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85)화 (85/1,004)

85화 멍청이의 사과

육비우는 사람들 앞에서 월령안 때문에 체면이 구겨지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험악하게 그녀를 노려보더니, 부끄러운 나머지 화가 나서 말했다.

“월령안, 이 가식적인 계집이! 이러는 게 얼마나 꼴사나운지 알아? 이러는 게 얼마나……!”

그가 욕을 한마디 하자마자, 육장봉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육비우, 지금 당장 월령안에게 차를 올리고 사과하거라!”

“형님…….”

육비우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손을 덜덜 떨었다. 억울하다는 듯이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형님이 어떻게 날 괴롭히는 사람을 편들 수 있어?’

하지만 육장봉은 그를 차갑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비우는 창백한 얼굴을 황급히 돌렸다. 육장봉을 제대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형님이 화가 났다. 월령안이 먼저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고소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육비우는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나서서 사과하려는 순간이었다. 월씨 가문의 하인이 갑자기 와서 말을 전했다.

“대장군, 장군부의 집사라고 하는 자가 급한 일로 뵙기를 청합니다.”

육비우는 순간 얼굴이 활짝 피었다.

“형님, 집사가 이렇게 급히 찾아온 걸 보니, 분명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봅니다. 빨리 돌아가요.”

‘하늘이 날 돕는구나!’

월령안도 한숨을 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날 돕지 않는군. 혹시 육장봉이 미리 손을 쓴 건가?’

월령안은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뜻밖에도 육장봉은 꿈쩍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먼저 월령안에게 차를 따르고 사과하거라.”

보아하니 그녀가 육장봉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로 시선을 거뒀다.

육비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형님…….”

‘이 사람이 정말 내 친사촌 형이라고?’

육장봉은 육비우를 전혀 봐주지 않고 재촉했다.

“얼른 사과하거라!”

“예, 형님.”

육비우는 우울했다. 앞으로 나와 하인이 건네준 차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월령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월령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손에 든 찻잔을 그녀의 앞에 밀어 놓으며 말했다.

“저……. 차 드시게. 그리고, 미안했네!”

‘월령안,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차나 마시고 이걸로 끝내자고.’

하지만 월령안은 그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트집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대장군, 이건…… 군대에서 새로 나온 사과 방식인가요?”

육이는 묵묵히 월령안을 힐끔 보았다.

‘월 낭자는 비우 도련님과 군인들의 체면을 한데 묶어버렸군. 정말 독한 분이야. 전혀 인정사정이 없네.’

“육비우,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육비우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육장봉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육비우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육장봉이었고, 그다음이 육장봉이 화내는 것이었다.

육장봉이 화를 내려는 기색이 보이자, 더는 얼버무릴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숨을 참은 뒤, 월령안과 마주 섰다. 허리를 굽히고 손에 든 찻잔을 높게 쳐들면서 말했다.

“월 낭자, 먼젓번의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과드립니다. 낭자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다음에는 절대 이러지 않겠습니다.”

육비우는 등 뒤가 화끈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월씨 가문 하인과 형님의 친위대가 그의 무능함을 비웃고 있는 광경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월령안의 작품이었다.

‘오늘의 이 빚은 내 똑똑히 기억해 두겠다!’

“비우 도련님, 별말씀을요.”

월령안은 육비우가 그녀의 앞에서 고귀한 허리를 숙이고, 고귀한 고개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록 마지못해서 하는 사과였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월령안은 곁눈질로 육장봉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차를 마시느라 육비우를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찻잔을 받을 때 손가락을 움직여, 육비우의 무릎으로 작은 빛을 튕겼다.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

“으악!”

그 빛이 사라지려는 찰나, 육비우가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풀썩 주저앉았다.

이때 이미 월령안은 육비우에게서 차를 받아 들고 난 뒤였다. 그가 무릎 꿇은 모습을 보자, 유난히 활짝 웃었다.

“어머나, 비우 도련님. 왜 이러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저 같은 일개 여자 상인이 도련님이 무릎까지 꿇고 하는 사과를 어찌 받겠어요.”

말은 이렇게 해도 두 손은 찻잔을 들고 있었다. 다가가서 육비우를 일으키려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월령안, 네 짓이냐?”

육비우는 고개를 들더니, 분노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억울하다는 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형님, 월령안이 절 해코지했어요.”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작은 아주 빠르고 교묘했다. 그러나 그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요.”

월령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육장봉이라면 자신이 육비우에게 해코지한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공당에서도 같은 수법을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들 어쩌겠는가. 육장봉이 그녀에게 따지고 들려면 증거부터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월령안의 예상과는 달리, 육장봉은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만 보더니 일어섰다.

“육이, 비우 도련님을 부축하거라. 이만 가자.”

“형님!”

육비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슬프고 분하여 버럭 소리쳤다.

‘내가 월령안에게 해코지를 당했는데. 형님이 복수해 주지 않는다고?’

육장봉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월령안에게만 말했다.

“화가 좀 풀렸소?”

‘역시 손해를 보지 않는군. 이렇게까지 육비우를 괴롭혀도, 오늘은 내 기분이 좋아서 그냥 넘어갈 거라고 제대로 파악했어.’

