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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78)화 (78/1,004)

78화 미안해하지 않겠소

육장봉에게는 부드럽고 탱글탱글한 느낌이 낯설게 다가왔다. 손끝에 남아 있는 여운이 신기했다.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찔러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허공을 찔렀다.

“대장군, 지금 무슨 짓이세요?”

육장봉에게 세게 찔린 바람에 월령안의 볼이 손톱에 긁혔다. 볼에서 아픔을 느낀 그녀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너무 서두르다 보니 의자에 부딪혀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앗……!”

월령안은 질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

육장봉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이 머리보다 반응이 빨랐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손이 뻗어나갔다. 월령안의 허리를 붙잡고 가볍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품속에서 꽃향기가 풍겼다.

그제야 육장봉이 정신을 차린 듯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월령안은 깜짝 놀랐다. 뒤로 벌렁 넘어지며 추태를 보일 줄로만 알았다. 뜻밖에도 육장봉이 구원의 손길을 뻗을 줄이야.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 인사를 하려다가, 문득 사실이 생각났다. 육장봉의 이상한 짓 때문에 깜짝 놀라 뒷걸음치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월령안은 화가 나서 육장봉을 세게 밀쳤다.

“육 대장군, 이 손 놓으세요!”

‘육장봉 이 인간이 미쳤나. 멀쩡한 내 얼굴을 왜 찔러?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잖아!’

“내가 손을 놓아도 제대로 설 자신이 있소?”

육장봉은 뒤로 온몸을 젖힌 채 그의 팔 힘에만 의지하고 있는 월령안을 보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월령안이 이렇게 넘어진 덕에 그는 곤경에서 벗어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왜 월령안의 얼굴을 찔렀는지 해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한 번으로 모자라 한 번 더 찌르려고 했다니.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군.’

손가락 끝에는 열기와 부드러운 촉감이 남아 있었다. 이게 아니라면 조금 전 그 사람이 자신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설 수 있어요!”

월령안은 양손으로 뒤에 놓은 의자를 붙잡았다. 지탱할 것이 생기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그럼 원하는 대로.”

육장봉은 시원하게 바로 손을 놓았다.

허리를 지탱하는 힘을 갑자기 잃은 그녀는 비틀거렸다. 다급히 손으로 의자를 붙잡았지만, 그녀의 무게를 지탱하던 의자마저 갑자기 넘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도 발밑이 미끄러지며 기댈 곳을 잃고 따라서 넘어지고 말았다.

월령안은 너무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명을 애써 참기는 했지만,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넘어지면 얼마나 아플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넘어지는 순간, 강한 힘이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 그 힘의 작용 때문에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대로 육장봉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앗!”

얼굴이 따뜻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의 가슴팍이 너무 ‘탄탄’한 바람에 코가 시큰거렸다.

“아파!”

월령안은 잇달아 뒷걸음질 쳤다. 코에서 전해지는 시큰함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코를 움켜쥔 채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비음 섞인 목소리로 울먹거리는 모습이, 마치 괴롭힘을 당한 여자애처럼 보였다. 전혀 반항할 힘도 없어 분하다는 듯 아픔을 호소하고만 있었다.

육장봉은 자신의 강인한 마음이 이 부드러운 울먹임에 뚫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월령안을 다시 한번 괴롭혀 그 울먹임을 더 듣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내가 무슨 생각을!’

육장봉은 불현듯 어찌할 바를 몰라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무질서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다음 육장봉은 평생을 통틀어, 가장 수치스러운 짓을 했다.

상대를 눈앞에 두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월령안, 시간이 늦었으니 다른 일이 없다면 난 이만 가겠소.”

육장봉은 대충 인사를 했다. 당장 굳은 얼굴로 밖으로 걸어가더니 몇 걸음 만에 서재를 빠져나가 버렸다,

‘월령안의 서재에 무슨 독이 있는 게 아닐까.’

더 있다가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이렇게 간다고?”

월령안의 시큰거리는 코는 한참이 지나서야 통증이 멎었다. 그녀는 육장봉의 차가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소를 했다.

“내 코를 다치게 해 놓고,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가다니. 육장봉, 당신이 그러고도 사내야?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한다고 사람이 죽나? 망할 육장봉, 내가 전생에 당신에게 빚이라도 진 게 분명해. 매번 만날 때마다 좋은 일이 없잖아! 날 괴롭히지 않으면 죽기라도 해? 날 괴롭히고 사과 한마디 하면 죽냐고!”

월령안의 목소리에는 콧소리가 잔뜩 섞여 있었다. 두 눈은 벌게져서 마치 놀란 토끼처럼 보였다. 그녀는 볼멘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사내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잘 알겠지.”

