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마지막으로 떼돈을 벌어 주리라
“좋아요. 소 낭자께서는 일단 장부에 적어 놓아도 됩니다. 미인방의 손님이라면 떼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요. 이만한 돈이 누군들 없겠나요, 그렇죠? 소 낭자.”
월령안은 미인방의 집사인 당 낭자에게 눈짓했다.
등요 공주도 이 말을 듣고는 한시름을 놓았다.
‘다행이다. 망신당하지 않아도 되겠네.’
당 낭자가 계산서를 들고 와서 소함연 앞에 내놓았다.
“소 낭자, 성함을 쓰시고 뒤에 인감 아니면 지장을 찍으면 됩니다.”
“지장까지 찍어야 하나?”
소함연은 계산서에 적힌 천 냥이라는 금액을 보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등요 공주보다 여유가 있었다. 천 냥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소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돈을 받으면, 이 계산서는 곧 돌려드릴 겁니다.”
당 낭자의 온화한 미소는 사람의 경계심을 풀게 했다.
소함연은 그녀를 힐끗 보고 잠시 주저하다, 결국 이름을 적었다. 다만 인감이 없어 대신 지장을 찍었다.
이를 본 등요 공주가 턱짓으로 당 낭자를 부르며 호통쳤다.
“고작 구천 냥이 아니냐? 난 또 얼마나 큰돈이라고. 계산서를 가져오너라. 서명할 테니까.”
지는 한이 있더라도 얕보일 수는 없었다. 당당한 공주로서 어떻게 월령안에게 질 수 있겠는가.
“공주 마마, 역시 통이 크십니다!”
월령안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가게에서 큰돈을 쓰는 호구라면 모두 좋아했으니까.
등요 공주가 계산서에 서명하자, 월령안은 그녀에게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고 집사 당 낭자에게 분부했다.
“공주 마마와 소 낭자가 계산서에 서명만 하시고 아직 물건을 사지 않으셨네. 당 낭자, 어서 가서 며칠 전에 위무의왕(魏武懿王)에게서 사들인 진상품 옷감을 보여드리게. 공주 마마는 금지옥엽이시니 오직 진상품만이 어울릴 거야.”
위무의왕은 태후 오라버니의 봉호(封號)였다.
“진상품이라고? 이 싸구려 가게에 진상품 옷감이 있다고?”
등요 공주는 구천 냥이나 되는 계산서에 서명하고 나자 손이 떨렸다. 그런데 아직 물건을 사지 않았다는 월령안의 말에 내심 기뻤다. 이 기회를 빌려 월령안을 괴롭혀 줄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진상품에다, 승은공(承恩公)까지 엮여 있다는 말에 그만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위무의왕은 태후의 친정 쪽이다. 만약 위무의왕의 가문과 연관이 있다면, 그녀라고 감히 트집을 잡을 수가 있겠는가?
“공주 마마께 아룁니다. 일전에 강소(江蘇), 절강(浙江) 일대에서 직금금(織金錦 – 금실을 넣어 짠 비단)을 진상했었잖습니까? 태후 마마께서 아주 좋아하시는 것을 보고 위무의왕께서 성의를 보이시려 특별히 강남에서 직금금을 들여오셨지요. 저는 염치 불고하고 위무의왕 쪽에서 얼마간 나눠 받았습니다.
이 직금금이 유난히 화려하잖습니까? 사들인 다음에도 아까워 여태껏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공주 마마께서 오셨으니, 아까워도 내놓아야죠. 공주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직금금은 태후 마마께서도 좋다고 칭찬하신 물건입니다. 공주 마마 마음에도 꼭 드실 겁니다.”
월령안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직금금의 내력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직금금이 태후에게 눈도장을 찍히고 진상품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자 위무의왕의 집안사람들은 직금금이 변경에서 유행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큰돈을 들여 멀리 강소, 절강 일대에서 운송해 왔다. 하지만 직금금은 화려하고 가격이 비싸 일반인들은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변경의 귀족 여인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많은 물건을 쌓아 놓고 팔지 못하게 되자, 위무의왕 가문에서는 결국 월령안을 찾아왔다. 반은 강제로, 반은 통사정해서 물건을 떠넘겨 받아 두게 되었다.