“대장군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일어서서 예를 올렸다. 물론 잊지 않고 활짝 웃음도 지어 보였다.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가 나 눈시울이 벌게진 육비우를 훑어보았다. 또 월령안에게 말했다.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지. 앞으로는 저 멍청이를 더 괴롭히지 마시오.”

육비우는 육씨 가문에서 태어나기를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둔한 머리로는 월령안에게 팔려 가면서도 그녀에게 돈을 세어 주었을 것이다.

월령안은 더 눈부시게 웃었다.

“대장군, 저는 은양당에 오랫동안 음식을 기부한 선량한 사람이랍니다. 어떻게 멍청이를 괴롭히겠어요?”

“됐다. 가자.”

육장봉은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말없이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형님, 방금 저보고 멍청이라고 했죠?”

육이에게 부축을 받고 있던 육비우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눈이 벌게져 물었다.

“아직 구제 불능은 아니니까. 괜찮다.”

육장봉은 부인하지 않았다.

“형님은 제 친사촌 형이잖아요!”

육장봉은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두 줄기 눈물이 볼썽사납게 흘러내렸다.

“형님처럼 남과 손잡고 사촌 동생을 괴롭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화내셨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아무도 그의 눈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육장봉은 진작에 나가버렸다. 월령안은 점점 더 신나게 웃고 있었다. 육장봉의 친위대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담담하게 그의 곁을 지나갔다. 심지어 그를 부축하고 있는 육이도 말이 없었다.

오직 육십이만이 육비우의 곁을 지날 때 살며시 속삭였다.

“월 낭자는 울 때도 정말 예쁘고 하나도 안 추했는데, 도련님이 우시니까 정말 추하네요.”

“…….”

“하하하하……. 십이는 정말 안목이 뛰어나네요!”

월령안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화청 밖에서 월령안의 웃음소리를 들은 육장봉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월령안이 즐거우면 됐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육장봉은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왜 어딜 가나 육십이가 끼어드는 거지? 다음번엔 육십이를 절대 데리고 오지 말아야겠군!’

* * *

“장군부가 부서졌습니다!”

육장봉이 집사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누가 장난을 치나.’

집사가 간이 부어 다른 사람과 짜고 그를 속이는 줄로 알았다.

이 변경에서 장군부를 부술 만큼 간이 큰 놈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남들 보는 앞에서 장군부를 부수다니, 살기 싫은 모양이었다.

이 말을 듣자, 육장봉의 뒤에 있던 친위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집사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장군, 소인이 어찌 감히 장군을 속이겠습니까? 장군부가 정말로 부서졌습니다. 호원도 전부 부상당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자 육장봉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집사는 그를 재차 속일 만큼 간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

“장군, 오늘 아침 장군께서 떠나신 지 일각도 되지 않아 어떤 도둑놈이 저택에 침입했습니다. 그놈이 하인에게 들키자 화가 났는지 호원 전부를 때려눕히고 저택을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장식품들뿐만 아니라 창문까지 전부 부쉈습니다.”

집사가 울먹이며 말했다.

제일 화가 나는 부분은, 그 도둑놈이 저택을 부순 뒤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갔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방자할 수가 있는가!’

저택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도둑을 잡기는커녕 어떻게 생겼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한다. 소문이라도 나면 보통 망신이 아니었다.

“어떤 놈이 간덩이가 부어 감히 육씨 저택을 부쉈단 말이냐? 살고 싶지 않다더냐?”

육비우는 육이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집사의 말을 듣자, 억울함도 잊은 채 큰소리로 욕을 해댔다.

육장봉의 친위대는 무거운 표정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은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않는 법이거늘, 대낮에 장군 저택을 때려 부수다니. 우리를 무시한 게 아니고 뭐야? 대놓고 우리 장군 얼굴에 먹칠하려 들어?’

육비우도 서러움을 잊고 얼굴이 벌게져 말했다.

“형님, 이 일을 절대 그냥 넘기면 안 됩니다. 감히 우리 장군부를 부수다니. 우리 육씨 가문의 체면을…….”

“입 다물어!”

육장봉은 육비우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집사에게 물었다.

“그놈에게 특징은 없었느냐?”

장군부를 부술 배짱이 있고, 부수고 나서 태연하게 떠날 만한 능력까지 갖춘 인물은 얼마 없었다.

‘혹시 수횡천인가?’

“그놈의 키는 장군과 비슷했고, 옷차림도 번듯했습니다. 다만 얼굴 생김새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얼굴에 가면을 썼고, 무술이 뛰어나서 저희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집사는 다른 건 몰라도 그 가면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가면?”

육장봉이 차갑게 웃었다.

“됐다. 누군지 알겠구나!”

‘조계안이 간덩이가 부었군. 대낮에 내 장군부를 부쉈겠다.’

친위대는 집사의 말을 듣자, 역시 침묵을 지켰다. 그들 역시 누구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자가 맞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형님, 누군데요?”

육비우는 육장봉과 친위대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육장봉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호위병의 손에서 채찍을 받아 들고 말에 올라탔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예, 장군.”

친위대 열두 명이 신속히 말을 타고 육장봉의 뒤를 따랐다.

“형님, 저, 전 아직 말을 타지 못하는……!”

육이는 집사에게 육비우를 넘겨주고 떠났다. 육비우는 육장봉 일행이 그만 남겨두고 떠나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타깝게도 멈춰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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