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십오만 냥의 배상액
육이는 월령안이 묻기 전에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럼 괴롭히러 온 건 아니구나.’
월령안은 조금 더 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앉아서 얘기하세요.”
육이는 상석에 앉지 않았다. 월령안도 육이 앞에서는 체면을 세우지 않고, 그의 오른편 아래쪽에 앉았다.
“월 낭자, 명세서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장군께서 지금 시세대로 그 가격을 한 번 계산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육이는 명세서를 월령안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감히 월령안을 쳐다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명세서에 적힌 물건들을 보고 얼마나 놀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참 낯익은 물건들이네요!”
평범한 명세서인 줄 알고 펼쳐보던 월령안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육 장군께서는 참 세심하네요.”
명세서의 물건들은 지난 삼 년간 그녀가 하나하나 사들여 육씨 저택을 꾸미는 데 쓴 것들이었다.
‘육이를 통해 명세서를 보내 가격을 계산하라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 금액대로 계산해서 나에게 돌려주려는 건가?’
“월 낭자, 다른 뜻은 없을 겁니다. 장군께서는 가격만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장군의 이번 일 처리는 미흡했다. 그래서 육이는 자기도 모르게 장군을 위해 한마디 변명을 덧붙였다.
장군은 세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 조왕이 장군부를 때려 부수지만 않았어도, 이런 세세한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으리라.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찌 다른 생각을 하겠나요?”
월령안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육이의 변명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육이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 더 변명하려는데, 월령안이 말을 이었다.
“육이 장군,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계산해 드릴게요……. 그런데 세상에 딱 하나뿐인 물건들도 좀 있네요. 시세가 매우 높긴 하지만, 저는 거기에 거품이 많다고 봐요. 그런 건 어떻게 계산할까요?”
장군부가 침입을 당해 기물이 파손된 사건은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소문이 나면 장군이 분명 싫어할 게 뻔했다. 육이는 이 사건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 월령안의 말에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시세대로 적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이각만 기다려 주세요.”
월령안은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명세서를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서 명세서의 익숙한 이름들을 들여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곧 필묵을 꺼내 명세서를 새로 베껴 가격을 적어 넣었다.
모두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물건들이었다. 그 가격들을 손금 보듯이 훤히 알고 있다고는 못해도,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지금 시세 가격을 다 적는 데는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삼 년 전의 매입가도 뒤쪽에 함께 적어 넣었다.
이렇게 앞뒤 가격을 비교해 보았다. 삼 년 전 매입가는 약 십이만 냥이었다. 지금은 이십만 냥을 넘어서고 있었다.
“배상해 줄 거면, 육 대장군께서 통 크게 현재 시세로 배상해 주셨으면 좋겠네.”
월령안은 육장봉이 잘 볼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총금액을 커다랗게 적어 넣었다.
가격을 계산한 후, 월령안은 다시 한번 검토했다. 마음속으로 주판알을 튕겨 가며 틀림없음을 재확인했다. 그다음 명세서를 봉투에 넣어 들고 나왔다.
“육이 장군, 계산을 마쳤어요. 보시고…… 의문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감사합니다.”
육이는 그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냥 봉투를 건네받고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벌써 해 질 무렵이라 거리에는 행인이 거의 없었다. 육이는 박차를 가해 일각 만에 장군부로 돌아갔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서재로 가 월령안이 준 봉투를 올렸다.
“장군, 월 낭자가 계산한 가격입니다.”
“봤느냐?”
육장봉은 봉투를 건네받고 펼쳐보는 대신 냉랭하게 물었다.
그 역시 체면이 중요했다. 육 장군이 제 무덤을 파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는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저는 보지 않았습니다.”
육이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물러가거라.”
육장봉은 안색이 조금 밝아져 머리를 끄덕였다.
육이가 나가고서야 육장봉은 월령안이 새로 베껴 쓴 명세서를 천천히 꺼냈다. 그리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월령안은 일 처리가 세심했다. 현재 시세 뒤에 삼 년 전의 가격까지 적어 넣었다.
대조해 본 결과, 모든 물건의 가격이 소폭 올랐다. 몇몇 물건의 가격은 배로 오르거나, 심지어 몇 배씩 오른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였다. 단 하나뿐인 물건은 찾기도 어렵고, 애호가라면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사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강 보고 나자, 육장봉도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정도였다. 그러나 마지막 총액을 보는 순간, 안색이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폐하께서도 참 약삭빠르시긴! 내가 이런 쪽으로는 폐하께 이길 수가 없구나!’
삼 년 전, 십이만 냥 어치였던 물건들이 지금 시세로 따졌더니 족히 이십육만 냥이 넘었다!
고작 삼 년 동안 가격이 곱절로 뛰었다. 월령안은 안목이 뛰어났다. 돈을 쓰더라도 그것으로 돈을 불릴 줄 알았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돈을 배상하시고도 그리 좋아하셨지.”
황제도 알고 있었던 게 뻔했다. 그게 아니라면 태도가 그렇게 급변할 수 없었다.
* * *
육장봉은 몰랐지만, 황제는 그보다 반 시진 늦게 조왕이 망가뜨린 물건들의 현재 시가를 알게 되었다.
“이십육만 냥에서 삼십만 냥 사이라고? 확실히 계산한 게 맞느냐?”
