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월 낭자에게 사과해라
노인은 퉁명스럽게 돌아서며 손에 든 꽃을 다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또 일부러 귀찮다는 듯이 월령안을 밀쳤다.
“빨리 가서 네 꽃이나 다듬거라. 내 산책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긴 해야겠어요. 나중에 육장봉이 그 멍청한 동생을 데리고 사과하러 온다고 했거든요. 대접을 소홀히 했다고 꼬투리라도 잡히면 안 되잖아요. 됐어요, 영감님. 저 먼저 갈게요.”
월령안은 꽃을 받아 들고 안뜰을 향해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육장봉이 또 온다고? 사과할 셈이면 육비우 그 멍청이더러 혼자 오라고 하면 될걸, 육장봉은 왜 따라온다는 거야? 당당한 대장군이 그리도 한가한가?”
노인은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월령안에게 큰 소리로 물어봤다.
‘육장봉이 요즘 너무 자주 오는 것 같군. 게다가 어젯밤에 이미 왔다 갔다지?’
한 번 또 한 번, 번거롭지도 않은지 자주 월씨 저택에 와서 월령안을 찾았다. 노인은 육장봉에게 다른 꿍꿍이가 없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영감님……. 전 당하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뒷모습을 보인 채 손에 든 꽃을 흔들었다.
월령안은 금도, 바둑도, 서예도, 그림 그리기도 잘하지 못했다. 단 유독 꽃꽂이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온실에서는 제일 평범한 꽃이라도 월령안의 손을 거치면, 화려하고 산뜻하게 아름다운 꽃으로 탈바꿈했다. 문인들과 선비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감탄하며 시를 지었을 것이다.
월령안은 꽃꽂이를 마쳤다. 또 잎을 다듬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에게 뒷정리를 시키고, 자신은 화분을 들고 가서 화청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화분의 위치를 세세하게 조정했다. 뒤로 물러서서 살펴보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
“아가씨, 육 장군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인은 이번에야말로 육장봉이 문에 들어서기 전에 미리 알렸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나와 함께 육 장군을 맞이하러 가자꾸나.”
월령안은 손을 털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얼굴에 걸린 미소는 한층 더 환해졌다.
어젯밤 그녀의 관찰에 따르면, 육장봉은 그녀가 웃을 때면 성미가 조금 누그러져서 상대하기 편해졌다. 그래서 육장봉을 볼 때마다 예쁘게 웃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웃는 얼굴이 재물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녀는 누구를 만나든 항상 웃었다. 육장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월령안은 하인을 데리고 밖으로 빨리 걸어갔다. 멀리서 육장봉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발걸음을 더욱 빨리해서 맞이하러 갔다.
“육 장군께서 몸소 행차하셨는데 마중이 늦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오늘 월령안은 개나리를 수 놓은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날의 붉은 석류군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소녀다운 명랑함과 순진한 분위기가 물씬 묻어났다. 온몸에서 봄기운이 한껏 흘러넘쳤다. 지금의 계절에 꼭 어울리는 옷차림이 뜰에 가득한 꽃이며 푸른 잎과 어울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봄을 몸에 걸친 듯한 월령안이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정원에 서 있던 육장봉은 그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불현듯 머릿속에서 암위가 가져왔던 소식이 떠올랐다.
사 년 전, 월령안이 처음으로 춘일연에 초대받았다는 소식은 온 변경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녀는 그해의 화신이라는 영예를 차지했다.
춘일연은 해마다 열렸다. 해마다 새로운 화신이 탄생했다. 육장봉은 그 여인들이 화신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 똑같이 눈 두 개에 코 하나 달린 사람인데, 어떻게 신이 된다는 말인가? 어디를 봐서 화신을 닮았다는 거지?’
육장봉의 눈에는 춘일연이란 심심한 귀족 아가씨들이 여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연회에 불과했다. 좋은 집에 시집가려고 애쓰는 허울뿐인 연회라고 생각했다.
머저리나 그 화신이라는 칭호를 진지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햇빛 아래 서서 온몸으로 봄기운을 물씬 풍기는 분홍색 옷차림의 월령안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화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화신이라면 이래야지!’
화신이라면 산뜻하면서도 단아하고 생기가 넘쳐야 한다. 샘물처럼 맑고 깨끗하고, 달처럼 밝고 환해야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아름다움과 고상한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
마치 월령안처럼.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나 그가 한참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자,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불렀다.
“대장군?”
“흠…….”
육장봉은 목을 가다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들어가지!”
육장봉의 표정은 오만했다. 눈빛은 어두웠다. 그가 월령안을 보고 넋을 잃었다고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대장군, 들어오시죠…….”
월령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 육장봉이 일부러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하지 않고, 계속 허리를 굽히고 있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 기선 제압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사과하러 오겠다고 한 건 육장봉이었다. 인제 와서 또 기선 제압을 하려 들다니.
‘육장봉 저 인간은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월령안은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생글거리는 얼굴로 육장봉을 방으로 안내했다.
“정원을 다시 수리했소?”
육장봉은 월씨 저택에 처음 온 것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둘러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롭게 바뀐 정원을 보며 물었다.
“방금 고쳤어요.”
월령안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번 사건 이후로는 우리 집을 부수러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싹 다 고쳤어요. 어차피 낡은 집이라, 제가 머물기에도 불편했거든요.”
