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한발 양보하다
육장봉의 손가락은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 번 또 한 번, 무심결에 두드리는 불규칙한 소리였다. 장단이 빠르고 듣기 좋았다.
그 소리는 육장봉의 좋은 기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웃어른들이 잘 알지요.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들과 친분이 있었어요. 그들의 체면을 봐서라도 절 챙겨 주실 거예요.”
삼 년 전, 육장봉에게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이변이 없는 한 하곡 대마상의 아들에게 시집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굳이 육장봉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당신 어머님의 관은 광원사(廣源寺)에 있소.”
월령안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육장봉 때문이 아니라 육장봉이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자신의 절박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 흥분을 눌렀다.
육장봉의 예상과는 달리, 월령안은 어머니의 관에 대해 더 묻는 대신 되물었다.
“대장군께서는 하곡의 말이 필요하십니까?”
모두 각자 원하는 것이 있었다. 누가 누구보다 고귀하지도, 더 강하지도 않았다. 육장봉이 그녀와 협상을 할 생각이면, 착취할 생각은 버리고 동등한 자세로 그녀를 대해야 한다.
협상하는 자리든, 장사하는 곳이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서로 가지고 있다면 평등한 거래이다. 그녀는 육장봉의 체면을 봐주지도, 쉽사리 이득을 양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소! 하곡의 말이 필요하오. 그것도 제일 좋은 오추마로. 월 낭자, 얼마나 구할 수 있겠소?”
육장봉이 월령안의 속셈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잔머리를 쓴다 해도 상관없었다.
비장의 패를 내놓기 싫다거나, 남에게 호구 잡히기 싫다는 등의 속셈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다만 월령안은 그 속셈을 남들보다 더 완벽하게 감추면서도 얄밉지 않게 보이는 법을 알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먼저 값을 부르지 않고, 그녀에게 문제를 던져준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녀가 어머니의 시신을 받은 대가로 얼마나 낼 수 있을지는 육장봉도 잘 모를 것이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녀 역시 그 대가로 얼마나 내놓을 수 있을지, 육장봉에게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냥 하곡의 말만 필요하신 거라면, 대장군께서 내놓으시는 금액만큼 시세에 맞춰 구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오추마는 어려워요. 이건 운도 따라 줘야 하거든요. 대장군께서 원하신다면 알아봐 드릴게요. 대장군께서 구매하시겠다면 시중의 오추마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곡의 마상이 월씨 가문 가주의 위상에 그 정도밖에 안 해 준단 말인가?”
육장봉이 비웃었다.
“저 같은 일개 여인이 믿을 것이라고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남긴 친분밖에 없는데요. 제 위상이라고 할 만한 게 뭐 있겠나요. 있다 해도 몇 푼어치나 되겠어요?”
월령안은 전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깎아내렸다. 이렇게 해서 육장봉이 양보를 해 준다면, 얼마든지 더 자신을 깎아내릴 수 있었다.
“월 낭자가 이렇게 나오다니, 성의가 없군.”
육장봉은 가볍게 웃으며 월령안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나는 이미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품 안에는 육장봉이 가져온 절연장이 들어 있었다.
육장봉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이자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보였다. 순간 울화가 치밀었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대장군께서는 지금 이 은혜를 갚으라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시중에 나타난 오추마는 제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장군께 구매해 드릴게요!”
육장봉에게 진 신세를 돈으로 갚을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를 만족시킬 셈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돈을 남겨 두어도 소용이 없었다. 누구에게 쓰든 상관없는 돈인데, 이번 기회에 육장봉에게 진 신세를 갚는다면 오히려 이득을 보는 셈이었다.
육장봉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래 가지고서야…… 정말 성의가 전혀 없군.”
그들의 거래 내용은 분명히 오추마와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월령안은 오추마를 가지고 그에게 신세를 졌다는 마음의 빚을 갚아 버리겠다는 투였다.
‘이 여인은 정말이지…….’
교활하지 않으면 상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그녀에게 꼭 들어맞았다.
“저는 이미 충분한 성의를 보여 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하곡의 말만 원하신다면 그나마 쉽지요. 하곡 목장에서 해마다 국경 밖에서 말을 사들이지만, 조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나면 남는 군마가 별로 없어요.
그래도 대장군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몇백 필은 변통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오추마는 어려워요. 오추마는 청장(靑藏)에 들어가서 찾아야 합니다. 금액은 둘째치더라도 찾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대장군께서 반드시 원하신다면, 저도 열 필 정도까지는 구해드릴 수 있어요. 그 이상은 도저히 힘들 것 같네요.”
“그래서?”
육장봉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대장군께서 얼마나 필요한지 말씀하시죠. 제가 감당할 수 있는지 한번 계산해 보겠습니다.”
‘돈을 내기는 싫고, 군마는 가지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말을 못 꺼내겠다는 거겠지? 내가 먼저 공짜로 주겠다고 하면 되는 거지?’
육장봉은 오만하고, 호락호락하지 않고, 감추기 좋아해 죽어라 속을 내보이지 않는다. 이런 남자와 거래하는 것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협상하는 자리에서 양측 모두 비장의 패를 보이지 않는 건 있을 법하다. 그래도 가격은 말을 해야 거래가 진행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육장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추측하게만 내버려 뒀다.