위무의왕의 체면을 봐서 물량의 절반을 받아 두기는 했다. 하지만 직금금은 일반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여태껏 미인방에 쌓아 두고만 있던 터였다. 안 그래도 어찌 처리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마침 잘됐네. 호구가 찾아오다니. 오늘은 재고 정리를 확실하게 할 수 있겠어!’
월령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당 낭자에게 얼른 직금금을 내오라고 시켰다.
약삭빠른 당 낭자도 등요 공주에게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바로 안쪽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등요 공주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월령안을 쏘아보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옷감 하나 팔면서, 태후까지 들먹이다니! 이러면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
등요 공주는 화가 너무 치밀어서 속에서 울컥 피가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태후 마마께서 좋다고 하셨다니 당연히 좋겠지. 다만 너희 가게 직금금이 진상품과 똑같은 게 확실하냐?”
“공주 마마, 제가 진상품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위무의왕 가문의 물건이라 강남의 직조방(織造坊)에서도 감히 대충 만들지는 못했을 겁니다.”
월령안은 등요 공주의 퇴로를 막아 버리고는 웃으며 접대했다.
“미인방의 귀빈이신데, 귀빈을 어찌 계속 서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공주 마마, 어서 앉으십시오!”
미인방 내부 장식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 층의 귀빈실이든 일 층이든 안락의자가 많이 있었다. 월령안은 서둘러 등요 공주를 의자에 모셨다.
등요 공주는 자리에 앉았다. 귀히 대접받았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결국 내가 미인방에서 돈을 쓰지 않으면, 앉을 자격도 없단 얘기로구나!”
“공주 마마, 무슨 말씀입니까. 공주 마마께서 앉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앉을 수 있지요.”
월령안은 다른 아가씨들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떼를 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두가 앉고 나니 유독 소함연의 자리가 모자랐다. 사실상 소함연은 공주 곁에 말없이 서 있어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소함연을 슬쩍 보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머, 소 낭자를 깜빡했네요. 소 낭자도 저희 미인방의 귀빈이신데요. 너희는 멍하니 뭐 하는 거냐? 어서 공주 마마 뒷자리에 소 낭자가 앉을 의자 하나를 더 놓아라.”
그러고는 세심하게도 소함연의 의견을 물었다.
“소 낭자, 공주 마마의 뒷자리에 앉아도 괜찮으시죠? 만약 싫으시다면, 사람을 시켜…….”
“난…… 괜찮아!”
소함연은 당장 피를 토할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월령안도 가식적인 미소로 응수했다.
“소 낭자가 착하고 이해심 많은 분인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럼 따로 자리를 내어드리진 않겠습니다. 소 낭자께서도 조금 전에 천 냥짜리 계산서에 서명했죠. 그럼 이따가 직금금이 마음에 드시는지 공주 마마와 함께 보시죠. 만약 마음에 드시거든 많이 사 주세요.”
‘양 한 마리에게서만 양털을 뽑아다 어느 세월에 양탄자를 짜겠어. 등요 공주한테서만 쥐어짜서야 몇 푼이나 된다고.’
오늘이 지나면 그녀는 미인방을 넘겨주어야 했다. 넘겨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떼돈을 벌어 주리라.
월령안은 미인방의 주인으로서 모든 손님을 살뜰하게 접대했다고는 못해도, 손님이라면 단 한 명도 냉대하지는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있었다. 모든 손님에게 미인방에서 대접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신분 때문에 냉대를 받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월령안은 등요 공주를 접대하면서도 다른 손님들을 잊지 않았다. 손님마다 인사를 나누면서 상대방에게서 가장 뛰어난 부분을 찾아 칭찬도 몇 마디 곁들였다.
