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90)화 (90/1,004)

90화 등요 공주의 행차

여인들이 한데 모이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일이 없었다.

“오늘 미인방의 치마는 특별하다고 하네요.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요. 저는 지난달 난화월금(蘭花月錦) 치마를 사지 못해 며칠이나 속상했어요.”

“난화월금이 뭐 대수예요. 정월에 나온 직금(織錦 - 수를 놓은 것처럼 정교한 도안을 넣어 짠 비단)으로 만든 유선군(流仙裙)이야말로 못 사서 유감스럽죠. 저는 그때 변경이 아닌 다른 곳에 있어서 사지 못했어요. 변경에 있었으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텐데.”

“열흘만 있으면 춘일연이에요. 저는 아직도 치마를 준비하지 못했다고요. 언니들, 오늘은 이 동생에게 한 번만 양보해 주세요.”

끼익, 끼익…….

아가씨들이 한창 이야기꽃을 피울 때였다. 계단 어귀에서 갑자기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하하! 정(程) 낭자가 왔군요?”

위층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부채를 꺼내 입가를 가렸다. 웃음소리가 샐까, 또 남을 비웃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였다.

“정 낭자도…… 혹시 춘일연에 참가하는 건 아니겠죠?”

심술궂은 한 아가씨가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올해 춘일연은 등요 공주님께서 책임지고 여는 거예요. 그분은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좋아하는 편이시잖아요. 정 낭자도 분명히 초청을 받았을 거예요.”

아가씨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는 동안, 한 뚱뚱한 여인이 힘겹게 올라왔다.

몇십 개밖에 안 되는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도, 숨을 헐떡이며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방 안의 아가씨들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자 뚱뚱한 여인은 난감해했다.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인사했다.

“언니들, 안녕하세요.”

그러나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랏빛 옷을 입은 아가씨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방에서 어디 이상한 냄새 안 나요? 왜 이렇게 냄새가 지독해? 거기 누가…… 빨리 창문 좀 열어 주세요. 숨 좀 쉬게.”

누군가 먼저 입을 열자, 나머지 사람들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인방도 너무하네……. 아무나 다 초청했나 봐. 간판이 이름값을 못 하는 거 아닌가.”

자고로 문관과 무관은 대립 관계였다. 물론 문관 가문과 무관 가문의 아가씨들끼리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정 낭자는 뚱뚱할 뿐만 아니라 무관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니 문관 가문의 아가씨들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어울리려 하지 않는 것도 정상이었다.

이상하게도 정 낭자는 무관 가문 출신답지 않았다. 늠름하거나 씩씩하기는커녕 담이 작고 나약했다.

아가씨들은 정 낭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데다가 조롱까지 퍼부었다. 정 낭자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미인방의 집사는 눈치가 있었다. 서둘러 다가가 정 낭자를 한쪽으로 이끌어 앉혔다.

“정 낭자, 이쪽에 앉으세요.”

“고, 고맙네.”

곤경에서 구해 주자 정 낭자는 그제야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몸이 위축되어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의 시녀는 주인과는 달리 억세어 보였다. 정 낭자를 조롱하던 두 아가씨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고작 시녀였다. 다들 그녀를 대수롭게 여기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가소롭다는 듯 흘겨보는 정도였다.

시녀는 화가 치밀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나 움직이기도 전에, 정 낭자가 조심스레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머니께서 얘기하셨어. 오늘은 입을 만한 치마를 꼭 사야 한다고. 싸우지 마.”

“하지만 이 사람들이……!”

바로 그때, 내관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공주 마마 납시오!”

“공주 마마?”

위층 여인들은 깜짝 놀랐다. 정씨 가문의 시녀와 실랑이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들 벌떡 일어나 깜짝 놀라 말했다.

“공주께서 미인방까지 어떻게 오셨지? 미인방,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공주 마마까지 오시다니.”

“어서, 어서 내려가 공주 마마를 마중해야지.”

황궁에서 성인이 된 공주는 황제의 동복 여동생인 등요 공주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미인방에 나타난 이는 등요 공주가 분명했다.

아가씨들은 아옹다옹하며 남을 깎아내리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너도나도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정 낭자도 재빨리 일어섰다.

그녀는 구석에 앉다 보니, 계단 어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순서대로라면 그녀가 가장 먼저 내려가야 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한 아가씨가 조롱했다.

“정 낭자, 주제 파악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 낭자가 내려가면 우리 앞길을 전부 막아 버릴 거 아니에요. 그러면 당신이 내려가기 전에, 공주님께서 올라오실 거란 말이에요.”

“저기요……!”

정 낭자의 등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성이 나서 움찔거렸다. 하지만 정 낭자는 시녀를 잡아끌며 연신 뒷걸음질했다.

“저, 저는 맨 나중에 내려갈게요. 언니들 먼저 내려가세요…….”

“흥!”

말을 꺼냈던 아가씨가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먼저 내려갔다. 그 뒤로 다른 사람들도 줄을 이어 내려갔다.

아가씨들은 서두른 덕에, 등요 공주가 들어서기 전에 대청에 모였다.

잠시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니, 등요 공주와 소함연이 앞뒤로 미인방에 들어섰다. 그 뒤로는 궁녀들이 두 줄로 나뉘어 뒤따르고 있었다. 그 기세가 자못 당당했다.

조금 거창한 행차였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공주 마마, 만복을 누리소서.”

아가씨들은 공주에게 허리를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그녀들이 데리고 온 아랫사람들과 미인방의 집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 * *

월령안은 미인방의 뒷방에서 꽃살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긴 백화군를 입은 아름답고 고귀한 등요 공주가 들어섰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려졌다.

‘나를 만나겠다는 귀인이 등요 공주였나?’

