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81)화 (81/1,004)

81화 육장봉의 충고

육장봉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여상한 말투는 무심했다. 하지만 수횡천은 이것이 경고임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말을 어긴다면…….

‘여기는 변경이다. 남…… 아니, 육장봉의 세력 범위 안이다.’

“육 장군, 어쩔 셈인가?”

때를 아는 자가 영웅이다. 수횡천은 지금 호칭을 바꾸는 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협객은 무예를 이용해 금기를 범한다.

조정은 이런 사람들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들 같은 무림인은 관아가 있는 곳에서는 평범한 백성을 건드릴 수 없었다. 일단 적발되면 반드시 엄벌로 다스렸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수많은 전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수횡천이 변경의 길거리에서 육장봉에게 손을 댄다면, 이튿날 조정의 사람들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무림 맹주라는 신분이 있으니 조정 사람들이 그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변경 밖으로 내쫓고,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허!”

육장봉이 웃었다.

“수 맹주, 길거리에서 나를 막아서고는 나보고 어쩔 셈이냐고? 그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너와 남상권이 무슨 사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막아섰을 뿐이다.”

수횡천은 자기 목적을 숨김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확인이 되었나? 그만 가도 되겠나?”

육장봉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너는 남상권이 맞나?”

육장봉은 계속 인정하지 않았다. 수횡천으로서도 육장봉이 그가 쫓던 사람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길에는 육장봉을 빼면, 다른 수상한 인물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그대와 무슨 상관인가?”

여전히 똑같은 말이었다. 심지어 말투조차 변함이 없었다. 수횡천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참을성을 발휘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너는 남상권이 맞느냐?”

“내가 이렇게 멍청한 질문에 대답하리라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어쩔 거고, 아니라면 어쩔 건데? 수횡천이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당당한 대장군이 무림의 일에 끼어들고, 사파를 이용해 재물을 갈취하다니. 대체 목적이 뭐냐?”

수횡천은 육장봉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육장봉이 정말 남상권이라면, 이자가 한 짓은 개인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조정이 지시한 건가? 조정에서 우리 같은 무림인들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뜻인가?’

육장봉은 수횡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수 맹주, 듣기로는…… 그쪽 무림맹의 저택이 일 년 전 강풍에 망가졌는데, 지금까지 돈이 없어 다시 짓지를 못했다지. 무림대회가 곧 열리는데도 돈 한 푼도 내놓지도 못했다더군, 맞나?”

“누구 때문인데?”

이 말만 안 했어도 수횡천은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육장봉이 그 말을 꺼낸 순간, 수횡천은 화가 치밀었다.

‘우리 무림맹의 돈줄을 막은 게 누군데?’

지금 만검산장(萬劍山莊)에서 해마다 검을 몇 자루 내다 파는 것을 빼면, 다른 생계 수단은 죄다 사파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수횡천이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것을 보자,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 맹주, 내가 그대에게 좋은 수를 가르쳐 주겠네.”

돈 몇 푼이 영웅을 곤란케 한다는 말이 수횡천에게는 전혀 틀리지 않았다. 바로 지금 돈 몇 푼에 숨이 막히는 상태였으니까.

사실 수횡천의 출신과 능력이라면 가난에 허덕이거나, 이렇게 몰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협객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정의로운 일, 약자를 도와주는 일을 가장 즐겼기 때문이다.

사 년 전, 수횡천은 사람들에게 추대되어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 뒤로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더욱더 도와주며 무림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힘도 많이 썼지만, 돈도 적지 않게 들어갔다.

하물며 수횡천은 능력이 마음을 못 따라갔다. 경영에는 소질이 없이 돈을 쓸 줄만 알았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며 남겨 준 재산이 적지 않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육장봉으로서는 수횡천이 이처럼 궁색해진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수횡천 이 인간은 다 좋았지만, 지나치게 손이 크고 너무 정의로웠다.

‘이런 사람은 호형호제하긴 좋지만, 동업자로는 좋지 않지.’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라면 절대 수횡천과 동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횡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수횡천은 육장봉의 말에 대꾸하기도 싫었다. 육장봉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전 한두 냥도 내놓을 수 없는 무림맹과 곧 열어야 할 무림대회를 떠올리자,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란 말인가?”

‘육장봉은 남상권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남상권이 맞다 해도, 지금 이놈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편이 반년 뒤 온 무림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무튼 육장봉도 그가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속인다 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올해의 무림대회는 수횡천이 맹주가 된 뒤 처음으로 개최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맹주들은 전부 문제없이 잘 해냈다. 그의 차례가 되어 문제가 생긴다면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 앞으로 무슨 낯으로 무림 사람들과 그를 추천하여 맹주의 자리에 앉힌 윗사람들을 대하겠는가.

“그대는 변경에서 돌도 금으로 만든다고 소문난 사람을 아는가?”

‘월령안이 평생 먹고살 돈쯤은 손 하나만 까딱하면 벌 수 있다고 했었지?’

육장봉은 월령안이 이 무림맹의 가난뱅이들로부터 어떻게 돈을 벌지 알고 싶었다.

“네가 말하는 건…… 월 낭자, 월씨 가문의 가주 말인가?”

묘하게도 수횡천은 월령안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번에 변경에 온 목적은 돈을 좀 벌기 위해서였다. 강호인을 써서 일을 처리할 만한 호구가 변경에 있을지, 사전에 조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월령안 낭자의 상황은 그도 알아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만 보고 바로 뒷전으로 두었다.

