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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83)화 (83/1,004)

83화 고난의 여정

“형님…….”

육비우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내 친 사촌 형이라니?’

육장봉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고개를 돌려 육이에게 분부를 내렸다.

“가마는 치워라. 비우 도련님에게 말이나 한 필 대령해라.”

“예, 장군.”

육이는 동정의 눈빛으로 육비우를 바라보았다. 속으로 묵묵히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들의 장군은 옹졸한 분이었다. 비우 도련님이 다시 한번 장군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고생문은 앞으로도 활짝 열려 있을 게 뻔했다.

“형님, 저…….”

육비우는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봐 달라고 통사정했다. 뇌물까지 살짝 먹이고서야 매질을 심하게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며칠이나 요양해서, 인제 겨우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된 참이었다. 그런데 형님이 말을 타라고 했다.

‘나보고 죽으란 소리 아냐?’

“왜? 안 되겠느냐?”

육장봉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육비우는 겁을 먹어 찍소리도 못했다.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됩니다! 됩니다, 형님!”

“가자!”

육장봉은 육비우가 꼴도 보기가 싫었다. 긴 다리로 성큼 나가버렸다.

육장봉 뒤에서 열두 명의 친위대가 두 줄로 나뉘어서 따라갔다. 육비우는 맨 뒤에서 혼자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너무 가기 싫었다.

그러나 맨 뒤에 있던 육십이는 그에게 내뺄 기회를 주기는커녕 눈치도 없이 물었다.

“비우 도련님, 왜 안 가십니까? 제가 업어드릴까요?”

육십이의 목소리가 작지도 않았다. 맨 앞의 육장봉은 몰라도 육이 등에게는 분명히 들렸다.

육이는 고개를 돌렸다. 육비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서둘러 다가가 육십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육십이더러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육비우에게 말했다.

“비우 도련님, 장군께서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육비우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말을 안 타면 안 될까?”

육비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이는 훌쩍 떠나 버렸다.

육비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절뚝절뚝 따라나섰다.

“너…… 기다려!”

육비우는 다친 엉덩이로 말을 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육장봉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싫어도 나가야 했다. 늦어서도 안 되었다.

육비우가 나왔을 무렵에는 육장봉을 비롯한 모두가 말에 올라탄 뒤였다.

육장봉은 차가운 눈빛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을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육비우는 놀라서 두 다리가 풀렸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형, 형님. 제, 제가 걸음이 늦습니다. 화내지 마세요.”

“얼른 타지 못할까!”

“저, 저 금방 탈게요!”

육비우는 눈앞의 커다란 말과 차가운 말 안장을 보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순간 마음속으로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말에 올라타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열두 명의 친위대를 보았다. 자신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비우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갔다. 말 안장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 상상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훌쩍 말에 올라탔다.

“악!”

엉덩이가 말 안장에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눈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하지만 육장봉과 그의 친위대는 못 들은 척, 각자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저…….”

육비우의 엉덩이에는 막 딱지가 앉기 시작한 참이었다. 평소에는 아파서 똑바로 눕지도 못했다. 도저히 말을 탈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육장봉 일행을 바라보며, 얼굴의 눈물을 닦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똑바로 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안장을 짚은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말 안장에 엉덩이가 최대한 닿지 않게 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을 탔다.

육씨 저택은 월씨 저택과 멀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말을 달린다면 일각이면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평범하게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이각 정도의 여정이었다. 낮에는 거리에 행인이 많아서 말이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육장봉 일행은 삼각이나 걸려서 겨우 월씨 저택에 도착했다.

육비우는 등자를 밟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가는 내내 고삐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말이 너무 빨리 달리거나, 장애물을 만나 들썩거리면 엉덩이를 다칠 것 같아서였다. 정말이지 고난의 여정이라고 할 만했다.

말에서 내려온 육비우는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두 다리도 국숫발처럼 흐물흐물했다. 말에서 내릴 적에 조심하지 않아 엉덩이의 상처가 슬쩍 스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육비우는 망신을 당할까 봐 비명을 참았다. 그는 말을 짚고 크게 숨을 쉬었다. 아픔이 좀 가시자, 그제야 주변의 환경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월씨 저택의 대문을 본 순간, 깜짝 놀라 엉덩이의 아픔도 잊고 몸을 곧추세웠다.

“형님, 절 왜 여기로 데려왔어요?”

‘나더러 돈을 배상하라는 건 아니겠지? 난 물어낼 돈이 없다고! 지금 소함연에게 보낼 예물 비용도 마련하기 힘든데. 어디에서 돈이 나 월령안에게 배상하겠어?’

“장군께서는 도련님이 월 낭자께 사과하라고 데리고 오신 겁니다.”

육이가 나서서 육비우에게 말했다.

“뭐라고?”

육비우는 갑자기 목청을 높이더니 소리를 질렀다.

“형님이 나더러 월령안 그 여자에게 사과하라고 했다고? 난 못해!”

“비우 도련님, 이 말씀은…… 장군께 직접 하시지요.”

육이는 제 집에 들어가듯 마음대로 계단 위로 올라가는 육장봉을 가리켰다.

“형님이…….”

육비우는 육장봉의 뒷모습을 보다가 움츠러들었다.

아까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었으니, 형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걸 보니,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육이는 거절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비우 도련님, 저희도 명령대로 움직이는 몸이니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도련님, 가시지요.”

“가면 될 게 아니냐!”

피할 수 없음을 알아챈 육비우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월령안이 감히 내 배상과 사과를 받을 수나 있을지 어디 보자고!”

