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89)화 (89/1,004)

89화 춘일연 초대장

조계안은 월령안이라는 말만 나오면 정서가 불안정해졌다. 황제는 그 모습이 내심 불만스러웠다.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열흘 뒤면 춘일연이다. 올해에는 등요(橙瑤)가 참가하니, 너도 같이 가거라. 너와 짐이 동갑이니 네 나이도 적지 않구나. 태자가 벌써 세 살인데, 네가 아직 혼자라는 게 말이 되느냐? 이번에 등요와 춘일연에 참여해 봐라.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으면 말하거라. 짐이 혼사를 내려 줄 테니까.”

‘왕비가 있으면 계안이가 철이 좀 들지도 모르지. 또 월령안에게서 점차 눈을 뗄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계안이가 사람 구경을 별반 못 해 월령안을 눈여겨보는 거겠지.’

“안 갈 겁니다. 장가들지도 않을 겁니다! 왕비를 맞아들여서 어쩌라고요? 장식품으로 앉혀 놓게요? 저 같은 신분으로…….”

조계안이 헛웃음을 짓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신분에 처자식을 두는 건, 아내도 자식도 모두 해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는 의기소침한 조계안을 보자 조금 성이 났다.

“네 신분이 어떻단 말이냐? 너는 짐이 직접 책봉한 정정당당한 조왕이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단 말이냐!”

“황숙도 처자식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자식을 두면 암황의 자리는 누구에게 넘겨줍니까? 황형, 우리는 친형제라 황형이 저를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저희 후손들이 우리와 같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그에게 자식이 생긴다고 해 보자. 그의 아들과 태자는 친형제가 아닐 것이다.

태자에게는 자신의 친형제가 있고, 신임하는 친구가 따로 있을 것이다. 만약 조계안에게도 자식이 있다면, 우선 자기 아들을 위할 것이다.

황형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해 주고 있었다. 암황인 그에게 자식을 두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감히 그럴 수는 없어.’

암황은 자식을 둘 수 없다.

이는 황실의 규칙이자, 암황의 규칙이었다.

“계안아, 걱정이 지나치구나. 태자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황제도 태자가 조계안의 자식에게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황형께서 제게 잘 대해 주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태자가 착하다는 것도 알고요. 다만 아직은 처자식을 둘 생각이 정말 없습니다. 강요하지 마십시오. 정 강요하시면, 환관이 될 겁니다.”

조계안은 일어서서 소매에 있지도 않은 먼지를 훌훌 털었다. 순간 정색하며 말했다.

“황형,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분간은 입궁하기 힘들 겁니다. 일이 있으면 사람을 통해 전해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 바쁘게, 조계안은 황제에게 포권을 했다. 그다음 난각 뒷문으로 바람같이 사라졌다.

“계안아, 춘일연은…….”

황제는 손을 뻗어 조계안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조계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제도 별수 없었다. 그래도 조계안을 위해 춘일연 초대장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월령안도 춘일연 초대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황제도 까맣게 몰랐다.

* * *

“춘일연 초대장이라고? 누가 보냈어?”

월령안은 초대장을 보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사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춘일연 초대장을 받게 될 줄이야. 누군가는 그녀가 눈에 거슬려, 기어코 그녀가 망신을 당해야 기쁜 모양이었다.

“아가씨, 소 승상 댁에서…….”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가!”

월령안은 초대장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 버렸다.

춘일연은 변경의 미혼 귀족 여성들이 장기 자랑을 하고, 신랑감을 고르는 연회였다. 그녀는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사 년 전에 한 번 참석했었다. 그것도 소함연이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하여 억지로 참석했었다.

게다가 이번에야말로 자격 미달이었다. 이혼당한 상인 집안 여인이 미혼 귀족 아가씨들의 연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녀가 알기로, 춘일연 초대장은 한 달 전에 벌써 다 돌렸다. 아가씨들에게 옷과 패물을 미리 준비할 시간을 주는 셈이었다.

그녀의 포목점에서도 얼마 전 최고급 비단을 대량으로 팔았다. 바로 아가씨들이 춘일연 때문에 산 것이었다.

춘일연이 고작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때 소함연이 초대장을 보내왔다.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사 년 전, 그녀가 춘일연에서 어떻게 허점을 노려 화신이 되었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함연이 모를 리가 없었다.

집사는 땅에 떨어진 초대장을 보았다. 전혀 놀라지 않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가씨, 소 승상 댁에서 전한 말입니다. 내일 초닷새는 미인방(美人坊)에 신상품을 출시하는 날이니, 아가씨께서 꼭 가게에 나와 있으라고요. 어떤 귀인이 아가씨를 만나보려 한답니다.”

“귀인? 어떤 귀인이 날 만나려 한다고? 특별히 미인방에서 신상품을 출시하는 날에? 귀인이 날 만나고 싶다면 하인을 통해 말만 하면 되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느냐?”

그녀를 만나기는 해야겠지만, 상인 집안 여인을 만나는 건 체면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 미인방에서 만나자는 뜻인 모양이다.

‘참 대단한 귀인이 납시는 모양이군!’

“아가씨, 소씨 가문에서 이처럼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걸 봐서는, 그 귀인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번 다녀오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집사는 월령안이 화가 나서 가지 않을까 두려워 한마디 권했다.

“알았다. 내일 꼭 갈 거라고 전하거라.”

집사는 그녀를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귀인이 보자고 했으니 그녀도 안 갈 수는 없었다.

상업계에 몸을 담근 사람은 모두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움직인다. 어지간해서는 남의 미움을 사려 하지 않았다. 특히 귀인들의 미움을 살까 두려워했다.

