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당신 마음에 꼭 들 거요
달걀로 바위를 칠 수는 없는 법. 월령안은 자신이 아직 나약하여 육장봉의 상대가 안 됨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의 비위를 맞춰 돌파구를 찾는 것뿐이었다.
월령안은 전혀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육장봉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세를 단정히 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육 장군께서는 어쩐 일로 야심한 시각에 방문하셨는지요?”
월령안의 자세는 공손하고, 말투도 평소와 같았다. 예전의 가시 돋친 말도, 오늘 낮의 비굴함도 없이 평소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녀가 이렇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 여인은 온몸에 역린(逆麟)을 두르고 있었다. 절대로 유순하고 고분고분한 여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개의치 않았다.
월령안이 가시를 잔뜩 치켜세우면 그도 갑옷을 걸치면 되었다. 그녀는 유순하지도, 고분고분하지도 않았지만, 그도 충분히 강압적이고 포악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었지만, 육장봉이라는 노련한 사냥꾼 앞에서는 아직 조그마한 새끼 늑대일 뿐이었다. 이 새끼 늑대가 육장봉 앞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으리라.
월령안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온몸으로 경계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육장봉은 슬그머니 웃고 말았다.
“월 낭자가 사람을 시켜 배상금 상환을 독촉하지 않았던가? 내가 직접 가져왔소! 이 정도면 만족하겠소?”
육장봉은 나무함을 월령안의 앞으로 밀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 웃는 듯 마는 듯했다.
그는 자리를 떡 차지하고 당당함을 뿜어내며 앉아 있었다. 상반신을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함을 옮겨 주었을 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
육장봉이 가까이 다가오려는 찰나,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관절마다 뻣뻣하게 굳어 있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이 작은 행동도 육장봉의 시선을 피하진 못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심지어 월령안을 놀려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는 나무함을 월령안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서둘러 몸을 바로 하는 대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열어 보지 않겠소?”
주황색 불빛이 육장봉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몽환적인 빛을 드리워 주었다. 평소에 범접하기 힘든 냉혹함이 많이 사라져 한결 편안해 보였다. 거기에 어두운 밤이 선물해 준 고혹적인 매력도 빛났다.
월령안은 맞은편의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을 바라보았다. 육장봉 특유의 차가운 향을 맡자,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주변의 공기가 전부 사라진 듯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육장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와 육장봉은 이렇게 친밀하게 있었던 적이 없었다.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눈을 깜빡이기도, 거리를 벌리기도 아쉬웠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는 육장봉 이 인간에게 놀아나서는 안 돼!’
육장봉은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다. 월령안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삼 년간 육장봉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견뎌온 허울뿐인 혼인 생활이 바로 그 증거였다.
육장봉은 좋은 배필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돌로 된 듯했다. 그녀 때문에 녹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품는다고 따뜻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육씨 가문 사람들은 벌레를 쫓듯 그녀를 쫓아냈다. 그 치욕은 그녀가 삼 년 동안 스스로를 육씨 가문 사람이라고 여긴 벌이었다.
‘다시는 육장봉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야!’
월령안은 독하게 혀를 깨물었다. 혀끝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억지로 설렜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닥을 바라보자,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겹쳐져 아주 친밀해 보였다.
갑자기 월령안은 씁쓸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제정신을 차렸다.
그녀와 육장봉의 거리는 마치 바닥에 비친 그림자와 같았다. 더없이 친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원한 관계였다.
월령안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냉정해졌다. 더는 자신을 일깨울 필요도, 몰아붙일 필요도 없었다. 막상 마음을 다잡자, 머리가 더없이 차가워졌다.
심지어 다시 고개를 돌려 육장봉의 그 준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는 냉담함뿐이었다. 예전의 그 망연함과 간절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월령안?”
육장봉은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눈치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름을 불렀다.
‘월령안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 밤에 찾아온 목적은 오로지 배상을 위해서일 뿐이다. 다른 뜻은 없었다.
육장봉은 무의식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먼저 해명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입을 벌리기는 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육장봉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바로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됐다. 뭐 해명할 게 있다고. 월령안이 함을 열고 안에 든 걸 보면 알겠지.’
육장봉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손을 들어 나무함을 가리켰다.
“얼른 열어 보시오. 이게 마음에 들까?”
“대장군께서 배상하신다는데 소녀의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월령안은 미소로 자신의 동요를 감추려 했다.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무슨 소용이야? 내 마음에 안 들면, 반품이라도 되나?’
“음, 당신 마음에 꼭 들 거요.”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에 차 있었다.