“문은 왜 안 바꿨소?”
그가 들어설 때, 대문 두 짝은 여전히 색이 달랐다. 비록 눈에 띄진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면 티가 났다.
“홍목 문 두 짝을 비싸게 주문했는데,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월령안은 이 말을 하면서 육비우를 슬쩍 훑어보았다.
‘육씨 가문의 작은 장군님, 능력이 있거든 다시 한번 부숴 보시지 그래? 난 너희 집 재산을 거덜 낼 자신이 있거든.’
육비우는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월령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당장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월령안이 지금 나를 쳐다보다니. 무슨 뜻이지?’
“좋소. 앞으로는 누구도 감히 당신 집 문을 부수지 못하겠지.”
육씨 가문과 소씨 가문, 문무 양쪽에서 각각 이름을 날리는 조정의 대신들마저 월씨 저택을 부수고 배상금을 물었다. 다른 사람도 손을 대기 전에 배상금을 물 형편이 되는지부터 생각해 볼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비우 도련님, 그렇지 않나요?”
월령안은 웃으며 육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이 좁았다. 육비우가 방금 그녀를 노려봤으니, 조금이라도 갚아 주지 않으면 이 좋은 기회를 헛되이 날리는 셈이었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육비우는 화가 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월령안에게 고함을 지르려던 순간이었다. 육장봉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순식간에 겁을 먹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월령안도 적당히 하고 물러났다. 더는 육비우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과 정원의 배치에 대해 몇 마디 나누며 그를 화청으로 안내했다.
“대장군, 앉으세요.”
육장봉은 주인 자리에 앉기 좋아했다. 월령안도 육장봉의 기분을 맞추듯, 그가 올 때마다 차지하던 자리로 기꺼이 안내했다.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의자인데,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그 의자가 크기도, 푹신함도 적당하니 아주 편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의자가 놓인 자리마저 딱 좋았다. 무엇이든 그의 마음에 꼭 들었다.
‘내 생각이 지나친 건가?’
육장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깐 사색에 잠겼다.
월령안이 고개를 들다가 육장봉의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자 순간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다 바로 평소처럼 하인더러 육장봉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했다.
육장봉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든, 육비우를 데리고 사과하러 온 것을 구실로 또 무슨 일을 꾸미든 상관없었다. 그가 육비우를 데리고 사과하러 왔으니, 월령안은 사과를 받으면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적이 쳐들어오면 장군을 보내어 막고, 홍수가 밀려들어 오면 둑을 쌓아 막으면 되었다.
월령안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생긴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대장군, 우리…… 이젠 시작할까요?”
차가 나오자 월령안이 먼저 말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육비우의 사과부터 받고, 기분이 좋아진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육이!”
육장봉이 찻잔을 들더니 육이에게 눈짓했다.
“월 낭자, 이것은 우리 장군께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기쁘게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육이는 예단(禮單 - 예물 명세서)을 월령안 앞에 바쳤다.
“대장군께서 너무 예의를 차리셨네요……. 받기 미안해서 어째요.”
월령안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단을 받는 속도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예단을 펼쳐보자 안에는 옷감, 장신구, 찻잎, 장식품 등이 쓰여 있었다. 전혀 정성을 쏟지 않고, 그저 예의상 준비한 선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받는 사람의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식적인 선에서의 선물이었다.
선물을 준다면 받는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는 법. 흔하디 흔한 이 선물들은 월령안의 눈에는 전혀 성의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육씨 가문의 성의가 필요하지 않았다. 육씨 가문에서 사죄하는 뜻으로 선물을 내놓는다는 자세만으로 충분했다.
월령안이 예단을 다 보자, 육장봉은 한쪽에 마지못해 서 있는 육비우를 바라보았다.
“어서 월 낭자에게 사과해라!”
순간 육비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님, 저한테 이 여자에게 사과하라고 하면, 이 여자가…….”
달칵!
월령안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과 찻잔 뚜껑이 부딪치는 소리가 육비우의 말을 뚝 잘랐다.
‘월령안, 일부러 한 짓이지!’
육비우는 이 말을 꾹 참느라 답답해 죽을 뻔했다.
월령안은 그에게 웃어 보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대장군, 저 같은 일개 상인은 비우 도련님께서 무릎까지 꿇고 사죄하시면 감당할 수 없답니다.”
“형님, 보세요…….”
육비우는 의기양양한 기색을 내비치며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눈치 좀 있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더는 웃음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월령안은 육비우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대장군, 비우 도련님께서 제게 차를 올리면서 사과하신다면 충분합니다. 성의가 담긴 말 한마디 하면 더 좋고요. 배상하고 사과하러 오셨다는데, 필요한 과정을 다 거쳐야만 다음에 또 올 일이 없잖아요.”
“월령안, 이게 감히!”
육비우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월령안을 삿대질했다.
“대장군, 비우 도련님께서는 사과하러 오신 게 맞나요? 이렇게 화를 내시다니 너무 무섭네요!”
월령안은 과장되게 뒤로 물러났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육비우의 협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월령안의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자,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여자는 은근슬쩍 이득을 챙기는 데는 고수로군. 내가 따지지 않겠다고 했더니, 바로 겁 없이 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