미움을 사지 않는다는 게 상대방의 호감을 사서, 귀인의 도움을 얻기를 바란다는 뜻은 아니었다. 상인들이 어린애들도 아니고, 세상에 영문 없이 잘 대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인들이 귀인의 미움을 사지 않고 될수록 가깝게 지내려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상대방이 앙갚음할까 두려워서였다.

이 세상에는 남을 도와주지도 않고, 도움을 줄 능력도 없지만, 해코지는 손쉽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그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반복적으로 들려준 내용이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상업계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피부로 절실히 느낀 현실이었다.

* * *

월령안이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소함연은 이 소식을 당장 황궁에 전했다.

소식을 전해 받은 궁녀는 당장 궁전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공주님, 소씨 가문의 전언입니다. 초닷새 그날, 월령안이 미인방에 나올 거라고 합니다.”

그날 월령안을 만나보려는 귀인은 바로 황제의 여동생, 즉 하마터면 소씨 가문 큰 도련님인 소여방에게 시집갈 뻔했던 등요 공주였다.

“똑바로 알아봤느냐? 미인방에서 내일 출시하는 옷이 부용작문(芙蓉雀紋) 석류군이 확실해?”

등요 공주는 평상 위에 누워 궁인의 시중을 받으며 손톱을 물들이고 있었다. 시녀의 말을 듣자,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하찮다는 듯이 물었다.

“공주님께 아룁니다. 소인이 가게의 침모에게 알아본 거라 확실합니다. 듣건대 치마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모든 꽃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다고 하네요.”

궁녀는 치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등요 공주 앞에서 과대 포장하여 말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그 정도라는 게 말이 돼! 촌구석에서 온 일개 상인 집안 여인에게 무슨 안목이 있다고. 가서 백화군(百花裙 – 여러 가지 꽃무늬가 수 놓인 치마)을 꺼내 오거라. 내일 입을 거야.”

등요 공주는 손을 들어 올렸다. 햇빛 아래서 곱게 물들인 손톱과 그 위에 그려진 생화같이 생동감 있는 꽃무늬를 한참 들여다보고는 만족해했다.

“잘했구나. 상을 내리거라!”

“공주님, 감사합니다.”

등요 공주에게 손톱을 물들여준 어린 궁녀는 기쁜 나머지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조금 전 말을 하던 나이 많은 궁녀가 백화군을 들고 왔다. 공주가 자아도취에 빠진 모습을 보고 급히 말했다.

“공주님, 참으로 어여쁘십니다. 내일 공주님께서 미인방에 가시면, 그 월령안은 아마 기가 눌려 고개도 들지 못할 거예요. 공주님의 백화군 앞에서는 미인방의 부용작문 석류군 같은 건 땅 위의 흙먼지와 다름없을 거고요. 아예 사는 사람이 없을 테지요.”

등요 공주는 웃음꽃이 피웠다. 그러나 곧 불쾌해하며 말했다.

“아무리 예뻐도 무슨 소용이람? 예뻐도…… 내일 대장군이 미인방에 나타나지도 않을 텐데.”

“어…… 저…… 공주님……!”

등요 공주가 대장군 육장봉을 입에 담자, 궁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장군이 돌아오자, 등요 공주는 황제에게 자청했다. 황실을 대표하여 육씨 가문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육장봉에게 시집가겠고 한 것이다. 물론, 황제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 바람에 황제와 한바탕 다툼이 있었다. 그 와중에 어쩌다 말이 그렇게 흘러갔는지 몰라도, 과거 육씨 가문으로부터 혼사를 거절당하고 결국에는 북요에 화친하러 간 현음 공주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등요 공주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온순하던 황제가 공주의 뺨을 후려쳤다.

당시 궁녀들은 깜짝 놀랐다. 그 뒤로는 공주가 소란을 피울까 두려워, 더는 대장군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왜? 너도 내가 우스우냐?”

궁녀가 어물거리는 모습을 보자, 등요 공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궁녀는 놀란 나머지 다리 힘이 풀려 버렸다. 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등요 공주가 벌떡 일어서더니 뺨을 후려갈겼다.

“천한 것, 자기 신분도 제대로 모르느냐?”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궁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기다란 손톱에 긁히는 바람에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도 화가 덜 풀린 등요 공주는 앞으로 다가가 궁녀의 얼굴을 짓밟고 지나갔다.

* * *

월령안 명의의 미인방은 변경에서 영업한 지 육 년이나 되었다. 화려하고 비싼 상등품 옷감과 옷만 전문적으로 팔아 명성이 자자했다. 귀족 여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매달 초닷새만 되면 미인방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옷들을 출시했다. 그래서 매달 이날은 변경의 귀족 여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미인방에서 출시하는 새 옷들은 그녀들을 한 번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아침 일찍, 미인방 바깥은 마차로 가득했다. 귀족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예쁜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녀들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미인방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귀빈을 대접하는 이 층으로 안내되었다.

이 층에 들어간 아가씨들은 익숙한 이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유(劉) 언니, 오늘 일찍 오셨네요? 요 며칠 춘일연에서 부를 곡을 준비한다고 해서, 오늘 못 오실 줄 알았어요.”

“짬이 나면 그냥 심심풀이로 곡을 써 보는 거야. 준비랄 것까지야, 뭐. 그냥 춘일연인데 평소 하던 대로 보여줘야지. 특별히 준비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

유 낭자는 기질이 고아한 미인이었다. 사실 그녀의 외모는 평범했다. 하지만 단아한 분위기가 그녀를 돋보이게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그녀만큼 다른 아가씨들도 분위기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게다가 옷이 날개라, 아름다운 차림새에 힘입어 각자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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