황제는 관리가 올린 명세서를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차이가 크게 나다니?’
“폐하께 아룁니다. 모두 상등품인 데다가 몇 점은 골동품입니다. 이 물건들은 가격이 오를 뿐 내려갈 가능성이 없습니다. 가격이 오르는 게 정상입니다.”
관리는 이 명세서를 쓴 사람이 안목이 남다를뿐더러 취향 또한 고상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명세서에 적힌 물건이 모두 대가의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 상등품이라 언제든 쉽게 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절대 내려가지 않을 것이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이십여만 냥 어치의 물건인데 육장봉에게 십오만 냥만 주었다. 어떻게 계산해도 자신이 이득을 본 셈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두 관리를 보낸 다음, 명세서를 들고 조계안을 찾아갔다.
조계안 역시 육장봉이 당하는 것을 보자, 기분이 좋아 방방 뛰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혼자 난각에 주안상까지 차려 놓고 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황제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기분 좋게 불렀다.
“황형, 저와 한잔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 기분은 좀 나아졌느냐?”
황제는 조계안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한시름을 놓았다.
“뭐, 그럭저럭요.”
육씨 저택을 때려 부쉈다. 월령안이 육장봉을 위해 꾸민 ‘집’을 부쉈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의 심정은 하늘만이 알 것이다. 그 물건들을 볼 때마다 눈에 거슬렸다. 진작부터 때려 부수고 싶었다. 단지 여태껏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황제는 조계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직접 잔에 술을 부어서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오늘, 짐이 널 대신해 십오만 냥을 배상했느니라! 짐의 개인 금고에서 나온 돈이다. 이 빚은 어떻게 갚을 셈이냐?”
조계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분 좋게 배상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시 황제는 기쁜 나머지 실눈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황제가 큰 이득을 본 것처럼 보였으리라.
“짐이 그 많은 돈을 물어냈는데, 어찌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느냐!”
황제는 사실 기뻤다. 그러나 조계안 앞에서는 짐짓 성난 체했다.
“짐의 개인 금고에는 돈이 그리 많지 않다. 이번은 괜찮아. 하지만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었다가는 짐도 물어내지 못하겠구나.”
육장봉도 이번에는 모르고 손해를 본 것이었다. 조계안이 또다시 장군부를 부쉈다가는, ‘순진’하게 원래 가격대로 계산하지 않을 것이다.
“황형,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음부터는 물건도 부수지 않고, 사람도 때리지 않겠습니다.”
월령안은 지난 삼 년 동안 육씨 가문의 상로를 열어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 금액에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육씨 가문 전체를 먹여 살리다 보니, 저택을 꾸미는 데는 십몇만 냥을 들이는 게 최대한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 다시 사기는 힘든 물건들이었다.
이제 육씨 저택에는 월령안이 심혈을 기울여 사들인 물건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부술 필요도 없었다.
“육씨 저택을 헐어버려서는 더욱 안 된다!”
황제는 조계안을 훤히 꿰고 있었다. 조계안이 점점 더 판을 키울까 두려워 한발 앞서 막아 버렸다.
조계안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황제가 노파심에서 권고했다.
“계안아, 장봉이가 그래도 대장군이다. 네가 이리하는 거야 우리 형제끼리는 네가 불쾌해서 성질을 부렸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황실에서 장봉이에게 불만을 품고, 대장군의 체면에 먹칠하는 꼴이다. 알겠느냐?”
“황형, 그 말씀은 관리는 방화해도 괜찮지만, 백성은 등불을 켜도 안 된다는 뜻이로군요. 제가 육씨 저택을 부수는 바람에 육장봉의 체면을 짓밟았다고 칩시다. 그럼 육비우가 월씨 저택을 부순 건요? 그건 월령안의 체면을 짓밟은 게 아닙니까?”
성질을 부린 게 아니었다. 일부러 그랬다.
‘내가 일부러 육장봉의 체면에 먹칠했다면 어쩔 건데?’
“육비우가 월씨 저택을 쳐부순 건 분명 잘못한 거다. 그렇지만 그게 네가 육씨 저택을 부숴도 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월령안은 일개 상인일 뿐이야. 어디 장봉이에 비교할 만큼 체면이 있다는 말이냐?”
황제는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또 월령안 때문이었군. 월령안이라는 여인 때문에 요즘 계안이가 어리석은 짓을 얼마나 저질렀던가?’
“황형,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조계안이 잔을 들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누구보다 더 귀하단 말입니까?”
“계안아, 짐은 그 말이 탁상공론하는 서생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구나.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거다.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신분의 높고 낮음, 귀하고 비천함에 대한 구분은 있는 법이다.”
이것은 누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고난 것이었다. 월령안에게 그럴 능력이 있어,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나 그들 계층으로 기어오른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영원히 그들보다 낮은 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운명이었다.
“황형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순진했습니다. 사람은 각자 팔자가 다른 법이죠.”
조계안은 기분이 언짢아져서 쓴웃음을 지었다. 술을 주전자 째로 들이켜 한입 가득 부어 넣었다.
“계안아, 적당히 마시거라.”
황제는 눈썹을 찡그리며 술 주전자를 빼앗았다.
조계안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술도 못 마시게 합니까? 황형, 간섭이 너무 심하십니다!”
“짐이 보건대, 너는 간섭할 사람이 필요한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