등요 공주와는 척을 지기는커녕 제대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처럼 요란스럽게 미인방에 찾아왔다. 그것도 소씨 가문을 통해 소식까지 미리 전했다.

‘좋은 의도는 분명 아니겠지?’

이때의 월령안은 모르고 있었지만, 미인방 바깥에는 무림맹주 수횡천이 있었다. 그는 기회를 봐 월령안과 접촉할 셈으로, 그녀를 묵묵히 뒤따르던 중이었다.

황실의 공주가 미인방에 들어서는 모습을 본 순간, 월령안과 친해져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이 월 낭자는 장사하는 재능이 너무나 뛰어나구나. 황실 공주조차 월 낭자의 손님이라니. 돈이 엄청나게 많을 게 분명해!’

* * *

등요 공주는 예를 거두라고 미지근하게 말했다. 여러 아가씨를 둘러보다가 뚱뚱한 정 낭자를 보았다. 순간 살짝 혐오감을 비췄다.

“미인방의 주인은 어디 있느냐?”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도 월령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등요 공주가 언짢게 물었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미인방의 집사인 당 낭자가 한 발 나서며 공주에게 예를 올렸다.

등요 공주는 집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소함연이 등요 공주를 살펴보고는 앞으로 나서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령안이는? 공주 마마께서 오셨으니 빨리 나오라고 해라. 동생도 이제는 일품 부인이 아니잖아. 어서 나와서 공주님을 뵈어야지.”

“소 낭자, 저희 주인님께서는 외동딸로 언니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가게는 이 가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당 낭자는 소함연의 체면을 무시하고 비굴하지도, 건방지지도 않게 말하였다.

“푸흡…….”

소함연을 아니꼬워하던 누군가 이 광경을 보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소함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큰 상처를 입은 듯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지? 동생은 오늘 꼭 와 있겠다고, 어제 분명 약속을 했었다. 어떻게 약속을 어길 수 있지? 상인은 약속을 중요시하는 게 아니었나?”

“소 낭자, 주인님께서 몇 시에 도착한다고 말씀하셨던가요?”

당 낭자가 친절하게 되물었다.

“뭐라고? 내게 시간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냐?”

등요 공주가 불쾌해서 소함연에게 눈을 부라렸다.

소함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연신 변명했다.

“공주님, 저, 전…… 모릅니다. 저는 일찍 나오라고 말했거든요. 걔가…….”

“그렇다면 월령안이 이 공주까지 무시한다는 얘기냐?”

등요 공주는 노기를 전혀 감추지 않았다. 순간 미인방에 있던 아가씨들은 감히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뒤쪽에 있던 월령안은 창살 사이로 잔뜩 화가 난 등요 공주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등요 공주와는 황궁에서 단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등요 공주는 그녀를 냉담하게 대했지만, 적의를 품지는 않았다. 그리고 등요 공주의 미움을 살 일을 한 적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등요 공주가 나에게 유감을 품을 일이 없는데?’

월령안은 미간을 살짝 구기고 한참이나 생각을 더듬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등요 공주의 미움을 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시녀를 가까이 불러 귓속말로 일렀다.

“어서 은양당으로 가서 집사 장 상궁을 뵙거라.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거라…….”

시녀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곧 정중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월령안에게 예를 올리고 밖으로 나는 듯이 달려 나갔다.

시녀에게 심부름을 보내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그제야 월령안은 옷소매를 정리하고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등요 공주가 만나러 왔다니, 그럼 만나 주지!’

소함연이 서둘러 변명했다.

“공주님, 아니에요……. 동생은 줄곧 예의를 알고 잘 지키는 애였어요. 어찌 공주님의 체면을 무시할 수 있겠나요. 아마 일이 있어 지체한 것 같네요. 곧 도착할 거예요. 공주님, 부디 동생에게 화내지 마세요. 동생이 출신이 좋은 편이 아니라, 만약 공주님께서 화를 내시면 걔가 나중에…….”

“소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왔습니다.”

월령안은 문밖에서 소함연의 말을 들었다. 겉으로는 그녀를 위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깎아내리는 말에 차갑게 웃었다.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소함연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매번 똑같은 수법밖에 몰라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월령안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소함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바로 등요 공주의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리고는 싹싹하게 말했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소녀는 오늘 모실 귀인이 공주 마마이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공주 마마께서는 옷을 사러 오셨는지요? 마침 시간도 다 되어 가는군요. 전하께서도 이 층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는지 보시면 어떨까요?”

등요 공주는 말없이 이맛살만 찌푸렸다.

“건방진 것, 공주 마마께 무릎을 꿇지 못할까!”

등요 공주 곁에 있던 궁녀가 앞으로 나서며 호통쳤다.

월령안은 궁녀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등요 공주를 올려다보며 의아해서 말했다.

“공주 마마, 미인방은 장사하는 곳입니다. 공주님께서는…… 옷을 사러 오신 게 아닌지요?”

‘트집을 잡으러 오셨나?’

“사고는 싶다만, 미인방에서 파는 이깟 싸구려 물건들은 눈에 차지 않는구나.”

등요 공주가 거만하게 싫은 티를 내며 말했다.

“옷을 사러 오신 게 아니라면,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월령안은 안색이 흐려진 아가씨들을 둘러보고는 웃음을 머금었다.

‘등요 공주는 방금 한 말 때문에 여기에 있는 아가씨들 대부분에게 미움을 샀다는 것을 알려나?’

물론 이 아가씨들의 출신은 등요 공주보다는 고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들도 미인방에 오면 한 번에 몇백, 몇천 냥 정도는 거뜬히 썼다. 당연히 자기 집에서는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몸이었다.

등요 공주는 말 한마디로 여기 있는 아가씨들을 모두 싸구려 취급해 버린 셈이었다. 아주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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