다시 돌아온 육장봉은 월령안의 애교스러운 말투를 들었다. 그녀의 빨갛게 부은 눈을 보았다.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월령안이 이렇게 그의 뒤에서 욕을 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다, 당, 당신…… 당신 왜 돌아왔어요?”

월령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난 원래 밖에 있었소. 멀리 가지 않았어.”

사실은 문턱을 넘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육장봉은 적군의 천군만마를 앞에 두고 후퇴라고는 모르던 사내였는데, 월령안이라는 여인 하나에 쫓겨 도망을 치다니! 내가 왜 도망쳐야 하지?’

육장봉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월령안에게 아직 하지 못한 말도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월령안이 씩씩거리며 하는 귀여운 질책을 듣게 들었다.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기가 나한테 부딪혀 놓고, 아프다고 칭얼대다니. 정말…… 엄살이 심하군.’

하지만 놀란 토끼처럼 잔뜩 긴장한 월령안을 보자,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엄살이 그의 눈에는 퍽 흥미롭게 비쳤다.

육장봉은 가볍게 기침을 함으로써 입가에 맴도는 웃음소리를 감췄다. 긴 다리를 놀려 성큼 서재로 들어섰다. 어안이 벙벙한 월령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월령안이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육장봉은 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앞으로 더 다가가지는 않았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넘어진 의자를 일으켰다. 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월령안과 거리를 유지했다.

그가 물러서자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육장봉은 살짝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월령안, 나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요.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 한다고 죽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방금 ‘미안하다’라고 세 번이나 말했는데?’

“저도 장군께서 반드시 미안하단 소리를 하셔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월령안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얼굴에는 아직도 놀라움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고 나서 콧소리가 섞인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장군, 저……. 아직 다 못한 말이 있어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

월령안도 방금 깜짝 놀랐다는 것은 인정했다.

누구라도 한밤중에 문가에 불쑥 나타난 그림자를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것도 방금 몰래 욕하던 상대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치미를 떼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육장봉 때문에 깜짝 놀란 척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욕을 들은 그가 보복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면 곤란했다.

육장봉은 여인이라고 봐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관찰에 따르면, 육장봉은 그녀가 우왕좌왕하고 불쌍하게 보이는 모습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러한 모습에 경계심과 적개심을 늦추는 듯했다.

그녀는 웃음을 구걸하는 광대 노릇은 하기 싫었다. 그래도 목숨을 생각해서 일부러 겁먹은 척하기로 했다.

오늘 밤 이 고비만 넘길 수 있다면, 육장봉 앞에서 조금 망신당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음.”

육장봉은 그녀가 아직도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지나쳤나?’

하지만 육장봉은 이 미안함을 순식간에 지워 버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월령안을 바라보지 않았다. 드물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난 절연장을 잘 간직하고, 공표하지 말라고 당부하려고 돌아왔소. 소 승상 그 인간은 무엇보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오. 만약 사람들에게 절연장이 알려져 망신살이 뻗치면, 소 승상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요.”

육장봉은 평소에 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월령안이 겁을 먹은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몇 마디 더 하였다. 그녀가 피해를 보고, 억울함을 당할까 걱정되었다.

“말하지 않을게요. 대장군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합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똑똑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순간의 흥분을 못 이겨 소문을 퍼뜨릴까 해서 하는 소리요.”

소 승상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월령안이 사람들 앞에서 소 승상의 체면을 구긴다면, 그도 그녀를 해코지할 게 뻔했다.

다른 경우는 몰라도, 소 승상이 황제 앞에서 월령안을 들먹이면 그녀는 크게 피해를 보게 된다. 소 승상은 황제의 측근으로서, 황제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었다. 황제 앞에서 그의 말은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육장봉이야 소 승상에게 밉보여도 괜찮았다. 소 승상이 황제 앞에서 그를 들먹이면, 그도 대놓고 소 승상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월령안은 달랐다. 그녀에게는 황제를 만날 자격도 없었다. 어렵사리 황제를 만나더라도, 황제는 매일같이 봐온 소 승상의 말을 더 믿을 게 뻔했다.

이미 황제는 소 승상에게 소여방의 사생아 일을 덮으라고 알려 주었다. 이것만 보아도 황제가 소 승상을 두둔하는 게 확실했다.

만약 언젠가 월령안과 소 승상이 재판이라도 벌여 황제 앞까지 가게 된다고 해 보자. 그때는 옳고 그름이 딱히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누구를 더 신임하고, 누구를 더 두둔하느냐에 따라 판결이 나리라.

지금 황제가 더 신임하는 사람은 소 승상이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갑자기 그녀를 생각해 진지하게 충고를 하자, 순간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입으로는 순순히 대답했다.

“대장군께서 충고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정말로 제 처지를 잊을 뻔했네요.”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육장봉을 잘 달래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니 잠시 창피한 것쯤은 무릅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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