‘허허…….’

육이는 동정의 눈빛으로 육비우를 힐끔 보았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똑같은 육씨 가문의 아들이었지만, 비우 도련님은 장군과 비교해 보면 같은 집안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멍청했다.

사부인도 참 대단했다. 이런 아들을 낳음으로써 혼자 힘으로 육씨 가문 남자들의 수준을 떨어트려 놓았으니까.

* * *

월령안은 아침 일찍 하인을 불러 바깥뜰을 정돈하라고 분부했다. 구석구석 깨끗하고 산뜻하게 단장해, 딱 들어서는 순간 탁 트이고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하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방안의 장식품을 직접 다시 배치했다. 또 직접 온실에서 생화를 꺾어와 꽃병에 꽂았다.

노인이 일어났을 때, 마침 월령안이 꽃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자, 노인이 물었다.

“아침부터 돈이라도 주웠느냐?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삼 년 전, 그녀가 육장봉에게 시집가고 난 뒤부터는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육씨 저택에 들어간 그녀는 늘 바빴다. 웃더라도 담담하고 옅은 미소만 지을 뿐,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육씨 저택을 떠난 이 며칠 동안 웃기는 했다. 그러나 미소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젯밤에 소 승상이 직접 쓴 절연장을 손에 넣었거든요. 어머니는 이제 소씨 가문과 연을 끊었어요.”

월령안은 허리를 숙이고 노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육장봉은 이 일을 남에게 알리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노인은 남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그리고 이 좋은 일을 알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맥이 빠지겠는가.

“정말이냐?”

노인은 말을 듣자, 두 눈을 반짝였다. 곧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대가를 치렀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돈을 좀 쓴 것뿐이니까요.”

월령안은 노인의 예리함을 알고 있었다. 돈만 들였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육장봉에게 일을 한 가지를 해 준다고 했어요.”

“육장봉? 이게 육장봉과 무슨 상관인데?”

노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육장봉이 절연장을 가져왔어요.”

월령안은 손에 든 꽃을 전부 노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가 바퀴 의자를 밀었다.

“영감님, 걱정하지 마세요. 전 손해 본 것 없어요.”

“절연장을 봤느냐? 진짜인지 확인은 했고?”

노인은 손에 든 꽃을 바라보며,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누구도 그에게 꽃을 안길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령안이 이 아이는 간도 참 크지.’

“확인했어요. 진짜가 맞아요. 소 승상이 친필로 쓴 글이 맞았고 지장, 개인 도장까지 있어 가짜일 리가 없어요. 저도 관아에 가서 조사해 봤어요. 관아에서 등록도 해줬어요.”

큰 근심과 육장봉에 대한 집념을 내려놓자, 무거운 족쇄를 벗어 던진 것처럼 홀가분했다. 마치 갓 열다섯 살이 된 소녀처럼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육장봉이 어떻게 소 승상에게서 절연장을 받아 냈을꼬? 소 승상 그 늙은 능구렁이는 탐욕스러운 데다 음험하고 악랄하지. 체면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작자인데, 육장봉이 혹시 그 노친네의 약점이라도 잡은 건가?”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으며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육장봉이 어떻게 절연장을 받아냈는지는 저와 상관이 없어요. 전 단지 육장봉과 거래를 했을 뿐이에요. 육장봉과 소 승상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두 사람 일이죠, 뭐. 저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네 말이 맞다.”

노인도 생각을 해 보니 그 말이 옳다고 느껴졌다.

모든 일을 반드시 끝까지 캐낼 필요는 없다. 이 절연장만 문제없다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 어머니의 관은 광원사에 있대요. 좀 조용해지면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려고요. 제가 청주에 가게 되면 어머니 관을 가지고 가서 아버지와 오라버니 무덤에 합장할 거예요.

애초에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위한 묫자리를 고를 때, 어머니께서 일부러 아주 넓은 자리로 고르셨어요. 자신의 자리도 남겨 두셨고, 또 제 자리도 남겨 두셨지요. 제가 죽은 뒤에 편히 쉴 자리가 없을까 걱정하셨나 봐요.”

월령안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월씨 가문에서는 아들이든 딸이든 별다른 점이 없었다. 월씨 가문의 패배한 딸들도 똑같이 끌려갔다.

끌려간 월씨 가문의 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몰랐다. 단지 월씨 가문의 묘지에 월씨 성을 가진 여인은 단 한 명뿐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사람도 월씨 가문의 가주였었다. 그리고 월씨 가문의 여식들이 가주 쟁탈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따낸 장본인이었다. 월씨 가문의 여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쓸모없는 자식으로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힘썼다.

월령안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느껴지자, 노인은 서둘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됐다, 됐어……. 얘야, 나처럼 외로운 노인네 앞에서 자랑하지 말거라. 빨리 가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니까.”

“자랑하면 어쩔 건데요? 몇 년 전에 제가 사모님 좀 만들어 달라고, 꼬맹이 좀 낳아 달라고 할 때는 죽어도 싫다 그러시더니. 지금 보세요. 아내를 맞이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됐잖아요. 꼬맹이도 없고요.”

월령안은 눈을 깜박이며 북받치려는 슬픔을 꾹꾹 눌렀다. 이 일은 좋은 일이었다. 기뻐해야 마땅했다.

“이게 어디서 잘난 척하는 게야. 애 하나 키우기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너 하나 키우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애를 하나 더 키우라니. 날 죽일 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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