월령안은 말없이 가볍고 웃고 바로 나무함을 열어 보았다.
그녀의 앞에 놓인 나무함은 배나무로 만들어진 평범한 것이었다. 동으로 만든 걸쇠만 있을 뿐, 자물쇠조차 없었다. 특별해 보이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귀중품이 담겨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월령안은 아무 기대 없이 나무함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서신 한 통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전혀 놀랍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육장봉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동등하게 취급한 적이 없었다. 동등한 눈빛으로 마주 본 적도 없었다. 육장봉이 배상한다 해도, 결코 동등한 위치에서 이뤄지는 배상이 아닐 것이다.
정말이지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월령안이 서신을 바로 열어 보지 않자, 육장봉은 독촉했다.
“열어 보시오.”
“네, 대장군.”
월령안은 편지 봉투 안의 편지를 꺼내어 펼쳐 보았다. 그리고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소 승상이 직접 쓰신 건가요?”
‘절연장이잖아!’
소 승상이 절연장을 썼다. 그녀의 어머니는 드디어 소 승상, 그리고 소씨 가문과 철저히 인연을 끊게 되었다.
‘이, 이건 정말…….’
그녀에게 이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그렇소.”
육장봉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월령안이 반드시 기뻐할 줄 알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월령안의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과 환희가 섞인 표정을 보았다. 야심한 밤에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 그 사람이 어떻게 허락한 거죠? 지금까지 제가 갖은 수를 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는데요.”
월령안은 편지를 꼭 쥐고 손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손에 든 이 절연장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또 절연장을 받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조계안이 청주로 가서 범씨 가문 사람들과 싸우라고 압박했을 때, 그에게 부탁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소 승상을 압박해 자신의 어머니와 연을 끊도록 도와 달라고.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바로 억눌렀다.
그녀로서는 말을 꺼내기는커녕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가는, 황제가 그녀를 욕심이 많고 주제도 모른다고 여길 것 같았다.
그래서 조계안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소함연과 육비우를 혼인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소여방의 사생아 일을 폭로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일은 어렵지 않았다. 또 황제가 소 승상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이, 손짓 한 번이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황실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자신의 어머니와 소 승상의 절연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황제가 난감해진다. 황제는 그녀가 얄팍한 능력에 기대어, 본분을 망각하고 방자하게 군다고 여기리라.
그녀는 앞으로 황실을 위해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황실의 충복이었고, 황제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서 존재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황제를 난처하게 만든다면, 그녀의 이용 가치는 사라지는 셈이다. 그 결과는 아주 처참할 것이다.
그래서 소 승상과 어머니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도, 조계안에게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특히 거래라는 방식으로 황제를 위협할 생각은 더욱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차기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황제를 위해 큰 공을 세울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그 공로로 어머니의 자유를 바꿀 생각이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이렇게 쉽게 해내다니.
정말이지 너무 기쁘고 놀라웠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소 승상이 친필로 쓴 절연장을 잘 접어서 봉투에 도로 넣고 입구를 봉했다.
모든 것을 마친 월령안은 그제야 일어나 육장봉에게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월령안이 육장봉에게 큰절을 올리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함을 담아 자진해서 큰절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육장봉은 그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렇게 큰 도움을 주었으니 그 대가는 절 한 번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월령안은 또 정중하게 약속했다.
“앞으로 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대장군께서는 언제든지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이는 월씨 가문 가주로서의 승낙이었다. 나중에 육장봉이 입을 열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이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감사를 했다. 육장봉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호방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이건 당신에게 배상하는 것이오.”
“이 절연장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배상금으로 친다 해도 거스름이 아주 많이 남습니다. 절대 육 장군께서 손해 보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육 장군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한 가지 일을 해드리겠습니다.”
월령안은 그 누구에게도 신세 지기 싫었다. 특히 육장봉에게 신세 지기는 더 싫었다.
“그러지.”
이번에는 육장봉도 거절하지 않았다. 맞은편을 가리키며 월령안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배상에 관한 일은 끝났으니, 다른 거래에 관해 얘기해 보는 건 어떻겠소?”
“저와 어떤 거래를 하실 건가요?”
월령안은 다시 육장봉과 마주 앉았지만, 많이 편안해졌다. 특히 그가 거래하자고 했을 때, 그녀의 마음은 더욱 편해졌다.
그녀는 거래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육장봉과의 거래도 두렵지 않았다. 거래할 때는 쌍방이 평등하다. 그렇다면 손해를 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곡의 마상(馬商)을 잘 아시오?”