이 청소하기에 편하도록 그랬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리에 있던 규수들은 등요 공주가 고의로 월령안을 모욕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서 월령안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뚱뚱한 정 낭자가 입을 열려고 움찔거렸다. 시녀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없이 머리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등요 공주는 분명 모든 사람 앞에서 월령안을 모욕할 작정이었다. 누가 사정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등요 공주는 말을 마치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떠올린 오만한 미소가 월령안에게 무언의 조롱을 던지는 듯했다.

월령안도 미소로 답하며 통쾌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월 낭자…….”

규수들은 월령안의 대답을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월령안이 승낙하는 게 맞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등요 공주는 황실의 공주이다. 월령안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 것도 영광으로 여겨야 했다. 수많은 하인과 하층 관리의 딸에게는 무릎을 꿇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흥!”

월령안이 자존심도 없는 없는 대답을 듣자, 등요 공주는 경멸스럽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입꼬리를 올려 조소를 보냈다.

“과연 말을 잘 듣는 개로구나!”

이 순간, 등요 공주의 뒷자리에 앉은 소함연은 착한 척을 하는 것도 잊었다. 그녀는 도무지 통쾌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월령안이 자신의 앞에서 개처럼 무릎을 꿇는 모습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십 년 전, 월령안이 자기 오라버니에게 두들겨 맞아, 개처럼 땅바닥에 옹송그리고 있었던 그때처럼 말이다.

매번 그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흥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월령안은 너무나 교활했다.

그때 딱 한 번을 제외하면, 그녀와 그녀의 오라버니는 월령안을 혼내 줄 기회를 더는 찾지 못했다. 도리어 몇 번이고 월령안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오늘, 드디어 월령안이 개처럼 말을 듣는 모습을 볼 기회가 왔다.

소함연은 생각할수록 흥분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월령안을 당장이라도 잡아 끌어오고 싶었다.

등요 공주와 소함연이 한창 신이 나 있을 무렵이었다. 월령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주 마마께서 깨신 건, 제 찻잔입니다만.”

“그래서?”

등요 공주는 월령안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월령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 수나 있겠나?’

“공주 마마께서 밟고 계시는 것도 제 융단이고요.”

등요 공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하겠다 이거냐?”

‘더는 월령안에게 휘말려서 끌려다니지 않겠어!’

지금 주도권은 공주에게 있었다.

“소녀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다만…… 공주 마마, 찻잔, 융단 모두 제 것입니다. 제가 주울지 말지, 어떻게 주울지는 모두 제 기분에 달려 있지요. 공주 마마께서 저더러 무릎을 꿇고 깨진 조각을 주우라고 하셨지요. 네,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그러시려면 먼저 찻잔과 융단의 값은 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월령안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참, 공주 마마께서 앉아 계신 그곳과 발로 밟고 계신 그곳도 모두 제 것입니다. 땅문서에 똑똑히 기록된 곳이죠. 아니면 그 땅도 사시는 건 어떤가요? 이익은 한 푼도 챙기지 않고, 원래 가격대로 드리겠습니다.”

“네가……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해? 그래, 네 눈엔 공주인 내가 네게 명령할 수 없다는 말이냐?”

등요 공주는 화가 치밀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탁자를 세차게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월령안 저 계집은 정말 짜증 나 죽겠네. 돈 말고 눈에 뵈는 게 없나? 지금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게 빌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물어내라고 해?

도대체 간이 얼마나 큰 거야? 날 건드리고도 두렵지도 않나?’

“공주 마마, 법은 백성의 개인 재산을 보호해 준다고 했습니다. 공주 마마께서 제 물건을 훼손하시고 배상하지 않으시겠다면, 저도 감히 억지로 배상을 받아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제 물건을 마음대로 처리할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말이에요. 깨진 찻잔을 제가 줍고 싶으면 줍고, 싫으면 그대로 두면 그만입니다. 깨진 찻잔이든 땅이든 모두 제 것이니까요.”

월령안은 입꼬리를 올려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은 정중했다. 하지만 등요 공주가 자기 물건을 훼손하고 배상하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있음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등요 공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월령안의 말이 황궁에 전해져 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라도 해 보라. 태후께서 그녀를 얼마나 마뜩잖게 볼 것인가.

월령안과 태후의 친정 사이에 교분이 있는 것을 떠올린 등요 공주는 노기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고작 찻잔 하나가 아니냐? 내가 배상하지 못할까 봐 그러느냐? 방금 구천 냥짜리 계산서에 서명하고 아직 물건을 사지 않았지? 그 금액에서 제하도록 해라. 이제 찻잔은 내 것이 되었다. 그럼 이제는 무릎을 꿇고서 치우라고 해도 되겠느냐?”

태후가 공주에게서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태후도 월령안 때문에 공주를 난처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주 마마, 구천 냥으로는 모자랍니다.”

월령안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등요 공주의 눈에는 그 미소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찻잔 하나인데, 구천 냥으로는 모자란다고?”

등요 공주는 화가 나다 못해 웃고 말았다.

“상인은 교활하다더니. 그 말이 딱 맞구나! 월령안, 내가 궁에만 있어 바깥 물정을 모른다고, 너같이 몰락한 장사치 나부랭이가 되는 대로 지껄이는 소리를 믿으란 말이냐?”

“공주 마마, 자세히 보십시오. 공주 마마께서 깨신 찻잔은 당나라 묵(墨) 대가의 작품인 군자배(君子杯)입니다. 한 벌에 네 개인데 하나를 깨뜨렸으니 전체가 훼손되었군요.”

월령안이 정색하여 말했다.

“뭐라고? 이게 군자배라고?”

등요 공주가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바라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 있느냐! 어찌 그 귀하다는 군자배로 손님 접대를 한단 말이냐?”

“공주 마마는 보통 손님이 아니잖습니까. 당연히 보통 찻잔을 쓸 수는 없지요. 이 군자배는 저의 소장품인데 밖에서 한 벌에 칠만 냥을 불러도 팔지 않았습니다. 믿기 어려우시면 궁녀더러 조각을 주우라 하여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자기 조각을 내려다보며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군자배라니? 그 귀한 찻잔을…… 그냥 이렇게 깬 거야?”

월령안의 말을 들은 아가씨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 그녀만 바라보았다.

“세상에! 군자배가 이렇게 없어지다니.”

이런 물건을 좋아하는 아가씨는 너무 아까운 나머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시늉까지 했다.

등요 공주는 월령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들이 모두 질책하듯 불만에 찬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월령안 또한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월령안을 괴롭히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다. 아무 궁녀나 가리키며 명령했다.

“조각을 주어 오너라.”

‘이게 진짜 군자배라면, 월령안에게 정말로 칠만 냥을 배상해야 하나? 어디 가서 현금 칠만 냥을 가져온단 말인가?’

등요 공주는 순식간에 짜증이 밀려왔다.

태후는 줄곧 검소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에게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하고, 겉치레만 한다고 질책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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