사랑에 빠진 어린 아가씨는 당연히 죽고 죽이는 강호인과 강호의 일에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강호를 위해 힘을 쓸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수횡천도 이런 사람에게 시간과 정력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 맞아!”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횡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낭자가 돈을 그렇게 잘 번들 어쩌겠나. 젊은 아가씨가 이런 죽고 죽이는 일을 좋아할 리도 없고. 나도 어린 아가씨의 돈을 갈취하는 일 따위는 할 수가 없어.”

“원래 수 맹주는 변경에서 갈취한 돈으로 무림대회를 열려고 했구먼.”

육장봉은 고개를 저으며 실망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수횡천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난 그 뜻이 아니고, 난…….”

“수 맹주, 해명할 필요는 없네.”

육장봉은 손을 들어 수횡천의 말을 끊었다.

“무림대회는 사 년에 한 번씩 열리지. 수 맹주가 돈을 구해 올해 무림대회는 어떻게든 넘긴다 해도, 사 년 뒤에는 또 어찌할 셈인가? 다시 변경으로 와서 사람을 찾아 부탁할 텐가?”

육장봉은 비웃다가 말을 멈추고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육장봉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수 맹주가 당장 돈을 구할 수 있어 무림대회를 무사히 개최한다 치지. 앞으로 사 년 동안 무림맹을 어떻게 유지할 셈인가? 수 맹주, 자네도 알다시피 무림맹은 충분한 돈으로 받쳐 주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없네. 언젠가는 위엄을 잃고, 무림의 사람들도 모래알처럼 흩어지겠지.”

무림맹이 없다면 마교가 무림을 독점할 것이다. 그러면 조정이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제왕의 길은 균형 유지에 있다.

황제는 균형을 유지하는 데는 고수였다. 무림에 대한 제어권을 잃지도, 그들 중 하나가 지나치게 강대해지지도 않게 했다.

무림맹이 흩어진 뒤 황제가 다시 무림에 손을 쓰게 하느니, 육장봉이 지금 무림맹을 일으켜 세워 주는 게 더 나았다.

다른 건 몰라도, 수횡천 이 사람은 정의롭고 정정당당했다. 이런 사람과 손을 잡는다면 발목을 잡혀 함께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척을 진다 해도 부담이 없었다. 적어도 등 뒤에서 치사한 수단을 쓰지는 않을 테니까.

수횡천으로서는 육장봉의 속셈을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육장봉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사색에 잠겼다.

육장봉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은 진작에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최근 이 년간 많은 강호인이 무림맹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다들 무림대회까지 지켜보자며 벼르는 중이었다.

만약 그가 무림맹과 무림인들의 현재 생활 수준을 개선하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다주지도 못한다고 해 보자. 이 맹주 자리는 둘째 치더라도, 무림도 지금과 같은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

그때가 되면 무림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조정에서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 손을 대면 무림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덩달아 조정의 진압도 더 엄격해질 것이다. 이는 조정과 무림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수횡천은 월령안이라는 어린 처자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장봉의 이 말은 그에게 중요한 것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육장봉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육 장군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수 맹주, 난 할 말을 다 했네.”

육장봉은 수횡천을 훑어보았다. 행색이 남루했고 옷 색깔은 바랬으며, 얼굴도 누렇고 여위어 있었다. 수횡천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배도 불리지 못하는 무림맹주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육장봉은 말을 마치고 수횡천의 곁을 지나쳐 갔다.

수횡천은 묻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결국 참지 못했다. 육장봉이 그의 곁에서 떠나려는 순간,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육 장군, 당신은 대체…….”

“수 맹주, 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그쪽에도 좋을 것이 없네.”

육장봉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곧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갔다.

수횡천은 검을 든 손을 살짝 들었다가 곧 내려놓았다.

여기는 변경이었다. 그로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손을 쓴 순간 곧바로 변경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랬다가는 돈을 구하지 못해 무림대회도 열지 못하게 된다. 무림맹은 크게 망신당할 것이다.

수횡천은 검을 꽉 움켜쥐고 꾹 참았다.

육장봉이 정말 남상권이 맞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 간절함은 하늘만 알리라.

육장봉이 정말 남상권이라면, 수횡천은 무림대회를 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판 겨루었을 것이다. 이 년간 남상권의 마교에 밀려 생계마저 어렵게 된 분노를 마음껏 터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멀어져 가는 육장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육장봉이 떠난 뒤에도 수횡천은 여전히 길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가 떠나간 방향을 보며,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해서야 주루의 지붕으로 돌아갔다.

지붕에는 소육자가 뚱뚱한 고양이를 안고 쿨쿨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듣고서도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다. 수횡천임을 확인하자, 구시렁거리며 입을 쩝쩝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걱정거리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근심 걱정으로 매일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는데, 소육자 이 녀석은 이렇게 잘도 자다니!’

정말 샘이 날 지경이었다.

수횡천은 불현듯 소육자를 발로 걷어차서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발을 들어 걷어차려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만약 소육자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의원에게 보일 돈도, 소육자에게 좋은 것을 먹일 돈도 없었다.

수횡천은 풀이 죽었다.

‘돈이 없으면 사람도 마음껏 때릴 수 없구나.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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