그녀가 육장봉의 요구를 알아내려면, 가격을 처음부터 높이 불러서는 안 되었다. 낮게, 가격을 최대한 낮게 부르며 그의 요구선을 더듬어 가야 했다. 이것이 바로 협상의 규칙이었다.
월령안은 자신의 얼굴이 두꺼운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육장봉의 ‘성의가 부족하다’라는 말에 창피해진 나머지 벽에 머리를 박았을 것이다.
월령안이 먼저 입을 열자, 육장봉도 더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음, 그럼 오추마 열두 필로 하겠소. 암컷은 열 필, 수컷은 한두 필이면 되오. 그리고 하곡의 군마는 됐소. 나는 몽골말을 좋아하는데 월 낭자가 수컷, 암컷 몇백 필 구해주는 건 어떻겠소?”
“장군, 오추마는 길거리에서 파는 배추가 아니에요. 몽골말도 길거리에 널린 무가 아니라고요. 한 번에 수십 필, 수백 필을 원하신다니. 저를 얼마나 곤란하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육장봉은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그녀는 오추마 열몇 필은 구해볼 수 있다고 했지, 수십 필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오추마 수십 필에다가 또 몽골말 수백 필이라니. 육장봉 진짜 너무하는 거 아냐?’
오추마는 아주 귀한 말이었다. 육장봉은 같은 하곡 말이라고 오추마가 다른 말하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몽골말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외족(外族)에게서 사야 하는데 수십 필도 아닌 수백 필을 요구하다니. 몽골의 칸을 장님으로 취급하는 꼴이었다.
“내가 길거리의 배추나 무 따위를 마음에 들어 하리라고 생각하오?”
육장봉은 책상 위에 올린 손가락으로 상판을 튕겨 묵직하고 탁한 소리를 냈다.
“후…….”
이를 본 월령안은 하려고 준비했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뾰로통하게 육장봉을, 아니, 육장봉의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대장군, 저에겐 소 승상이 직접 쓴 절연장이 있어요. 전 당당하게 제 어머니의 관을 가져올 수가 있어요. 굳이 대장군과 거래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요.”
육장봉이 막는다면, 그녀가 당당하게 모셔오지는 못해도 사람을 고용해 훔쳐 올 수는 있었다.
강호에서 이름을 날린 협객들은 이런 일을 썩 내켜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 년간 무슨 사파가 활개 치는 바람에, 이 일을 맡으려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럼 내가 한발 양보하겠소. 월 낭자가 육십이에게 주겠다고 했던 말을 이쪽으로 빼 주는 거로 하시오. 육십이에게는 따로 오추마를 찾아 줄 필요는 없소. 그리고 몽골말은 암수 절반씩 백 필을 준비해 주시오.”
한 발 양보하겠다더니, 정말 딱 한 발만 했다. 그래도 양보를 했다는 것은 정말로 협상할 마음이 있다는 의미였다. 월령안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아까의 미소를 다시 지으며 말했다.
“대장군, 이러는 게 어떨까요? 오추마 서른한 필을 드리지요. 올해 연말 전에 거세한 말 여섯 필, 암컷 열 필, 수컷 한 필을 먼저 드릴게요. 나머지는 내년에 다시 드릴게요.
몽골말도 두 번으로 나눠서 드릴게요. 한 번에 몽골에서 백 필 이상을 가져왔다가는 칸이 눈치를 챌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이 판매로는 끝이에요.”
“안 되겠소!”
육장봉이 거절했다.
“대장군, 전 이미 최선을 다했어요. 더 많이는 정말 힘들어요.”
월령안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육장봉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거래를 더는 진행할 수 없었다. 그는 터무니없이 높은 대가라는 패를 내놓아, 일부러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올해는 거세한 오추마 열두 필부터 주시오. 몽골말은 절반을 먼저 주고, 나머지는…… 내년 연말 전에 받아도 좋소.”
월령안은 속으로 잠시 계산해 보고 대답했다.
“그러죠!”
한 번에 오추마 열두 필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몽골말 오십 필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몽골에서 말을 운반해 오는 일도 어려웠다. 하지만 어머니의 일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해낼 수 있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떠보듯 물었다.
“계약서를 쓸까요?”
“필요 없소. 당신을 믿소.”
협상은 끝났다. 육장봉도 더는 머무르지 않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난 낭자를 믿소. 그리고 당신 어머니 관은 잠시 광원사에 두었소. 내가 주지 스님에게 말을 해 놓을 터이니, 언제든지 가져가도 좋소. 물론 계속 거기에 두어도 되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있는 한 누구도 감히 도둑질하지 못할 것이오!”
육장봉은 마지막 한마디를 특별히 강조했다. 이를 통해 조계안이 한 짓을 알고 있음을 드러냈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월령안도 서둘러 일어나 재빠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월령안의 이 웃음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기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가 이렇게 웃자 양쪽 볼에 보조개가 옴폭 패였다.
그녀는 지금 너무 기뻤다.
“천…… 만에.”
월령안이 웃는 모습을 육장봉이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조개가 팰 정도로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어쩌면 전에 이렇게 웃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육장봉은 주의 깊게 살펴본 적도,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본 적도 없었다.
‘이 보조개는 좀 귀여운데.’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월령안의 보조개를 찔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