예를 들어, 고상한 유 낭자에게는 스스로 장신구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면 월령안은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귀걸이가 정교하고 특별하다고 칭찬하는 식이었다.
유 낭자는 어울리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자신의 회심작을 알아보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월령안은 기억력도 좋았다. 한 번 본 사람은 거의 잊는 법이 없었다. 자리에 있는 열 몇 명이나 되는 아가씨들에게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상대방의 취향도 기억하고 있었다.
“주주(珠珠) 낭자는 장미 화로(花露 - 꽃잎을 증류해서 만든 증류수)를 좋아하시죠. 마침 얼마 전에 해외에서 고급 장미 화로를 들여왔답니다. 드셔 보시고 괜찮으시다면, 당 낭자더러 두 병 포장해 두라 이를게요.”
“이(李) 낭자, 가장 좋아하시는 매화고(梅花糕 - 밀가루와 콩 앙금으로 만든 간식)를 준비해 놓았어요. 화원으로 유명한 매기(梅記)의 매실 절임에서 나온 즙을 써서, 주방장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거예요. 포장해 놓았으니 가실 때 잊지 말고 가져가세요.”
“정 낭자, 오늘 아침에 만든 튀김 과자가 아주 맛있어요. 나중에 많이 드세요. 마음에 드신다면 당 낭자에게 비법을 보내 드리라고 할게요.”
월령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분을 모두 살폈다. 또한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두었음을 드러내지 않고 알려 주었다. 이로써 아가씨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풀기를 바랐다. 등요 공주 때문에 흥을 깨고서, 그 화를 미인방에 돌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실 아가씨들은 오늘 출시하는 새 치마 때문에 왔다. 하나같이 큰 기대를 하고 왔건만, 치마를 보기는커녕 등요 공주 때문에 흥이 다 깨져 버렸으니 속이 편할 리 없었다.
그녀들도 이게 월령안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등요 공주가 문전까지 찾아와 트집을 잡는데 월령안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리라. 그런데 등요 공주는 신분이 높으니, 그녀들이 불쾌하더라도 어쩌지는 못했다. 결국, 속으로 월령안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월령안의 칭찬을 듣자 그녀가 자기들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세심하게 일일이 선물까지 준비해 사죄했다. 도저히 차갑게 대할 수가 없었다.
두어 마디 주고받는 사이, 등요 공주 때문에 싸늘하게 식었던 미인방의 분위기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변경의 유행이며 소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서 월령안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게 오가며 모두를 접대했다. 구석에 앉은 정 낭자마저 월령안과 함께 규수들과 몇 마디 주고받자, 흥분해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러나 단 두 사람만은 어울리지 못했다.
등요 공주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월령안이 두어 마디 인사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월령안이 던져 준 화젯거리를 두고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공주의 체면을 버리고 먼저 다른 규수들에게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녀들을 지켜보았다. 한참이나 기다려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등요 공주는 화가 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황제의 동복 여동생으로서 어떤 연회에서든 언제나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모두가 그녀를 둘러싸고 떠받들었으며, 항상 나서서 말을 걸어왔다. 그녀가 거들떠보지 않아도, 다가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모두가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존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는 모양새였다.
‘이것들이, 너무하잖아! 아니지, 월령안 때문이야. 월령안이 너무한 거야!’
등요 공주는 화가 나 눈까지 벌게졌다. 하지만 남들이 비위를 맞춰주는 게 너무 익숙했다. 자신이 나서 남과 말을 섞을 수가 없어서 혼자 가슴만 앓았다.
그녀의 뒷자리에 앉은 소함연 역시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녀가 등요 공주처럼 거만해서, 신분을 내세우느라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공주의 뒷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주인도 아니고 노복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였다. 게다가 변경을 떠난 지 삼 년이나 되었다. 수도의 유행도, 친분도 모조리 변했다. 슬쩍 운을 떼어 보았지만, 그녀를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